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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여자>
 책 <한 여자>
ⓒ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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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며 읽을 책을 정하는 책모임에서 지정 차례가 된 회원이 아니 에르노를 제안했다.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감화받은 터일 텐데, 이미 오래 전 그의 팬이 된 나는 쾌재를 불렀다. 뭘 읽을까 논의하다 <한 여자>와 <남자의 자리>로 정했다.

사실 나는 몇 해 전 <한 여자>를 읽었다. 냉소하지도 터무니없이 관대하지도 않으면서 글쓰기 대상을 향해 가지는 일정한 거리감이 인상적이어서 마음에 새겼던 책이다. '나 자신의 인류학자'가 되어 쓰는 그의 글쓰기 태도에 매료되었는데, 닮고 싶은 재능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폭력, 애정 과잉, 꾸지람을 성격의 개인적 특색으로 보지 않고 어머니의 개인사, 사회적 신분과 연결해 보려고 한다. 그러한 글쓰기 방식은 내 보기에 진실을 향해 다가서는 것이며, 보다 일반적인 의미의 발견을 통해 개인적 기억의 고독과 어둠으로부터 빠져나오도록 돕는 것이다. 하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뻗대고 있고, 어머니에 대해 순수하게 감정적인 이미지들을, 온기 혹은 눈물을, 의미부여 없이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 함을 느낀다."
 
<한 여자>를 두 번 읽은 경험은 인간의 사고가 얼마나 가변적인지를 실감하게 했다. 엄마의 죽음을 기점으로 그 이전에 책을 읽은 나와 이후에 책을 읽은 나는 달라져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나는 분명 "어머니의 폭력, 애정 과잉, 꾸지람"에 더 민감했지만, 엄마 영면 후의 나는 엄마를 "의미부여 없이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 했다.

결국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엄마를 지독하게 그리고 세밀하게 생각하게 된 나는, "나이 들어 노망난 여자와 젊어서 힘차고 빛이 났던 여자를 글쓰기를 통해 합쳐 놓지 않고서는 내가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 나의 내밀한 여자

에르노의 <한 여자>는 그의 엄마다. 엄마란 어떤 존재인가. 성애적 대상이 생기기 전까지 가장 내밀한 관계의 사람일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까다롭고 불편한 존재다. 지인들과 나누는 스쳐가는 대화 속에 엄마에게 표출하는 양가감정이 불쑥 틈입할 때, 나는 안도했다. 이런 복잡한 감정에 놓이는 것이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안심시켰다.

에르노의 엄마는 프랑스 사람으로 이차대전을 겪은 세대다. 전쟁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을 해친다. 눈앞에서 사람이 크게 다치거나 죽는 것을 목격하고, 살아남기 위해 친밀한 사람을 고발하거나 남의 것을 탐하고 훔치는 것에 큰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 시간들을 겪는다. 개인의 힘으로 무엇도 통제할 수 없는 재앙은 사람들에게 깊은 내상과 결핍을 남긴다. 이렇게 파괴된 인간성을 회복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혹독한 시대의 운명 속 엄마는 그의 상실과 결핍과 야망과 욕구를 스스로 풀어내고 성취할 방도를 배우지 못했다. 이런 것이 권리로 허락되지 않은 세대였다. 오늘 당장 먹고사는 것이 급선무고, 게다가 자식이 있다면 자식을 먹이고 입히는 일이 전쟁보다 무서운 엄혹한 시대를 살았다. 내 엄마도 그랬다.

내 엄마는 한국전쟁의 격전지인 고향을 몸만 겨우 빠져나왔다. 낮엔 남한군이 밤엔 북한군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두 얼굴을 하고 살아야 했다. '쌕쌕이'가 매일 쏟아내는 포탄의 공포는 감각을 마비시켰고 오직 생존만이 살아가는 이유가 됐다. 억울한 결혼 정도는 '피난민'에게 아무 일도 아니었다. 자식들만 잘 키우면 전쟁으로 빼앗긴 시간들을 보상받을 줄 알았다. 에르노의 엄마처럼 "그녀의 가장 깊은 욕망은 자신이 누리지 못했던 것 전부를 내게 주는 것이었다."

