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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4월 28일. 서울대생의 전방입소일이었고, 학생들의 전방입소 반대 시위가 예정된 날이었다.

시위를 주도할 서울대생 김세진, 이재호는 부모님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다.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오랜시간 고민하여 얻은 결론입니다."(김세진)
"지금부터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고 봅니다."(이재호)


당일 서울대 85학번 400여 명은 신림사거리 가야쇼핑센터 앞 도로를 점거하고 연좌시위를 벌였다. 김세진과 이재호는 근처 빌딩 옥상으로 올라갔다. 거기서 전방입소 반대 연설을 하고, 유인물을 뿌리며 "반전반핵 양키 고 홈"과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를 외쳤다.  
 
'전두환 정권'의 경찰은 진압에 나섰고, 김세진, 이재호가 있던 건물까지 쳐들어왔다. 둘은 미리 준비한 시너를 몸에 뿌린 뒤 "가까이 오면 분신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경고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진압작전에 나서자 둘은 시너를 뿌린 몸에 불을 붙였다. 분신하면서도 구호를 외쳤고 팔을 강하게 흔들었다. 김세진은 옥상바닥에 쓰러졌고, 이재호는 옥상에서 추락했다. 둘의 온몸은 새까만 숯덩이처럼 변했다. 김세진은 5월 3일, 이재호는 5월 26일 눈을 감았다. 둘의 나이는 23살이었다. 

그날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에서 활동했던 졸업생 이창학(원자력공학과 81학번)씨는 오랜만의 휴가였다. 책들을 읽으려고 집 근처 도서관에 갔다가 후배들로부터 충격적인 얘기를 전해들었다. 대학후배들인 김세진, 이재호가 시위 도중 자기 몸을 불살랐다는 것이었다. 캠퍼스에서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후배들이었지만 슬픔과 아픔, 분노가 밀려왔다. "밀려 넘칠 것 같으면서도 떠나지 않는 슬픔"을 표현하고 싶었다. '메아리'의 후배 윤선애의 목소리를 생각하며 한달여 동안 노래를 만들었다. 전설적인 민중가요 '벗이여 해방이 온다'였다. 

오랫동안 '벗이여 해방이 온다'의 작사, 작곡자 '이성지'로 살았던 이창학(61)씨가 최근 <내 노래가 그대에게>라는 음반과 같은 제목의 노래에세이를 펴냈다. 그가 노래를 붙잡았을까, 노래가 그를 붙잡았을까? 지난 4일 저녁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 후배 손방일씨가 운영하는 서울 여의도 라이브 카페 '가객'에서 그를 만났다. 손씨는 고려대 노래패 '노래얼' 출신으로 '진혼곡'을 만들었던 '손방의'의 친동생이다. 특히 손방의씨는 고려대 포크노래서클 '석화'를 '노래얼'이라는 운동권 노래패로 전환시킨 '주동자'라고 이씨가 귀뜸했다.  

[관련기사]
[인터뷰②] "후배가 저에게 '신내림한 무당'이라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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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 아래 볼륨을 높이면 '벗이여 해방이 온다' 노래가 나옵니다. 
  
"어깨에 힘을 풀고, 그렇게 다시 노래를 받아들였죠"
 
'벗이여 해방이 온다'의 작사, 작곡자 이창학씨는 최근 '내 노래가 그대에게'라는 음반과 노래에세이를 냈다.
 '벗이여 해방이 온다'의 작사, 작곡자 이창학씨는 최근 '내 노래가 그대에게'라는 음반과 노래에세이를 냈다.
ⓒ 건강미디어협동조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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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노래로 돌아왔네요?

"그렇죠. 노래를 놓은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아요. 미국에 있을 때 사회주의 붕괴, 이념의 붕괴를 겪었지만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학교 연구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 우리가 바꾸려고 했던 희망은 있지 않을까, 그 희망은 놓치지 말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귀국해서) 학교에 들어와 동료들을 보니까, 30대 초반이에요. 30대 초반이면 직장에 취직하고, 현장에서 노동운동 하던 애들도 다 나와서 자리잡고 일상인으로 밥벌이가 급하고, 가정을 꾸리고, 그런 일상들과 생계가 급한 거죠. 그래서 누구 앞에 가서 희망을 얘기하면 나 혼자 이상한 사람이 되는 거죠. 그런 경험을 하게 되고, 나도 생계에 매달리면서 그 사람들과 똑같이 돼 버렸어요.

(2005년에 발매한) '80년대의 회상'(Reminiscence Of 80's) 음반에 있는 노래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것이 희망이에요. 그런데 그 희망이 없어진 거예요. 희망이 없으니 더 쓸 노래가 없는 거죠. 노래를 쓰고 싶긴 한데 더 이상 못쓰겠다 생각했어요. 그리고 학원을 하면서 먹고 사느라 10년을 보냈죠. 솔직하게 얘기하면 학원이 좀 잘 됐어요. 많이 잘 되다가 (지금은) 조금 꺾어진 추세에 왔는데 나를 되돌아보게 됐어요. 그냥 돈 벌기 위해 아침, 저녁 정신 없이 돌아다니는데 뭐하러 돈을 벌고 있나, 나는 행복한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행복하고 싶다, 행복하려면 나는 노래를 써야겠다, 그래서 10년 만에 노래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쓸 수 있을까? 그 전에는 계속 1년에 한두 곡은 썼는데, 10년 동안은 아무 것도 안썼거든요. 그래서 못쓸 것 같았죠.

