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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이흘라바(Jihlava). 수도 프라하 남동쪽으로 130km 거리에 있는 이흘라바는 인구가 5만여 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다. 하지만 해마다 가을이면 체코와 유럽의 열정적인 시네필들이 찾는 곳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가장 오래된 탄광도시지만 지금은 동유럽 최대 다큐멘터리 영화제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한 이흘라바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주최하고 있다. 올해로 26회를 맞는 이 행사는 지난 10월 30일 막을 내렸다. 이 영화제는 여러 나라들의 다큐멘터리를 소개하기도 하고, 다큐업계의 네트워킹 프로그램도 제공한다.

또한 '영감(inspiration)'이라는 열쇳말로 전세계의 다양한 사회문제에 관한 전문가 초청 프로그램도 열었다. 10월 26일 열린 우크라이나 특별 포럼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한 기후환경, 보안, 언론, 인권에 대한 토론이 하루종일 열린 가운데, 저명한 우크라이나 다큐 감독 알리사 코발렌코도 직접 참석해 4개월간의 자원병 참전 경험을 전했다. 다양한 계층의 관객들이 그의 솔직담백한 경험담을 귀기울여 듣고 흥미로운 대화를 나눴다. 
 
2022년 5월 우크라이나군이 하르키우 (Kharviv)지역을 탈환했을 당시 시민군으로 자원했던 작은 마을의 건물 지하 숙소에서 취침하고 있는 모습.
▲ 올해 5월 시민군으로 활동하고 있던 코발렌코 감독  2022년 5월 우크라이나군이 하르키우 (Kharviv)지역을 탈환했을 당시 시민군으로 자원했던 작은 마을의 건물 지하 숙소에서 취침하고 있는 모습.
ⓒ 알리사 코발렌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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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크라이나에서 군인으로 참여하는 여성은 약 3만 명(자국군의 약 15%)에 해당한다. 이는 전세계 여군의 비율중 가장 높은 편이다. 알리사 코발렌코(Alisa Kovalenko) 다큐 감독 이외에도, 다큐 감독 헬레나 막심, 배우 알레나 로트라, 캐스팅 디렉터 사샤 쿠즈네초바, 아나스타샤 셰브첸코, 알리나 레알로바도 참전하고 있거나 경력이 있다. 시민군의 경우 무계약으로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경우와 한번 계약서를 쓰면 종전까지 의무적으로 복무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코발렌코 감독은 전자의 경우로 자신이 자원했던 부대가 폭격을 맞고, 일부 동료를 잃자 4개월만에 귀가해 쉬고 있는 중이다.  

코발렌코 감독은 키이우에서 저널리즘과 다큐멘터리를 전공했다. 그간 <홈 게임즈 Home Games>(2018), <알리사 인 워랜드 Alisa in Warland>(2015), <홈 매치 Home Match>(2017), <시스터 조 Sister Zo>(2014) 등을 연출했다. 우크라이나 여자 국가대표 축구선수이자 소녀 가장, 알리나의 이야기를 진솔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보여준 <홈 게임즈 (Home Games)>는 자국 및 체코, 독일, 영국, 벨라루스등 해외 10여 개 영화제에서 최고 다큐상을 수상하거나 후보로 지명됐다. 우크라이나 동부 분쟁지역의 최전선 현장을 찾은 다큐 <알리사 인 워랜드>(Alisa in Warland)는 전세계 50여 개 영화제에 소개됐고 멕시코, 모로코등에서 최고 다큐상을 세 번이나 수상했다. 

그의 생생한 경험담을 흥미롭게 들은 필자는 다음날 감독과 만나 커피를 마시며 전날 시간상 못다한 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2시간 넘게 긴 대화를 나눴는데 그중 한국 독자들에게 낯설고 궁금해할만한 내용 위주로 요약했다. 
 
2018년 오데사국제영화제에서 <알리사 인 워랜드 Alisa in Warland> 로 최고 다큐상을 수상하는 모습
▲ 오데사국제영화제에서의 수상 모습 2018년 오데사국제영화제에서 <알리사 인 워랜드 Alisa in Warland> 로 최고 다큐상을 수상하는 모습
ⓒ 알리사 코발렌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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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영화 감독이 시민군에 지원한 이유는
 
- 시민군으로 자원한 이유가 궁금하다. 다큐 영화 감독으로서도 나라에 공헌할 수도 있고, 배우자(프랑스 종군기자)와 아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  

"마이단항쟁에서 시작해 돈바스에서의 영화 촬영, 포로경험등 제 복잡하고 긴 인생 여정을 겪으며 내린 결정이다. 제가 위험한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에서 다큐 촬영을 할때 교사, 학생, 과학자등 수많은 평범한 우크라 시민들이 최전선에서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을 목격하고 심한 내면의 갈등을 겪었다.

어쨌든 카메라라는 도구를 들고있던 저는 전쟁이라는 현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던 셈이니 말이다. 어떨땐 카메라를 내려놓고 행동을 하고 싶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동기는 지금 5살인 제 아들이 10년 뒤 러시아의 공격에 맞서 총을 들고 싸우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에게 폭탄과 미사일이 투하되지 않는 아름다운 나라를 넘겨주고 싶을 뿐이다."

