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12 17:10최종 업데이트 22.11.12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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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이브, 다이애나(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지도 한 장에 의지해 홀로 차를 몰고 샌드링엄 별장으로 향한다. 왕실에는 매년 이 별장에서 2박 3일을 지내며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는 전통이 있다. 운전 도중 길을 잃어버린 다이애나는 식당 앞에 차를 세우고 유유히 식당 안으로 들어간다. 사람들은 놀란 얼굴로 일제히 다이애나를 쳐다본다. 영국 국민 모두가 아는 바로 그 다이애나이기 때문이다. 선글라스를 벗은 다이애나는 식당 주인에게 묻는다. 
 
길을 찾고 있는데요. 여기가 어디쯤인지 전혀 모르겠네요. 여기가 어디죠?

산타도 하루 먼저 찾아온다는 비범한 왕실에서 다이애나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완벽하고 기품 있는 영국 왕실 사람들 사이에서 왕세자비 다이애나는 초조하고 불안한 얼굴을 숨기지 못한다. 아니 애써 숨기지 않는다. 

"진짜 내 모습"과 "그들이 찍는 내 모습"
 

다이애나는 초조하고 불안한 얼굴을 숨기지 않는다. ⓒ (주)영화특별시 SMC

 
영국 전 왕세자비 다이애나의 삶을 픽션으로 재해석한 영화 <스펜서>에서 다이애나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한 위태로운 모습으로 왕실이 정해둔 선을 기어이 넘는다. 사람들이 많은 식당에 들어가 길을 잃었다 말하고, 들판에 서 있는 허수아비가 걸치고 있는 아버지의 낡은 코트를 벗겨내고, 파파라치에게 사진이 찍힐까 바느질해서 막아둔 커튼을 절단기로 뜯어낸다. 

다이애나에게 왕실은 불가해한 세계다. 별장에 들어가기 전, 왕실 사람들은 저울에 올라 몸무게를 잰다. 풍요롭게 크리스마스를 보냈다는 증거로 별장을 떠날 때까지 최소 1.4kg을 찌우는 것이 왕실의 전통이다. 거식증이 있는 다이애나에게는 그저 재미로 하는 이러한 전통이 괴롭기만 하다. 일부러 난방을 하지 않는 별장에는 조식, 석식, 미사 등 매 행사마다 입어야 할 복장의 이름표가 붙어 있다. 다이애나는 여기는 시제가 하나뿐이라며 미래가 없고 과거와 현재는 똑같다고 말한다. 

안에는 왕실 직원들, 밖에는 파파라치. 모든 행동이 감시되고 통제되는 공간에서 다이애나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몸뿐이다. 전통과 규칙 사이에서 패닉에 빠질 때마다 다이애나는 손가락을 목구멍에 집어넣어 속에 있는 것을 변기에 모조리 게워내거나, 한밤중 식당에 몰래 들어가 허겁지겁 음식을 목구멍 속으로 집어넣는다. 자신에게 준 것과 똑같은 진주 목걸이를 다른 여자에게 주고도 당당한 왕세자는 다이애나를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말한다.  
 
당신에겐 두 개의 모습이 있어야 해. 나는 누구든 두 개의 모습이 필요해. 진짜 내 모습과 그들이 찍는 내 모습. 우리에겐 의무가 있어. 나도 처음엔 총 쏘는 걸 싫어했어. 하지만 당신이 싫은 일도 몸이 할 수 있게끔 만들어야 해. 국가를 위해서야. 국민은 우릴 특별하게 보니까. 원래 그런 거야.

다이애나는 "진짜 내 모습"과 "그들이 찍는 내 모습"을 구분하지 않는다. 아니 구분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다이애나에 대한 연민과 답답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저렇게 괴로우면서 왜 도망치지 못하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걸까. 왜 취약함을 드러내며 왕실과 언론에 먹잇감을 주는 걸까. 아들 윌리엄은 다이애나에게 "잠시만 마음을 꺼둬. 식사가 끝날 때까지 아무 생각 하지마"라고 절규한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마음을 꺼둘 수 없는 사람이다. 

못 하겠어요, 도와주세요  
 

다이애나에게 왕실은 불가해한 세계다. ⓒ (주)영화특별시 SMC

 
 
그 사람들의 렌즈는 현미경 같죠. 난 샬레 위에 놓은 곤충이고요. 그 사람들은 내 날개와 다리를 하나씩 뜯어내며 내 반응을 기록하고 있어요. 이걸 건드렸더니 난리가 났네.

다이애나는 스스로를 샬레 위에 놓인 곤충에 비유한다. 사람들 손에 꼼짝없이 잡힌 작은 곤충은 실험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알지 못한다.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구경거리가 될 뿐이다. 다이애나도 마찬가지다. 솔직한 말과 행동을 하면 미친 여자라 손가락질 받고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으면 함부로 억측을 당한다. 이 방에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다이애나는 모른다. 그러니 미친 여자처럼 계속 발버둥 칠 수밖에. 

다이애나를 보면서 사방이 온통 벽으로 막혀 있는 것 같았던 지난 시간이 떠올랐다. 2년 전, 조직 밖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창업을 했다. 밥 먹는 것도 잠자는 것도 거르며 일에 매달렸다. 휴가지에서도 일 생각을 끊어내지 못했다. 일 중독자였던 나는 일에서 쓸모를 찾았고 효능감을 느꼈다. 오직 일할 때만 비로소 살아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살림도 육아도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일 이외의 모든 시간이 아까웠다. 몸과 마음에 점차 이상 신호가 나타나고 더는 이런 식으로 일을 지속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몰랐다. 일을 그만둘 용기도 일을 계속 밀고 나갈 뚝심도 없어 발을 동동 굴렀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 사회인의 본분은 일이라 믿었다. 일을 안 하는 나를 한번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일을 하지 않으면 내 이름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쓸모가 없어진 나를 누구도 인정해 주지도 사랑해 주지도 않을 것 같았다. 지금은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인지 알지만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할 때는 모와 도 사이에 있는 개, 걸, 윷은 떠오르지 않는다. 사고가 양극단으로만 팍팍하게 작동한다. 

