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수유동과 방학동 산책길.
▲ 4.19민주묘지에서 연산군묘, 정의공주묘 산책 코스.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수유동과 방학동 산책길.
ⓒ 이상헌

관련사진보기


강북구와 도봉구가 만나는 지역, 북한산과 도봉산이 마주하는 곳에 수유동과 방학동이 있다. 화계사와 4.19민주묘지가 수유동을 대표하고 방학동에는 수령 800여 년의 은행나무가 노랑 잎으로 물들어가며 연산군묘를 지켜보고 서 있다. 이번 산책코스는 4.19민주묘지를 찾아 분향하고 쌍문공원을 둘러본 뒤에 연산군묘를 거쳐 간송옛집을 탐방하는 루트다.

4.19민주묘지는 11월 까지 붉은 단풍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쌍문공원에는 군부대가 이전한 자리에 꽃동네책쉼터가 들어서 있으며, 연산군묘 앞 원당샘공원의 약수터는 물맛이 좋아 동네 주민들에게 인기가 많다.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네 군데이므로 아래 지도를 보고 취사선택하면 되겠다.

우이신설선 4.19민주묘지역 2번 출구로 나와 10분 정도면 4·19민주묘지에 다다른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울긋불긋 물들어가는 단풍이 그날의 항거를 말해주는 듯 하다. 비단잉어가 한가로이 노니는 연못을 둘러싸고 붉은 물결이 완연한 가을을 알리고 있다.

자유당 독재를 무너뜨린 시민혁명
 
그날의 항거를 말해주는 듯 핏빛처럼 타오른다.
▲ 4.19민주묘지의 붉은 단풍. 그날의 항거를 말해주는 듯 핏빛처럼 타오른다.
ⓒ 이상헌

관련사진보기


1953년 한국 전쟁의 총성이 사라졌지만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독재는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 이승만은 영구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을 단행하여 국민과 언론, 야당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점점 높여갔다. 1960년에는 독재 정권을 유지하고자 3.15 부정선거를 획책하여 정·부통령에 이승만과 이기붕을 세우려고 했다.

불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촉발되는 와중에 최류탄이 얼굴에 꽂힌 채 숨진 고교생 김주열군의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다. 시위에 참가한 진영숙양도 경찰이 쏜 총탄을 맞고 숨졌다. 유서를 써 놓고 데모에 참가한 그이는 한성여중 2학년의 어린 나이였는데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구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마는,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국사편찬위원회)
 
늦가을까지도 단풍이 물들어간다.
▲ 4.19민주묘지의 단풍. 늦가을까지도 단풍이 물들어간다.
ⓒ 이상헌

관련사진보기


국민적 분노가 극에 달하면서 전국의 학생들과 시민이 궐기하였으니 역사에 기록된 4·19혁명이다. 당시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발포로 186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었고 부상자는 6026명이나 되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쫓겨나 하와이로 도피하여 요양원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이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다. 

이승만의 종진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한 이기붕은 혁명 이후 전 가족이 자살한다. 12년간 이어진 자유당의 독재 체제가 무너졌지만, 1년 하고도 한 달 뒤에 5.16 군사 정변으로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17년간 엄습한다.

폭정을 일삼다 쫓겨난 혼군
 
▲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혁명의 단풍길 #36
ⓒ 이상헌

관련영상보기


4.19민주묘지를 나와 쌍문공원으로 가보자. 효문고교 사잇길로 들어서 잠시 걸으면 최근에 시민에게 개방된 꽃동네책쉼터가 나온다. 수유실을 비롯하여 카페 형식으로 꾸며져 있으며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여기서 쌍문역 방향으로 가면 함석헌기념관을 둘러볼 수도 있다.

북쪽으로 진행하여 나즈막한 둘레길 자락을 돌아내려오면 연산군묘에 다다른다. 9대 임금인 성종의 맏아들이자 10대 왕이었던 연산군은 폭정으로 군주의 자리에서 쫓겨난 인물이다. 연산군의 어머니는 성종의 첫번째 후궁으로 왕비에 오른 윤기견의 딸인 윤씨다.

중전의 자리에 오른 윤씨였지만 성종의 마음은 다른 후궁에게 가 있어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질투에 눈이 먼 그녀는 후궁들을 제거하려고 엽기적인 일을 벌이다가 발각되어 성종의 분노를 산다.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임금의 얼굴에 손톱자국까지 내게 되므로 시어머니였던 인수대비가 노발대발하여 그녀를 폐서인 하라고 청한다. 중전에게서 마음이 떠난 성종이 이를 수용하고 윤씨는 궁궐에서 쫓겨난 뒤 사약을 받고 죽는다. 성종은 이에 관한 일체의 언급을 하지 말도록 조치를 하였고 훗날 왕위에 오른 연산군이 사건에 대한 전말을 알게 된다. 
 
글로 쓸 수 없을 정도로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질렀다.
▲ 연산군묘. 글로 쓸 수 없을 정도로 극악무도한 만행을 저질렀다.
ⓒ 이상헌

관련사진보기

 
양효공 안맹담과 세종대왕의 둘째 딸 정의공주의 묘역.
▲ 양효안공의 묘, 정의공주의 묘 양효공 안맹담과 세종대왕의 둘째 딸 정의공주의 묘역.
ⓒ 이상헌

관련사진보기


당시 왕권은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 의해서 균형있는 견제를 받고 있었으나 연산군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폐비 윤씨 사사를 빌미로 재위 기간에 두 번의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를 통해 사림파와 훈구파를 대거 숙청한다.

절대 왕권을 얻은 연산군은 이후 광증이 의심될 정도로 흉악무도한 일을 저지른다. 채홍사를 전국에 파견하여 미녀를 궁궐로 들이고 각 고을에서 기생을 관리하게 만들었다.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이 능한 기생은 흥청(興淸)이라고 불렀는데 오늘날 관용구가 된 '흥청망청'이 여기에서 기원한다.

이때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던 흥청이 장녹수이며 주색잡기에 몰두한 연산군은 글로 다루지 못할 만큼 극악무도한 짓을 일삼다가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초라한 죽음을 맞는다.
 
수령 800여 년의 방학동 은행나무가 노란 잎을 떨구고 있다.
▲ 연산군묘 앞의 은행나무. 수령 800여 년의 방학동 은행나무가 노란 잎을 떨구고 있다.
ⓒ 이상헌

관련사진보기

  연산군묘 바로 뒷편에 정의공주와 양효공의 묘역이 있다. 출입문이 잠겨져 있어 보통 사람은 들어갈 수 없으나 능을 살펴보는데는 지장이 없다. 정의공주는 세종대왕의 둘째 딸로서 훈민정음 창제에 일조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조금 더 진행하면 우리나라 문화재를 일제로부터 지켜낸 전형필 가옥(간송옛집)이 있다. 그가 일제강점기 때 '훈민정음 해례본'을 얻기 위해 당시 집 10채 값을 치렀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문화재를 지켜 낸 간송 전형필의 집.
▲ 간송옛집.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문화재를 지켜 낸 간송 전형필의 집.
ⓒ 이상헌

관련사진보기


태그:#4.19민주묘지, #김주열, #진영숙, #이승만, #연산군
댓글8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