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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마련된 이태원 압사 참사 희생자 추모공간에 유족의 요청을 받은 재미교포 이기동씨가 희생자인 미국인 청년 2명의 사진과 국화꽃을 놓았다. 한국에 오지 못한 유족과 지인들에게는 사진을 찍어 보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31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에 마련된 이태원 압사 참사 희생자 추모공간에 유족의 요청을 받은 재미교포 이기동씨가 희생자인 미국인 청년 2명의 사진과 국화꽃을 놓았다. 한국에 오지 못한 유족과 지인들에게는 사진을 찍어 보낼 예정이라고 밝혔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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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9일 밤 이태원에 모인 군중이 집회나 시위를 위한 군중이었다면, 행정당국과 경찰의 태도는 분명히 바뀌었을 것이다. 근처에 대통령실이나 대통령 관저가 없다 해도, 10만 군중이 정치적 목적으로 집결한다면, 국가권력이 나서서 집결 자체를 무산시키거나 아니면 질서 유지와 감시를 훨씬 강화했을 것이다.

그런데 10만이 모이는데도 행정력과 경찰력이 충분히 투입되지 않았다. 전날에도 수만 명이 모였기 때문에 상황을 예견할 수 있었는데도, 적절한 사전 대응이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전 대비를 충분히 하지 않은 것은 행사의 목적이 비정치적이라는 인식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군중이 정치적 목소리를 낼 때는 그들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지만, 그렇지 않으면 크게 개의치 않는 국가권력의 태도가 이번 이태원 참사에서도 나타났다. 군중 모임에서 정치적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런 모임에서 반정부적 움직임이 표출되지 않는다면,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건 크게 개의치 않을 뿐 아니라 책임도 통감하지 못하는 국가권력의 습관적 태도가 여실히 드러났다.

대중의 안위에 무관심한 정부 

국가가 비(非)정치적 군중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그들의 자유와 자율을 존중해서만은 아니다. 여기에는 대중 혹은 국민을 바라보는 국가권력의 전통적인 혹은 전근대적인 시선이 묻어 있다.

왕조시대 이야기들을 주로 담은 역사기록물(사료)들에서는 왕족이나 귀족 한두 명의 신상 문제가 상세히 취급된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의 상당 부분은 '어떤 왕족이나 귀족이 암살을 당했다, 낙마했다, 와병에 들어갔다, 누구와 결혼했다' 등등이다. 특권층이나 기득권층의 신변잡기에 관한 내용들도 역사기록물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면서도 역사기록물은 수많은 대중의 안위에 대해서는 높은 비중을 두지 않는다. 백성 몇 명은 물론이고 수십·수백 명의 안전도 관심권 밖인 경우가 허다하다. 전쟁이나 전투에 관해 서술할 때도, 이런 일로 인해 민간 백성들이 얼마나 희생됐는가는 다루지 않고 왕의 군대가 병력을 얼마나 상실했는지를 중점적으로 다룰 때가 허다하다. 허다한 게 아니라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기록물이 대중의 생사에 대해 관심을 표하는 경우의 대부분은 대지진이나 흉년 혹은 역병 등으로 대규모 인명 희생이 발생한 경우다. 지진·흉년·역병 등은 국가 안보나 산업 생산 및 조세 수입에 직접적 파급력을 일으킨다.

역사기록물은 국가적 손실을 초래하는 그런 비상상황을 다루는 기회에 생산자이자 납세자인 백성들의 희생을 언급할 때가 많다. 기본적으로 국가재정의 관점에서 대중의 인명손실을 다룰 때가 허다하다.

역사기록물이 그처럼 차별적 시선으로 대중과 특권층의 안위를 분리해서 바라보는 것은 대부분의 기록물이 왕실이나 조정 혹은 귀족들에 의해 생산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대중의 지위를 낮게 평가하는 시선과도 무관치 않다.