- 가족은 본인의 참전 결심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어머니가 무척 힘들어 하셨다. 한동안 슬프고 화가 나셔서 저하고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결국 우리 가족도 작은 공헌을 해야 한다는 제 결심을 존중해주셨다. 물론 제 아들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들이 저를 놔주지 않아 말그대로 도망가야 했다. 제 아들이 제게 왜 '다른 사람들'은 갈 수 없느냐고 물었다. 저는 만약 모든 이들이 '다른 사람들'이 대신 가길 원한다면, 아무도 우리 나라를 적으로부터 보호할 수가 없게 된다고 답했다.

제 아들과는 전방에서도 계속 소통을 이어갔다. 저는 그때그때 상황을 솔직하게 설명했고, 제 아들은 영상통화를 하며 키스를 보내기도 했다. (미소를 지으며) 저는 아들이 보낸 키스들을 모아둔 작은 박스를 간직했는데 신기하게도 폭격당시에도 이 박스는 무사했다."

- 최근 프로젝트 <프론트 라인>(Frontline)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달라.                        
"아주 초기 개발단계에 있다. 사실 이번에는 영화를 만들려는 의도가 없었다. 제가 군인으로 겪는 경험과 동료들의 얼굴, 당시 분위기 등을 기억하고자 촬영한 개인적인 기록이었다. 제 부대가 폭격맞고 해산된 후 귀가당시, 최전선(front line)에서 싸우는 영화인들에 대한 다큐를 준비중인 동료, 마리나 스테판스카가 일부 영상을 달라고 저를 찾아왔다.

우리는 같이 집에서 비디오를 보는 동안 이 영상이 아주 독특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영상은 당시 분위기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제가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다. 감독이었다면 결코 곤충이나 나무를 촬영하지 않았을텐데(웃음), 같은 참호에 24시간이나 가만히 앉아 있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촬영했다. 결국 느린 템포의 이란 영화같은 느낌이 묻어난다.

최전선에 있는 군인들의 일상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제가 아들과 나눴던 녹음된 대화도 포함하려고 한다. 제가 혹시라도 사망하는 경우를 대비해 뭔가 아들에게 남겨두고 싶었고, 어린이와 전쟁에 대해 어떻게 정직하게 소통하는지에 대해서도 성찰하고 싶었다."

- 전쟁에서 촬영할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이 무엇이었나.

"흠... 저는 사실 체중이 49kg에 불과하다. 그런데 제 카메라만 3kg이다. 그 밖에 방탄조끼, 수류탄, 물, 기타 군사장비들을 다 들고 다니는 것이 어려웠다. 어떨때는 물을 포기하기도 했다."   

"최전선보다 힘들었던 포로생활, 왜냐면"

- 2014년 마이단항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본인에게 마이단은 어떤 의미인가.

"마이단항쟁은 부패한 전 우크라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에 의해 촉발됐다. 즉 2013년 그는 원래 의회의 승인후 체결하기로 한 '유럽연합-우크라이나 협력협정'을 포기하고, 대신 갑작스레 러시아와의 협력을 늘리는 '유라시아경제연합'을 체결하겠다고 발표했다. 푸틴의 압박 때문인 것 같다. 우리는 너무 화가 나서 항의하고자 길거리로 나섰다. 시민들은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에 가입하고 민주주의 시스템을 가지길 원했고, 러시아나 벨라루스같은 독재체제로 회귀하길 원하지 않았다. 

유명한 언론인 무스타파 나이엠(Mustafa Nayyem)이 페이스북에 올린 집회 참여 촉구 포스팅으로부터 모든 일은 시작된다. 그는 아프간 난민 출신인데 우크라이나에서 성장했다. 애초엔 아주 평화로운 집회였고 우리는 심지어 노래를 부르고 살사댄스까지 추기도 했다. 대체로 젊은 학생들이 주를 이뤘다.

그런데 경찰이 학생들을 구타하자, 국가폭력에 크게 분노한 민심으로 인해 사태가 커졌다. 나중에는 각계각층의 국민들이 함께 했는데 심지어 80대의 할머니도 같이 바리케이트를 치기도 했다. 우리는 희생자를 '스카이 100(Sky 100)'이라고 부르는데 총 100여 명 이상의 민간인이 희생됐다. 한마디로 이는 약 4개월간 지속된 민주화운동이다. 하지만 직후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침공하고 병합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 음모론자들과 심지어 일부 친러 서방 언론인들은 민족주의자들의 영향력을 아주 강조하곤 한다.  

