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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 시기 군인과 경찰에 의한 집단 민간인 희생지인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는 제2학살지에 대한 막바지 유해 발굴이 한창이다. 2 학살지는 알려진 8곳의 학살지 중 가장 긴 구덩이로 알려져있다. 2 학살지에서 발굴된 희생자 유해와 유품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장면1. '200m 가장 긴 구덩이' 사실이었다
 
대전 동구청(청장 박희조)과 한국선사문화연구원(원장 우종윤)은 골령골 2 학살지에서 약 100m에 달하는 유해 매장지를 확인했다.
 대전 동구청(청장 박희조)과 한국선사문화연구원(원장 우종윤)은 골령골 2 학살지에서 약 100m에 달하는 유해 매장지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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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령골(대전 동구 낭월동)에서 유해를 발굴하는 대전 동구청(청장 박희조)과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원장 우종윤, 아래 발굴단)은 골령골 2 학살지에서 약 100m에 달하는 유해 매장지를 확인했다.

골령골 내 8곳의 집단 학살지 중 2 학살지가 가장 긴 구덩이라는 증언은 초기부터 인근 마을 주민들에 의해 나왔다. 증언은 구체적이었는데 최소 폭이 2~3m, 깊이 2m라고 전했다.

지난 2002년에는 골령골 학살지 유해 매장지에 대한 구체적 기록이 더해졌다. 1950년 당시 골령골을 방문한 위닝턴 기자의 기사가 발굴된 것이다. 위닝턴 기자는 영국 일간신문 <데일리 워커>의 편집자이자 특파원으로 활동했으며, 한국전쟁이 발발 후 한국으로 들어왔고 대전 산내 학살 기사를 타전했다. 당시 기사는 암매장 구덩이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인근 지역 농부들이 강제로 끌려와 구덩이를 팠는데 그들로부터 나는 진실을 알 수 있었다... 6개의 구덩이는 모두 6피트(1.8m)의 깊이다. 세로는 6피트(1.8m)에서 12피트(3.6m)에 이르렀다. 구덩이의 길이는 가장 긴 것이 200야드(182m)였고 두 개가 100야드(약 82m), 가장 짧은 것이 30야드(약 27m)였다"

맨눈으로 확인한 구덩이만 6개였고 그중 가장 긴 것이 약 180m에 달했다는 위닝턴 기자의 기록이다. 이는 인근 주민 증언과도 일치한다. 2 학살지 위치 또한 주민과 위닝턴 기자의 기록이 동일하다. 지난 2020년에는 2 학살지 모습을 찍은 위닝턴 기자의 사진이 추가 발굴되기도 했다.

유해발굴단은 올 상반기까지만 1 학살지에서 약 1500구 가까운 유해를 발굴했다. 하지만 2 학살지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대전산내희생자유족회와 유해발굴단은 지난 2017년부터 약 200m에 가까운 2 학살지를 찾아 나섰지만 확인하지 못했다.

특히 올 상반기부터는 토지 보상이 마무리돼 본격적인 발굴에 나섰는데도 2 학살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결국 발굴단은 지난 10월 중순께 2 학살지가 도로 확장공사 도중 모두 훼손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그러다 지난달 말 매장지 형태가 윤곽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길이 약 20m(폭 3~3.4m)였는데 발굴단은 드러난 구덩이를 따라 조심스럽게 확장해 들어갔다. 구덩이 길이는 70m로 늘었고, 다시 100m로 늘어났다. 나머지는 100m는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뻗어 있어 모두 훼손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이는 골령골에서 가장 긴 200m 길이 구덩이의 존재가 사실이었음을 보여준다.

장면2. 유해 구덩이 깊이 불과 5cm~20cm... 심하게 훼손
사라진 유해 행방 찾기 숙제로

 
2학살지에서 드러난 유해. 골령골 내에 8곳의 집단학살지가 있고 그중 2 학살지가 가장 긴 구덩이라는 증언은 처음부터 인근 마을주민들에 의해 나왔다. 주민들의 증언은 구체적이었다. 최소 폭이 2~3m, 깊이 2m라고 밝혔다.
 2학살지에서 드러난 유해. 골령골 내에 8곳의 집단학살지가 있고 그중 2 학살지가 가장 긴 구덩이라는 증언은 처음부터 인근 마을주민들에 의해 나왔다. 주민들의 증언은 구체적이었다. 최소 폭이 2~3m, 깊이 2m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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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럽게 드러난 유해 매장지는 심하게 훼손돼 있었다. 약 2m 깊이로 추정되는 구덩이는 불과 5cm~20cm만이 남아 있었다. 대부분의 유해가 훼손된 것이다. 남아있는 유해도 대부분 잔해만 남아있거나 그나마도 습기를 머금어 손을 대면 바스러지고 으깨질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다.

