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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교 거부'는 특정 사안에 대한 학생들의 반대 의사 혹은 저항 의지를 보여준다. 과거 대학생들은 독재에 항거하는 의미로 등교나 수업을 거부했다. 최근엔 초등학교에서 등교 거부가 벌어져 논란이 일었다. 지난 10월 경남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사의 막말에 반발한 5학년 학생 전원이 등교를 거부한 것(관련 기사 : "부모가 너를 괴물로 키워" 초등교사 폭언에 학생들 등교거부 http://omn.kr/21cbw ).

그런데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등교 거부는 50여 년 전 강남에서도 있었다. 경남 초등학생들은 교사의 폭언에 맞선 것이었는데, 반세기 전 강남 초등학생들은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것이었을까?
 
헌인마을은 예전에 음성 나환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미국인 후원자 '에틴저'의 이름을 따 '에틴저 마을'로 부르기도 했다.
▲ 헌인마을의 에틴저 마을 기념비 헌인마을은 예전에 음성 나환자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미국인 후원자 '에틴저'의 이름을 따 '에틴저 마을'로 부르기도 했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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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학부모들의 자녀 등교거부

1969년 3월 초, 서울 (강남구가 생기기 전) 성동구 세곡동의 대왕국민학교 교문 앞은 어른들의 고성과 어린이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학부모들이 일부 아동들의 등교를 막느라 벌어진 소란이었다. 그 아이들이 '미감아(未感兒)'라는 이유로. 

'미감아'는 "병 따위에 아직 감염되지 아니한 아이"라고 사전에서 정의한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한센병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을 '미감아'라고 불렀다. 여기엔 한센병 부모를 뒀지만, '아직'은 감염되지 않았다는 의미가 담겼다. 한편으로는 여느 어린이와 다르다는 차별이 담긴 낙인이기도 했다.

그 시절엔 전국 곳곳에 한센병에서 치유된 사람들이 모여 살던 '음성 나환자촌'이 있었다. '에틴저 마을'로도 불렸던 지금의 서초구 내곡동의 '헌인마을'도 그중 한 곳이었다. 그러나 당시 지역사회는 한센인과 그 가족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전염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대왕국민학교 학부형들이 에틴저 마을 아이들의 등교를 막고 있다.
▲ 조선일보 1969년 5월 11일 기사 대왕국민학교 학부형들이 에틴저 마을 아이들의 등교를 막고 있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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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1969년 '에틴저 마을' 학령기 아동들이 대왕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학부모들이 이를 반대하며 행동에 나섰다. 하지만 이들의 요구는 관철되지 않았고 그들은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 강수로 맞받았다. 등교 거부는 그해 4월 18일부터 5월 17일까지 이어지며 전국적으로 관심을 끌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문교부장관은 자신의 딸을 대왕국민학교에 전학시키기까지 했다. 전염 위험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조선일보> 1969년 5월 15일의 '우리 아이도 대왕교에 보내겠어요' 기사는 등교하는 문교부장관의 딸 사진까지 실었다. 기사는 장관 배우자가 직접 딸의 전학 절차를 밟는 모습과 함께 보건사회부장관 등이 "미감아 어린이들을 집에 데려"가 직접 보살피겠다는 사회 지도층의 설득 노력을 전한다. 
 
문교부 장관이 자기 딸을 대왕국민학교로 전학시켰다는 내용이다.
▲ 조선일보 1969년 3월 29일 기사 문교부 장관이 자기 딸을 대왕국민학교로 전학시켰다는 내용이다.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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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엔... "국민학교를 새로 만들어 취학"

결국 에틴저 마을 아이들은 대왕국민학교에 입학하지 못한다. 대신 교육 당국은 새로운 학교를 설립해 미감아와 미감아 아닌 아동들을 함께 교육하기로 했다. 

<경향신문>의 '대왕교 미감아 분리 교육' 기사(1969년 5월 28일)는 "미감아 5명을 한국신학대학(지금의 한신대) 안에 국민학교를 새로 만들어 취학시키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래서 수유동에 한신국민학교가 설립됐다. 에틴저 마을에서 무척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이듬해인 1970년 3월부터 한신국민학교엔 한강 건너 에틴저 마을 아이들과 당시 도봉구에 살던 아이들이 함께 입학하게 된다. 수유동에 살던 기자도 1973년에 1학년으로 입학했다. 하지만 몇 년 후 강남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졸업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멀리서부터 스쿨버스를 타고 등교하던 친구들 모습은 기억난다.

<조선일보> 1975년 2월 9일의 '상처 씻은 미감아 졸업식' 기사는 한신국민학교에서 거행된 에틴저 마을 아이들의 졸업식 모습을 전한다. "졸업생 중 8명"은 "6년 전 사회를 들끓게 했던" 이른바 "미감아 취학 거부 사건"의 "주인공들"이었다면서.

