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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둘레, 내포땅 열 개 고을 중에 동쪽과 남쪽에 있는 고을이 예산이다. 예당평야가 있어 예로부터 농사가 풍족했다. 벼 9만 섬을 실어 날랐다 해서 붙여진 고덕면의 구만포 이름이 그냥 나온 게 아닌 것이다. 수로도 발달해서 교역의 중심지로 보부상 활동이 활발하였다.

예산에는 알부자들이 많았다. 우리나라 최초로 민족계 지방은행이 세워진 곳도 예산이다. 미곡생산의 중심지로 지주와 미곡상간의 거래가 활발하여 1913년에 호서은행이 세워지면서 예산은 충청도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예산 가서 옷 잘 입는 체하지 말고 홍성 가서 말 잘하는 체하지 마라'는 말까지 유행한 것은 이 무렵이다.

이것으로 예산 이야기를 멈춘다면 예산을 낮추어 본 것이다. 예산은 충남에서 3.1운동이 제일 먼저 일어난 곳으로 의병항쟁과 독립운동을 한 지사 이름만 열거하더라도 한쪽이 넘을 정도다. 소위 깡이 세다든지, 울뚝불뚝 끈덕지게 버티어내는 울뚝밸정신 혹은 내 갈 길은 내가 알아서 간다는 '냅둬유'까지 내포땅의 기질을 얘기하면서 예산을 빼놓을 수 없다.

추사 김정희는 예산 용궁리에서 났고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윤봉길도 예산 덕산 사람이다. 알려진 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으나 3대에 걸쳐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한 수당 이남규(1855-1907)와 장남 이충구,(1874~1907), 장손자 이승복(1895∼1978)은 예산 대술 출신이다. 이들 모두 내포 땅의 기질을 타고 난 사람들이다.
 
문장가로서 상소투쟁을 벌이고 낙향하여서는 민종식과 함께 의병활동을 한 지사다. 지사로서 있어야할 곳에 있었고 해야 할 도리를 다한 선비다.
▲ 수당 이남규 문장가로서 상소투쟁을 벌이고 낙향하여서는 민종식과 함께 의병활동을 한 지사다. 지사로서 있어야할 곳에 있었고 해야 할 도리를 다한 선비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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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 이남규 집안의 예산 입향기

수당 이남규의 본향은 한산이씨다. 대술면 한산이씨는 아계 이산해(1539~1609)의 후손들이다. 이산해는 보령 출신으로 영의정을 두 번 역임한 북인의 영수였다. 보령은 낙향사족이 많은 고을로 한산이씨도 그중 하나였다. 한산이씨 보령 입향조는 이치로 이산해의 조부다.

이치의 아들, 지번, 지무, 지함과 손자 산해, 산보 그리고 증손 경전은 학문과 관직에서 두각을 나타내 명문사족이 되었다. 이산해는 이지번(?-1575)의 아들이고 토정 이지함(1517-1578)은 이산해의 숙부가 된다. 보령의 한산이씨는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아계파, 이산보의 명곡파, 이지함의 토정파가 주류를 이루어 보령에서 세거해 오고 있다.

이산해의 손자 이구(1586-1609)가 24세에 요절하자 나이 22세에 홀로된 이구의 부인 전주이씨(1588-1668)는 1637년 병자호란 직후 보령을 떠나 현 수당고택이 있는 예산 대술면 상항리에 정착하였다. 이산해의 묘가 있는 곳을 택하여 온 것이다. 이산해는 생전에 대술면 방산리 안골에 묏자리를 정해놓았다 한다.
  
봉수산서쪽 야트막한 능선아래 자리 잡았다. 고택이 생긴 후 후손들이  세거하였으나 방산저수지가 생기는 바람에 명맥이 끊겨 수당고택 근처에 이광임가옥, 이산해묘역과 사당 및 신도비만 남았다.
▲ 수당고택 전경  봉수산서쪽 야트막한 능선아래 자리 잡았다. 고택이 생긴 후 후손들이 세거하였으나 방산저수지가 생기는 바람에 명맥이 끊겨 수당고택 근처에 이광임가옥, 이산해묘역과 사당 및 신도비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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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가 독립운동을 한 집안

이구의 10대손 수당 이남규는 1882년 문과에 급제한 후 요직을 두루 거쳐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구한말 4대 문장가 중 하나였고 단채 신채호의 스승이었다. 이남규와 이충구, 이승복, 삼대가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했으며 이승복의 장남 이장원(1929-1951)은 한국전쟁 당시 해병대 장교로 참전해 목숨을 잃어 4대가 국립묘지에 묻혔다. 전무후무한 일이다.

문장력이 뛰어나고 지조가 굳센 수당은 구한말 굵직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상소로써 일제에 대항했다. 일본군의 철수와 토벌을 주장했고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는 일제를 규탄했다. 1905년 을사늑약직후에는 을사오적을 처벌하라 주장하였다. 1895년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를 반대하여 관직을 버리고 예산으로 낙향하였다.