유해 발굴을 하고 있는 우종윤 한국선사문화연구원장은 "맨 밑바닥층 일부만 남아 있고 그나마도 손을 대기 어려울 만큼 보존상태가 나쁘다"고 말했다.

사라진 유해는 어디로 간 것일까? 인근 주민의 증언을 종합하면 도로공사와 농사를 짓는 과정에서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 주민들은 1990년대 초 도로 확장·포장 과정에서 뼈가 쏟아져나온 것을 트럭 10여 대 이상이 어디론가로 실어 갔다고 한다. 구덩이 길이와 깊이로 볼 때 2 학살지에서 사라진 유해는 최소 1000~1800구로 추정된다. 1 학살지는 10m당 많게는 100구의 유해가 발견됐다.

전미경 대전산내희생자유족회장은 "트럭에 실려 사라진 유해를 찾는 일이 과제로 떠올랐다"며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유해를 찾는 일에 나서주기를 바란다"말했다.

장면3. 희생자 대부분은 국민보도연맹원
 
2학살지에서 출토된 희생자의 신발(고무신)
 2학살지에서 출토된 희생자의 신발(고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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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상반기까지 골령골에서는 유해 1355구와 유품 3000여 점이 발굴됐다. 이중 1 학살지에서만 1321구의 유해가 나왔다. 그런데 2 학살지의 유해와 유품은 이전과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

1 학살지에서 나온 유품의 경우 단추와 신발이 주로 출토됐다. 단추의 경우 백색 단추와 국방색 단추가 주를 이뤘다. 신발류는 검정 고무신과 흰 고무신이 나왔다. 이 밖에 나무 칫솔과, 고무줄 등이 출토됐다. 이 유품을 기준으로 1 학살지에서는 당시 대전형무소에 있던 정치범 등 수감자들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 2 학살지의 경우 백색단백색 단추 꽃무늬 단추와 붉은색 4혈 단추 등 1 학살지에 비해 여러 색상과 모양의 단추가 나오고있다. 신발류도 고무신 외에 구두 등이 보이고 손목시계와 플라스틱 칫솔, 장신구, 허리띠 등도 출토됐다. 유해발굴단 관계자는 "유품으로 볼 때 2 학살지 희생자는 형무소 수감자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보도연맹원 등이 끌려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2 학살지의 경우 백색 단추, 꽃무늬 단추, 붉은색 4혈 등 1 학살지에 비해 여러 색상과 모양의 단추가 나오고 있다. 신발류도 고무신 외에 구두 등이 보인다. 특히 손목시계와 플라스틱 칫솔, 장신구, 허리띠 등도 출토됐다.
 2 학살지의 경우 백색 단추, 꽃무늬 단추, 붉은색 4혈 등 1 학살지에 비해 여러 색상과 모양의 단추가 나오고 있다. 신발류도 고무신 외에 구두 등이 보인다. 특히 손목시계와 플라스틱 칫솔, 장신구, 허리띠 등도 출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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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학살에 참여한 변홍명 충남도경찰국 사찰 주임은 지난 1991년 <월간 말> 인터뷰에서 "대전형무소 재소자 학살이 끝난 뒤 3일 동안 보도연맹원들과 좌익불순불자라는 죄목(?)으로 연행해온 5백여 명을 같은 방법으로 계속 학살했다"고 밝힌 바 있다. 대전형무소 재소자 학살이 끝난 뒤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이 이어졌다는 얘기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이승만 정권이 대국민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만든 대한민국 반공 단체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이 인민군에게 가담할 우려가 있다며 불법 학살했다.