전쟁으로 그을린 심장과 궁핍한 살림살이는 엄마를 괴팍하고 사납게 만들었다. 거침없는 욕설과 손찌검은 사춘기에 돌입하는 자식들을 진저리치게 한다. 에르노는 사춘기를 거치며 엄마 너머의 세상을 열망하게 된다. 마침내 교사가 되어 엄마가 꾸려가는 궁색한 점포와 촌스러운 동네를 벗어났다. "그녀의 시선으로부터 멀어지자, 나는 금지 당했던 것들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봤고, 그러고 나서야 자유롭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가 언제나 열망했지만 결코 닿을 수 없던 지식과 문화의 세례를 받으며 에르노는 그 마을에서 처음으로 인텔리가 되었다. 이는 곧바로 엄마의 자부심으로 연결된다. 엄마는 살았던 곳을 부끄러이 여기는 딸의 자기부정을 출세로 승인했다. 엄마와 딸의 위치가 전복되기 시작했다. 딸을 성장시킨 엄마의 권위가 낡고 조악한 유물이 되자, "어머니는 자기 자체로는 사랑받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며, 자신이 주려는 것으로 사랑받기를 바랐다."

엄마, 내가 모르는 여자 

청하지도 않은 김치를 잔뜩 해놓고 가져가지 않는다고 지청구를 하던 내 엄마도 귀한 먹거리를 나누어줄 때는 어깨가 펴지곤 했다. 사정이 있어 빨리 가져가지 못하는 날엔 해주는 것도 못 먹느냐며 타박했다. 당신 존재에 효능감을 느꼈던 유일한 시간들이었을까. 노쇠로 김치에서 손을 뗀 지 오래된 어느 날, 무언가로 상했던 마음을 "이제 아무 것도 해줄 게 없으니 쓸모없는 늙은이 취급을 한다"는 억장 무너지는 소리로 딸을 기함시켰다.

남편이 갑자기 떠나고 딸과 합가해 살며 자신의 쓸모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에르노의 어머니. 그러나 그의 부지런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열쇠 둔 곳을 찾지 못하고, 매일 다니던 길을 정처 없이 헤매고, 마침내 밥 먹는 방법마저 망각한 어머니.

치매가 심각해진 후 "그녀는 어린 계집아이였고, 결코 자라지 않을 터였다." 언어가 그 사람의 품위를 말해준다고 믿어 남 앞에서 남편을 언제나 배우자라 칭했던 엄마, 책을 만질 때는 반드시 손을 씻던 엄마, 아름다운 것, 화려한 것, 세련된 것에 매혹되던 엄마는 다 사라지고 없었다.

치매가 심각해지고 엄마를 요양원에 거처하게 하면서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고는 해도, 어머니를 그곳에 나뒀다는 죄책감"으로 에르노는 상심했다. 이제는 여든이 넘어 엄마가 돌아가신 나이를 훌쩍 넘은 그는 아직도 미안한 마음을 털지 못한 채 어머니를 그릴까.

그는, 귀싸대기를 올려 부치고 욕을 하던 엄마, 틈만 나면 딸을 박물관으로 미술관으로 도서관으로 이끌던 엄마, 손님 앞에선 연기를 하던 장사 하던 엄마를 동시에 떠올릴 것이다. 그 각기 다른 사람이 모두 한 사람이며, 그 안에 자신이 미처 알아내지 못한 '한 여자'가 깃들어 있다는 진실에 사무쳐할 것이다.

내게 엄마도 복잡한 사람이었다. 화가 뻗치면 빨래방망이건 연탄집게건 닥치는 대로 집어 들고 을러대던 엄마, 그러면서도 아들에겐 절절매던 엄마, 보고 싶다고 애원하던 만화영화를 형제들 몰래 극장에 데리고 간 엄마, 전화해 울며 돈 부탁을 하던 엄마, 말년엔 인지능력이 저하돼 딸이 찾아가도 남 보듯 시큰둥하던 엄마, 이 모든 사람, 애정과 증오와 존경과 경멸의 복잡한 감정을 공존시킨 사람이 바로 나의 엄마다.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다, 흰 한복에 흰 면사포를 어색하게 두른 앳되고 고운 여인을 발견했다. 눈을 내리뜬 채 수줍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이 젊은 여인이 엄마였다. 믿기지 않았다. 이토록 어여쁜 젊은 여인이 벅찬 세상을 살다 속절없이 엄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었던 것이다. 내가 모르는 '한 여자'가 거기 있었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 게시


한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은이), 정혜용 (옮긴이), 열린책들(2012)


태그:#<한 여자>, #아니 에르노 , #엄마 , #인류학적 존재, #모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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