"일본의 의도는 우리나라에 인물이 없다하여 우리를 우롱하고 사타구니에 끼고 손바닥에 올려놓고서 희롱하는 것입니다."(1894년에 올린 <청절왜소>의 일부)

1906년 홍주의병 때 의병대장 민종식(1861-1917)을 물신양면으로 도왔으며 의병이 크게 패하자 민종식을 숨겨주는 한편 홍주탈환 작전본부를 구성하고 거사 준비도 갖추었다. 이를 알아챈 일본군은 수당과 의병활동을 함께한 이충구를 공주교도소에 투옥시키고 가혹한 형벌을 가하기도 했다.

1907년 전국적으로 의병활동이 확대되는데 위기감을 느낀 일본군은 일진회원의 밀고에 따라 9월 26일 수당고택의 사랑채, 평원정에 들이닥쳐 수당을 압송하였다. 매천야록의 기록에 따르면 '일진회에 참여한 이들은 이남규를 제거하지 않으면 내포에는 편안한 날이 없을 것이라 하면서 밀고를 계속했다' 한다.
  
사랑채 지붕선이 부드럽다. 후원의 굴뚝은 이집안사람들의 기개를 드러낸 듯 참나무처럼 단단하게 보인다.
▲ 수당고택 사랑채 평원정  사랑채 지붕선이 부드럽다. 후원의 굴뚝은 이집안사람들의 기개를 드러낸 듯 참나무처럼 단단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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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부자의 제삿날이 같은 비극적 운명이 또 있을까? 압송 중에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에 이르러 일본군이 수당을 회유하려하자 "죽으면 죽을 것이지 내가 굽힐 것 같으냐", "우리 백만 의병이 내 머릿속에 있다"라 호통 치며 뜻을 굽히지 않자 수당과 장남을 칼로 베었다. 1907년 9월 26일의 일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날한시에 세상을 등진 것이다. 하인 김응길(1867-1907)은 저항하다 함께 순절했으며 의병활동과 관련한 비밀문서를 수발하던 가수복은 12군데나 찔렸으나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져 그 길로 손자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수당의 손자 이승복이 13살 되던 해다. 목숨이 위태로워진 이승복은 13살의 나이로 7살 여동생과 4살 막내를 데리고 보령으로 피신했다 한다. 이승복을 두고 1923년 종로경찰서 폭파에 관여했을 때 피의자 조서에 "13세 때에 조부 이남규와 부친 이충구가 반일 행동으로 일본 수비대에 의해 살해당한 이래 배일사상이 농후하게 되어 항상 조선 독립을 몽상하여온 자"라 했다.

1913년 러시아로 망명한 이승복은 1919년 연해주와 북만주에서 이회영, 김동녕, 이시영, 이상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상해임시정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23년 귀국 후 종로경찰서 폭파를 주도한 김상옥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1927년에는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몇 차례 옥고를 치른 후 서대문형무소에서 광복을 맞이했다.

후손이 들려준 수당고택의 요모조모

수당고택은 1637년 전주이씨가 창건하고 1846년에 중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다른 고택과 다르게 안채가 앞에 나와 있고 사랑채가 뒤에 물러나 있어 안채문이 대문역할을 하고 있다. 대문도 보통문이 아니다. 위아래가 둥글게 휘어진 달문(월문 月門)이다. 재실이 안채 안에 있는 점도 독특하다. 모두 집안 여성을 위한 것이다. 이 집의 주인공은 안채라 말하고 있다.
  
후손이 고택을 볼 때 멀리 떨어져 봐야 제 맛이 난다며 안채 앞 은행나무 밑에서 고택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였다. 사랑채에 담이 없는 점과 사랑채가 안채 뒤로 물러나 있는 점이 이 고택의 특징이다.
▲ 수당고택 안채와 사랑채  후손이 고택을 볼 때 멀리 떨어져 봐야 제 맛이 난다며 안채 앞 은행나무 밑에서 고택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였다. 사랑채에 담이 없는 점과 사랑채가 안채 뒤로 물러나 있는 점이 이 고택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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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 홀로돼 남자 없이 집안을 일으켜 여장부다운 삶을 산 전주이씨의 의지가 담긴 집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전주이씨는 성종의 4대손, 순녕군 이경검의 딸로 처녀 때 이름은 이효숙이었다. 이 집을 돌보고 있는 후손 이문원(이장원의 동생)선생은 대문이 달문으로 생긴 것이 왕족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후손이 제일 먼저 보여준 것이 이 달문이다. 두툼한 화방벽 때문이지 달문은 더 크고 둥글게 보여 마치 달이 뜬 것 같은 극적인 효과가 나타난다.
▲ 안채 달문  후손이 제일 먼저 보여준 것이 이 달문이다. 두툼한 화방벽 때문이지 달문은 더 크고 둥글게 보여 마치 달이 뜬 것 같은 극적인 효과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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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는 수당의 기개를 닮았는지 당당하다. 마침 날이 좋아 사랑채 모든 문을 열어 놓으려 했는데 때 맞춰 잘 왔다며 이문원 선생의 손에 이끌려 사랑채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대청마루가 층이 져 있는 점이 독특하다. 이런 대청은 처음 본 것이다.