언젠가 들었던 강연에서 중년의 여성 사업가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 있다. 한국 여성들이 가장 못하는 말이 첫 번째가 '못 하겠어요', 두 번째가 '도와주세요'라고. 번아웃이 심해져 컴퓨터만 켜도 심장이 떨리는데도 '못 하겠다', '도와달라'는 말이 쉽게 안 나왔다. 스스로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 같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인 남편에게조차 도움을 요청하는 게 자존심이 상했다. 민폐 끼치는 사람, 징징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도 못했다. 그즈음 나는 짜증, 신경질, 억울함으로 점철된 사람 같았다. 

이 악물고 버티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내 취약함을 드러내기로 했다. 정신과와 심리상담센터를 찾았던 경험을 공개적으로 글로 썼고 동료와 가족에게 구조 요청을 했다. 용기라기보다는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완벽함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 힘든 것을 힘들다고 말했을 때, 손을 내밀어 주고 응원해 주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때 나와 비슷한 시간을 보냈던 혹은 지금도 통과하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겉으로 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사람들의 내면도 나처럼 엉망진창이었다니. 하긴 누군가에게는 나의 삶도 마냥 평온해 보였을지 모른다. 다들 너무 애쓰며 살고 있었다. 모두가 병들어 있는데 SNS에서는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사랑, 충격, 웃음 
 

매기는 왕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다이애나의 아름다움을 바라본다. ⓒ (주)영화특별시 SMC

 
다이애나는 아프면 아프다고, 도움이 필요하다고 소리칠 수 있는 사람이다. 누군가에게는 미숙하고 나약해 보일지 모르지만 영화를 보면서 왜 영국 국민들이 그토록 다이애나를 사랑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영화에는 다이애나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고 도움을 주는 왕실 직원들이 나온다. 매기(샐리 호킨스)도 그중 한 명이다. 매기는 다이애나가 유일하게 왕실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모두가 다이애나를 미쳤다고 생각할 때 "전하는 아름답잖아요. 그것만은 놓지 마세요"라고 다정하게 말해주는 사람. 매기는 왕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다이애나의 아름다움을 바라본다. 

크리스마스 만찬이 열리기 직전, 또다시 패닉에 빠진 다이애나에게 매기는 힘주어 말한다. 
 
이겨내요. 맞서 싸워요. 품위를 지켜요. 전하의 무기는 전하 자신이에요. 자신을 무너뜨리지 말아요.

다이애나는 왕실이 정해준 새하얀 드레스에 구두 대신 장화를 신은 채 손전등을 들고 자신이 원래 살던 집으로 향한다. 계단과 바닥이 다 썩은 스펜서 가문의 집으로. 그곳에서 다이애나는 과거에 영국 국왕과 결혼했지만 다른 여자에게 밀려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죽임을 당했던 앤 불린을 만난다. 다이애나는 왕세자가 선물한 진주 목걸이를 목에서 뜯어내고 스스로를 가뒀던 벽을 무너뜨리기로 한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박싱데이, 다이애나는 허수아비에게서 벗겨낸 아버지의 낡은 코트를 입고 길을 나선다. 다이애나에게 용기를 주며 매기는 이렇게 말한다. 
 
치료는 됐고 전하는 사랑이 필요해요. 사랑, 충격, 웃음. 아주 많이요.

게일 콜드웰의 책 <먼길로 돌아갈까?>에서 게일은 알코올중독자 자조 모임에서 알코올중독 치료 강사인 리치를 만난다. 스스로 구제 불능이라 자포자기했던 게일이 리치의 사무실에 찾아가 알코올중독 치료 예약을 잡던 날에 대해 게일은 이렇게 서술한다. 
 
하지만 내가 술을 마셔 알코올중독을 자초했다는 수치심과 두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에게 그날 리치가 말해준 한 가지만은 언제나 기억하고 있다. 뭐가 그리 무섭냐고 물어보는 그에게 나는 흐느끼며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말했다. "아무도 다시는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봐 겁나요." 리치는 양손을 마주잡고 만면에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모르고 있었어요?" 그가 상냥하게 말했다. "우리는 그런 결함을 사랑하는 거예요." 

이전에는 알코올중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끔찍하다고 생각했다는 게일은 "하지만 더는 그렇지 않다"고, "이제는 그저 인간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하기로 결심"했다고. 

영화 <스펜서>를 보며, 책 <먼길로 돌아갈까?>를 읽으며 어쩌면 우리가 정말로 사랑하는 것은 성취가 아닌 결함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게 언제 마음이 쓰이는지 떠올려 보면 그 사람의 약함이 나의 약함과 닮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그때 나도 내게 힘을 줬던 사람들처럼 있는 힘껏 손을 뻗으며 말하고 싶었다. 당신만 엉망진창이 아니라고. 나도 그렇다고. 그러니 약한 우리는 손을 맞잡아야 한다고. 

일을 쉰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일 중독자가 일을 그만두면 지구가 멸망할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지구에도 내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통장 잔고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내게는 그만큼 빈 시간이 늘었다. 빈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될 때면 매기의 말을 떠올린다. "사랑, 충격, 웃음. 아주 많이."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개인 브런치 https://brunch.co.kr/@hongmilmil 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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