재산과 권력이 별로 없는 일반 백성들은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이 차별적인 역사 서술의 밑바탕에 깔려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일반 백성들은 나라의 주인도, 세상의 주인도 아니라는 관념이 그런 태도를 조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중을 대하는 그런 시선은 세계 대부분 지역에서 왕정체제가 소멸된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 혹은 상당 정도로 잔존해 있다.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이 강조되는 현대 사회에서도 과거의 왕조시대 시각으로 국민과 대중을 낮춰 보는 시선이 국가권력 담당자들 사이에 남아 있다. 

만약 '나라의 주인은 대중이고 국민이다'라는 인식이 대통령과 장관과 공직자들 사이에 만연돼 있다면, 국민 10만 명이 운집하는 행사에 대한 국가권력의 태도도 당연히 바뀔 수밖에 없다. 주권자인 국민들의 안전이 그런 행사로 인해 위험해지지 않도록 지방 및 중앙 정부가 나서서 만반의 대비 태세를 갖추게 될 것이다.

나라의 주인이 국민 대중이라는 인식이 철저했다면, 국민 10만 명이 정치적 행사를 하건 비정치적 행사를 하건 국민 안전을 위해서라도 사전 대비를 철저히 하게 된다. 행사 주최 측이 민간이건 아니건, 주최 측이 있건 없건, '나라의 주인'들을 염려하고 국민들을 지키려는 마음가짐이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든 겉으로 배어나올 수밖에 없다.

집안일을 돌보는 집사는 주인집 가족들이 어떤 명목의 모임을 갖든 간에 그들이 다치거나 희생되지 않도록 신경 쓰게 된다. 봉급을 받고 집안일을 돌보는 자신의 책무를 잘 알기에, 주인집 식구들이 어떤 자리에 가건 그들의 안전에 신경을 쓰게 된다. 집사 자신이 주관하는 행사가 아닐지라도 행사로 인해 가족들이 다치지 않을까 염려하고 단속하기 마련이다.

오늘날의 국가권력 담당자들이 스스로를 국민의 집안일을 돕는 집사라고 인식한다면, 국민들이 참여하는 행사의 주관자가 누구든, 행사의 성격이 어떻든 국민들의 안전을 일차적으로 신경 쓸 수밖에 없다. 나라의 주인들의 안전이 염려된다면 어디라도 달려가서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게 된다.

대한민국은 경찰력이 특히 발달한 나라다. 19세기 초반부터 민란과 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20세기와 21세기에는 세계적인 시민 저항운동이 자주 발생했다. 그로 인해 대통령이 하야한 일도 두 번이나 된다. 그러다 보니, 대중의 동향에 대한 경찰의 대응 능력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 경찰은 100만 이상의 군중이 모이는 행사에 대해서도 잘 훈련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질서를 유지하는 한국 경찰의 능력은 2016년 촛불집회 때는 물론이고 1987년 대통령선거 등의 기회에서도 충분히 증명됐다. 한국 경찰은 전국 곳곳에서 100만 이상의 대규모 선거 유세가 열리는 상황들을 이미 충분히 경험했다.

이는 수천·수만 혹은 10만 정도의 군중이 한 동네에 집결하는 상황에 대해 한국 경찰이 충분한 대응 능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능력을 대중의 정치 모임 때만 발휘하고, 대중의 안위와 관련된 축제 같은 행사 때는 발휘하지 않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국민들이 정부를 비판하는 정치적 모임을 열 때에 그런 능력을 행사하고, 그렇지 않은 모임을 열 때는 그 능력을 감추는 것은 옳지 않다.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국민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 마련이다. 이번 참사의 예방과 관련해 당국이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국민이 이 나라에서 어떤 존재인가 하는 인식의 재무장은 경찰 자체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경찰을 움직이는 대통령과 장관들부터 인식의 재무장이 필요하다. 국민이 하늘이며 국가는 국민을 떠받들어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24시간 깨어 있는 자세로 국민의 안전을 염려하는 마음가짐이 대한민국 국가권력의 담당자들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태그:#이태원 참사, #핼로윈 축제, #국민주권, #왕조국가,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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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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