"한마디로 흰소리다. 이들이 득표한 선거결과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사실 그마저도 야누코비치의 당시 친러 정책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다.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처럼 우크라의 국수주의자들 내부에도 다양한 성향과 결이 존재한다. 이들은 나찌처럼 우리가 더 우월한 종족이라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이들의 목표는 오랜 외세의 압박에서 벗어나고 우크라이나의 언어와 문화를 간직할 수 있고, 우리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하길 바라는 것, 이것이 이들의 주된 목표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대다수는 역사적 사실을 모르거나 그 맥락을 놓치고 있다. 스탈린치하였던 1920, 1930년대 '처형당한 르네상스(Executed Renaissance)' 사태에서 3만명에 달하는 우크라이나의 연극 연출, 시인 등 예술가들은 시베리아에 보내져 처형당했다. 1960년대 브레즈네프부터 고르바쵸프의 개혁전까지 반정부 성향의 재능있는 우크라이나 예술가들 또한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예술창작에서 배제당하고 감옥이나 정신병원에 감금됐다. 이들은 정권의 위협으로 간주되곤했다. 물론 이전 소비에트시절인 1932~1933년 악명높은 홀로도모(Holodomor, 기획된 대기근)로 우크라이나인 400만 명에서 500만 명을 아사시켰다."

- 우크라이나의 남동부에 위치한 자포리자 출신이다. 우크라이나 동부에는 항상 분리독립운동이 존재해왔나. 이들이 자결권이 있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런 주장은 2014년 러시아 침공과 함께 시작됐고, 저는 이전에 들어본 적도 없다. 제 판단에는 러시아 프로파간다를 끊임없이 방영하는 TV와 야누코비치의 정치적 수사의 합작의 결과라고 본다. 야누코비치는 우크라 서부와 동부의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분열정치를 했고 여론을 조작하곤 했다.   

도네츠크와 루한스크에서의 주민투표는 완전히 허위다. 독일 매체 빌트지의 기자 파울 론츠하이머(Paul Ronzheimer)의 보도에 의하면, 어느 도네츠크 투표소에서는 한 남자가 10번이나 투표했다고 한다. 이미 수많은 주민들이 이 지역을 떠나기도 했고, 심지어 친우크라 집회 참가자들은 분리주의자들에게 맞거나 살해당하기도 했기 때문에 다수가 투표장에 가지도 않았다. 신뢰할만한 국제모니터링기구도 부재하는 등 상황은 혼돈 자체였다. 아울러 러시아의 총들이 현지인들에게 배포된 것으로 안다."

- 이전 인터뷰에서 포로로 잡혔을 때가 최전선에 있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고 했다. 그 이유는?

"주민투표 후 4일 뒤에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분리주의자들의 검문소를 지날 때 택시운전사가 제가 우크라 군인들과 함께 있었다고 말하면서 체포됐다. 제가 고통스러웠던 이유는 제 의지에 반해서 소중한 이들을 배신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즉 고문이나 협박에 제가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고, 제가 극비사항을 누설해서 저와 함께 했던 군인들, 가족과 친지들, 특히 도네츠크에 있던 제 종군기자 남자친구에게 해를 끼칠까봐 너무 괴로웠다.

심문소에 도착했을때 수많은 여권과 휴대전화를 책상에서 보고, 지하실에 이미 많은 이들이 수감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가 오랫동안 묵비권을 행사하자 이들은 제 다리를 걷어차기도 하고, 귀를 자르겠다고 협박하기도 하고 애인을 잡아오겠다는 말도 했다. 소중한 이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이 고통스러웠다."

"푸틴, 민주적인 우크라를 보기 싫었던 것"
 
영화제 본부 근처 커피숍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알리사 코발렌코 감독. 힘든 이야기인데도 의외로 무척 쾌활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 이흘라바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찾은 코발렌코 감독 영화제 본부 근처 커피숍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는 알리사 코발렌코 감독. 힘든 이야기인데도 의외로 무척 쾌활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 클레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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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고 생각하나. 

"아주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푸틴은 민주적이고 독립적이고 유럽에 속하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옆에 있는 꼴을 못 보는 것이다. 푸틴은 마치 폭력적인 아버지가 반항하는 아들을 복종할 때까지 때리는 것처럼, 우크라이나를 길들이기 위해 우리 나라를 파괴할 준비가 돼 있다. 저는 푸틴의 논리를 이해할 수 없지만 그의 의도를 이렇게 인식하고 있다."  

- 이 상황에서 본인에게 "해피 엔딩"이란 어떤 의미인지. 

"물론 저는 전쟁이 최대한 빨리 끝나고, 우리 나라를 재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잃어버린 생명을 결코 다시 회복할 수 없다. 저는 파괴된 건물은 신경쓰지 않는다. 제가 있던 군사기지가 파괴됐을 때 저는 건축물에 대해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저는 소중한 제 친구들을 잃었다. 아름다운 영혼들을 이렇게 잃는다는 것이 너무 슬프다. 이런 의미에서 제게 행복한 결말이란 결코 존재할 수가 없다. 앞으로 최전방 전투상황의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말이다. 물론 모든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완전히 떠나고, 러시아에서 푸틴체제가 붕괴된다면 안정감을 느낄 수는 있을 것 같다."

태그:#알리사코발렌코 , #이흘라바, #우크라이나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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