장면4. 여성 희생자, 10대, 유아 희생자도
 
2 학살지에서는 여성 희생자로 보이는 유해와 유품이 여러 점 출토됐다. 우선 비녀 2개가 눈에 띈다. 특히 한 비녀에는 머리카락이 함께 붙어 있었다. 또 다른 비녀에는 갈색의 장식 머리가 붙어 있었다.
 2 학살지에서는 여성 희생자로 보이는 유해와 유품이 여러 점 출토됐다. 우선 비녀 2개가 눈에 띈다. 특히 한 비녀에는 머리카락이 함께 붙어 있었다. 또 다른 비녀에는 갈색의 장식 머리가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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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학살지에서는 여성 희생자로 보이는 유해와 유품이 여러 점 출토됐다. 우선 비녀 2개가 눈에 띈다. 특히 한 비녀에는 머리카락이 함께 붙어 있었다. 또 다른 비녀에는 갈색의 장식 머리가 붙어 있었다.
 2 학살지에서는 여성 희생자로 보이는 유해와 유품이 여러 점 출토됐다. 우선 비녀 2개가 눈에 띈다. 특히 한 비녀에는 머리카락이 함께 붙어 있었다. 또 다른 비녀에는 갈색의 장식 머리가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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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인지 2 학살지에서는 여성 희생자로 보이는 유해와 유품이 여러 점 출토됐다. 우선 비녀 2개가 눈에 띈다. 특히 한 비녀에는 머리카락이 함께 붙어있었다. 또 다른 비녀에는 갈색의 장식 머리가 붙어있다. 이 밖에도 꽃무늬 고무신, 가락지, 꽃무늬 단추 등이 여러 점 발굴됐다. 이는 여성 희생자가 다수 포함돼 있음을 말해준다.

10대로 보이는 치아도 다량 발굴됐다. 이를 증명하듯 '大中(대중)'이라고 새긴 금속 단추도 나왔다. 발굴단은 당시 대전중학교 교복 단추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유아의 것으로 보이는 치아도 함께 나왔다.
 
유아의 것으로 보이는 치아(붉은 색 원안)도 함께 나왔다.
 유아의 것으로 보이는 치아(붉은 색 원안)도 함께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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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선사문화원 관계자는 "유아를 비롯해 남녀노소가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며 "유해와 유품이 흩어져 있는 발굴 현장의 모습만으로도 당시 참사가 느껴진다"고 말했다.

앞의 변홍명씨도 <월간 말> 인터뷰에서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대상자 중엔 20세 미만 아이들이 상당수 있었다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위닝턴 기자는 당시 기사에서 "7월 16일 인민군이 미군의 금강전선을 돌파하자 7월 17일 새벽, 남아 있는 정치범들에 대한 학살이 (또다시) 시작됐다. 이날 무수한 여자들을 포함해 적어도 각각 100명씩 37대 트럭분, 3700여명이 죽었다"고 보도했다.

장면 5. 현장 가해자는?
 
2 학살지에서는 M1 소총 탄피, 탄두에 비해 카빈 탄피와 탄두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M1 군인들이 사용했고, 카빈 소총은 경찰이 사용했다.
 2 학살지에서는 M1 소총 탄피, 탄두에 비해 카빈 탄피와 탄두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M1 군인들이 사용했고, 카빈 소총은 경찰이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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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가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총탄류 유품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1 학살지에서는 주로 M1 탄피와 탄두가 많았고 카빈 탄피와 탄두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반면 2 학살지에서는 M1 소총 탄피, 탄두에 비해 카빈 탄피와 탄두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M1 소총은 군인들이 사용했고, 카빈 소총은 경찰이 사용했다. 헌병 중위가 사용했던 45구경 탄피와 탄두는 비슷한 비율로 나오고 있다. 이는 2 학살지에 주로 경찰이 동원됐음을 말해준다.

현장에 경찰을 모은 건 헌병이었다. 앞의 변홍명씨는 <월간말> 인터뷰에서 "현장 집행책임자인 헌병 중위가 헌병이 모자라니까 충남경찰국 사찰 형사를 불렀다... 총살 집행은 한쪽에서는 헌병들이, 다른 한쪽에서는 사찰 형사들이 2개 구덩이씩 나눠서 했다. 헌병 중위가 45구경 권총을 차고 지휘했다"고 말했다. 변홍명씨 증언대로라면 2 학살지 쪽에서는 헌병 중위의 지휘로 주로 경찰이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단은 오는 20일쯤 유해 발굴이 마무리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해당 구간에서 발굴되는 유해 수와 유품이 무엇인가에도 이목이 쏠린다. 유해와 유품이 학살 진실의 일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대전 골령골에서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6월 말부터 7월 중순까지 국민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 수감 정치범 등 최소 4000명, 최대 7000명이 군경에 의해 희생됐다. 이 때문에 골령골은 한국전쟁 기간 '남한 지역 내 단일지역 최대 희생 지역'이자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 중 200m 길이의 2 학살지는 골령골 내 가장 긴 구덩이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태그:#대전 골령골, #민간인학살, #2학살지,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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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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