이후 쌍문동으로 이전한 한신초등학교의 소위 '미감아 교육'은 1991년까지 진행됐다. 에틴저 마을 아이들은 왜 그토록 먼 거리를, 강남 끝자락의 집에서 강북 끝자락에 있는 학교에 다녀야만 했을까?

아마도 50년 전 자기 자녀들을 등교 거부로 몰면서까지 자기와 다른 것을 분리하고 배제하려 한 어른들의 의지가 만든 광경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일지도.

에틴저 마을 혹은 헌인마을

예전에 음성 나환자촌은 도시의 변방에 있었다. 에틴저 마을로 불렸던 헌인마을도 서울의 끝자락이었다. 지금도 헌인마을 앞 큰길로 조금만 더 가면 경기도다.

<조선일보> 1969년 5월 8일의 '왜 아이들이 아니올까... 나 때문에 그럴까?' 기사는 에틴저 마을의 위치와 유래를 알려준다. "서울 중심지에서 28km, 성동구 천호동에서 수원에 이르는 구도를 40여 리" 가다 보면 "대모산 기슭에 '에틴저 마을'이라는 표지가 나타난다"고.

그 마을은 "1963년 국립부평나병원에서 완치된 음성환자 53세대"가 정착한 것이 시초고, "미국 사회 사업가 '에틴저'씨가 기자재를 기증"한 것이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됐다고 기사에서 전한다.
 
에틴저 마을 기념비가 교회 앞에 있다.
▲ 헌인마을의 한 교회 에틴저 마을 기념비가 교회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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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산 시설이 있던 곳이 가구 공장 공단이 되었다.
▲ 헌인마을 전경 축산 시설이 있던 곳이 가구 공장 공단이 되었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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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병 정책을 연구한 부산대학교 김려실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한센인들을 자신들이 세운 정치적 준거에 따라 관리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강제 수용소에서 격리"했다면 "(60년대부터는) 특수지역으로 분류된 농장으로 이주"시켜 "농업이나 축산업"에 종사케 했다는 것이다. 그 흔적이 에틴저 마을로 불리기도 했던 헌인마을이다.

<동아일보> 1975년 11월 8일의 '서울의 농촌 (2) 내곡동 양계마을' 기사를 보면 에틴저 마을의 주업은 양계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사에 따르면 "강남구 내곡동 헌인양계마을"은 "98가구 4백50명"이 살며 당시 "닭 25만 마리를 기르는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양계 마을로 성장했다"고 한다. 또한, 마을 어린이들이 "미감아라는 이유"로 "강북지구 수유동에 있는 사립 한신국민학교"에 다니는 사연도 함께 전한다.

이후 세월이 흐르며 양계장과 양돈장이 있었던 헌인마을은 가구를 만드는 공장 지대로 변하게 된다. 도시 인근 축산업에 규제가 많아지자 축사를 영세한 가구 공장에 임대로 준 것. 혹시 도시와 도시의 경계 사이에 가구단지가 있다면 아마도 과거에 음성 나환자촌이 있던 곳일 수도 있다. 

강남에 있었던 분리와 배제의 땅
 
헌인마을의 축산 시설은 가구 공장이 되었다.
▲ 헌인가구단지 헌인마을의 축산 시설은 가구 공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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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이 진행되고 있지만 시행사 측과 세입자 측의 갈등이 남아 있다.
▲ 헌인마을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지만 시행사 측과 세입자 측의 갈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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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의 헌인마을 혹은 헌인가구단지, 옛 에틴저 마을에 지금 가보면 쇠락한 가구단지처럼 보인다. 헌인마을은 현재 재개발을 추진하는 사무실과 예전엔 축사였을 가구 공장들이 한데 모여있다. 그리고 에틴저 마을의 역사를 목격해왔을 교회도 기념비와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강남이라는 타이틀로 개발되는 지역이 인근까지로 넓어졌지만, 헌인마을은 여전히 예전에 머물러 있다. 그곳은 분리의 땅, 배제의 땅이었다. 한센병이 있다는 이유로 모여 살게 했고, '관리'라는 명목으로 통제했다. 게다가 그들의 자녀는 가까운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멀리 있는 학교에 다녀야 했다. 분리와 배제의 기억을 품은 곳이었다. 

계획대로라면 그곳은 머지않은 미래에 강남주민을 꿈꾸는 이들의 차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헌인마을이 옛 모습을 싹 지우게 되면 에틴저 마을과 미감아 아이들이 겪었던 배제와 분리의 역사는 그들의 기억에만 남을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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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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