사랑채 편액은 평원정(平遠亭)이고 마루 동서쪽에 청좌산거(靑左山居)와 홍엽산거(紅葉山居) 편액이 있다. 평원은 평안을 바라는 홀로된 전주이씨의 마음을 담은 뜻으로 보인다. 후손의 말로 청좌산거는 원래 있던 것이고 홍엽산거는 이와 잘 어울리는 문구라 생각하여 강릉 선교장의 것을 복제해 걸어 놨다 한다. 청좌산거는 추사와 절친한 권돈인의 글씨다.

수당고택 꽃담

이효숙, 이남규, 이충구, 이승복, 이장원...이집안사람들을 대접하여 베풀 듯 수당고택 합각마다 꽃무늬를 새겼다. 합각꽃담이다. 합각꽃담은 사랑채에 둘, 날개채를 포함한 안채에 셋이 있다. 수당고택의 주요 꽃담 무늬는 식물과 꽃문양, 물결문이다.
  
그동안 집을 돌볼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이제 이집안사람들은 대접받을 때가 되었다. 꽃문양으로 치레한 꽃담으로 이 집안사람들을 제대로 대접한다.
▲ 사랑채 서쪽합각꽃담  그동안 집을 돌볼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이제 이집안사람들은 대접받을 때가 되었다. 꽃문양으로 치레한 꽃담으로 이 집안사람들을 제대로 대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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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고 안채 후원에서만 볼 수 있는 꽃담이다.  사랑채 서쪽꽃담에 비해 한결 간결해졌다.
▲ 사랑채 동쪽합각꽃담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고 안채 후원에서만 볼 수 있는 꽃담이다. 사랑채 서쪽꽃담에 비해 한결 간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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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과 꽃은 상징성을 따지기에 앞서 인간에게 많은 것을 베푸는 구실을 한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며 영구히 존재하는 것으로 물결문은 장수를 상징한다. 꽃과 물결무늬 꽃담으로 이 집안은 영구히 시들지 않는 꽃과 영원히 마르지 않는 물을 갖게 되었다.

사랑채 합각꽃담은 수직으로 내려온 꽃줄기를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룬다. 풀잎은 양쪽으로 곡선을 그리며 힘차게 뻗었다. 특히 사랑채 서쪽꽃담의 풀잎은 반원이 중첩되어 무지개처럼 보인다. 사랑채 동쪽꽃담은 전체적으로 서쪽꽃담과 비슷하나 무늬가 한결 간결해지고 줄기 숱도 적어졌다.
  
안채정면을 향하고 있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꽃담이다. 사랑채와 안채 꽃담요소가 섞여있는 꽃담이다.
▲ 안채 날개채합각꽃담 안채정면을 향하고 있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꽃담이다. 사랑채와 안채 꽃담요소가 섞여있는 꽃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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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의 합각꽃담은 사랑채꽃담보다 곡선의 폭이 넓어 유순하고 여성스럽다. 안채 꽃담은 물결문을 기본으로 하면서 날개채에서 시작하여 동쪽과 서쪽으로 옮겨가면서 무늬 변화가 일어난다. 날개채꽃담은 중간단계로서 사랑채 꽃무늬와 안채의 물결문이 섞여 나타난다. 물위에 꽃이 피어있는 모양이다.
  
물결위에 꽃잎과 꽃봉오리를 표현하였다.
▲ 안채 동쪽합각꽃담 물결위에 꽃잎과 꽃봉오리를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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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문양은 사라지고 물결문만 남았다. 물결문과 타원형이 결합된 복합문이다.
▲ 안채 서쪽합각꽃담 꽃문양은 사라지고 물결문만 남았다. 물결문과 타원형이 결합된 복합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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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꽃담은 물결문이 복잡해지고 꽃무늬도 하나로 줄어든다. 물결 위에 꽃봉오리가 맺혔다. 서쪽꽃담은 물결문이 질서정연해지며 꽃무늬는 사라지고 타원형 하나만 남는다. 끝없이 이어지는 물결에 타원형의 원을 그려 넣어 바다 위에 해가 떠있는 형상처럼 보인다. 물결문은 복을 끊임없이 가져다준다고 해서 복해(福海)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수당집안의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은 주로 수당기념관 자료를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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