거기에다 더 큰 부담감은 제가 노래를 쓴다고 하면 사람들은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기대한다는 거죠. '내가 그런 노래를 다시 써? 지금은 그런 시대도 아니고, 나는 뭘 써? 나는 이제 그런 노래를 쓸 수 없는데, 노래는 쓰고 싶고, 그럼 어떤 노래를 써야 해?' 그런 고민을 했죠. 그렇게 고민하다가 2012년에 세 곡을 한꺼번에 썼어요. 그렇게 처음 쓴 곡이 '그리움'이에요. 젊었을 때 꿈이 있었을 그 친구들, 내게는 지사처럼 보인 선배들, 항상 따뜻하고 영원히 내 편이 될 것 같았던, 내가 어렵고 힘들 때 의탁할 수 있었을 선후배들, 그 시절 공동체 같은 따뜻함, 그런 것에 대한 그리움이 몰려와 그것을 풀어내보자고 해서 그 노래를 썼죠('연가').

또 나를 오랫동안 버틸 수 있게 해준 가족들에 대한 얘기도 노래로 쓰고. 2012년이면 노무현 대통령이 세상을 뜬 지 3년 정도 지난 때였는데, 그때는 분노만 하고 노 대통령이 안됐다는 정도의 감정이었어요. 그런데 그냥 내가 느꼈던 생각을 담아서 노래를 써보자고 용기를 내서 썼죠('그대가 보고 싶던 어느날').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내가 할 수 있을까 주저했던 것을 다시 시작하게 됐죠. 그리고 나서 1년에 한두 곡 쓰게 됐어요.

그 이전까지는 희망, 거대담론, 엄청난 슬픔, 이런 것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어요. 그런데 10년 이후에는 그런 부담을 떨치지 않으면 내가 노래를 쓸 수 없겠다, 내가 노래를 썼던 형식과 고유의 시그니처들, 감성들은 있지만 이전에 썼던 거대하고 아주 장중하고 아주 절절했던 노래들,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을지 모를 것과 이별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시 노래를 쓸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 이후의 노래는, 어떤 사람의 말처럼 심심하고 재미도 없게 느껴질 수 있죠. 하지만 그때부터는 내가 그냥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 분노하는 것, 허무하다고 느끼는 것, 안타깝다고 느끼는 것들을 노래로 풀어내면 되지 않을까? 어깨에 힘을 풀고, 그렇게 노래를 다시 받아들였죠.

이번에 음반을 내면서 그 이전과 이후 노래들이 다른 게 뭘까? 그 이전에는 희망이었어요. 어렸을 때에는 새로운 세계, 변혁에 대한 희망도 희망인 거고,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세상이 조금이라도 변할 거야, 이것도 희망이었는데, 후반부에는 그것보다는 내가 그냥 느끼는 것을 노래하겠다고 생각했어요. 노래가 주는 위안이 있고, 노래가 주는 고유의 따뜻함이 있잖아요. 내가 노래를 손에서 놓지 못하겠다, 그러면 노래를 하자, 노래와 함께 있으면 되지, 이런 생각으로 썼던 것이 후반부 노래들인 것 같아요."

- 책에서도 그런 질문을 했던데 '왜 노래를 떨치지 못하는가' 궁금하네요. 

"잘 모르겠어요. 누구는 먹고 살 만하니까 고급취미로 하는 거라고 하는데 그건 아니고. 어릴 때 뭣도 모르고 만든 노래들이 사람들 입에서 불려지고 사람들이 그 노래로 공연하면 환호하고 박수치고. 그때는 작사, 작곡자가 누구라고 얘기 못할 때여서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거죠. 그랬을 때 감동, 감격, 기쁨이 있었거든요.

또 한가지는 내가 세상과 얘기하기에 제일 편한 수단이 노래였어요. 슬프거나 화나거나 격한 감정을 느낄 때나 세상과 얘기하고 싶을 때요. 내가 지금은 얘기를 잘하는데 예전에는 참 얘기를 못했어요. 그런데 노래로 하면 내가 표현되는 거예요.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표현되는 거죠. 그렇게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게 좋았어요. 내가 세상에 대해 푸념하거나 원망한 것인데 그 얘기를 누군가 듣고 좋아하고 있다는 게 감동이었고 뿌듯했어요. 일생에 내가 제일 잘한 일 같아요. (웃음) 지금은 아무도 듣고 있지 않지만, 요즘에는 노래로 나를 표현한다는 게 더 커요. 옛날만큼 누가 듣지 않지만, 일기를 쓰듯이 나를 표현하고 나를 남기는 거죠. 내 얘기를 노래로 남긴다, 그게 더 큰 것 같아요."

"기쁜 노래가 별로 없어요... 기쁠 때는 노래를 못쓰겠어요"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작사, 작곡한 이창학씨는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에서 활동했다.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작사, 작곡한 이창학씨는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에서 활동했다.
ⓒ 이창학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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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아픔'과 '슬픔', '분노'인 것 같아요.

"그쵸. 제 노래 중에 기쁜 노래가 별로 없어요. 처음에 길을 잘못 들어서 그런 거예요. 김민기 노래나 '메아리'(서울대 노래동아리) 노래로 처음 노래를 만들고 접했잖아요. 메아리에 들어와서 김민기 노래나 메아리 노래를 듣고 감동을 받았거든요. 대학 1-2학년 때 그렇게 음악적 세례를 받았어요. 어렸을 때 부르던 교회 찬송가도 그런 감동을 주잖아요. 그런데 그런 거 말고 대중가요에서 그런 감동을 받은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 감동들이란 게 아련하고, 슬프고, 비통하고, 허무한 것들이에요. 김민기 노래 중에서도 그런 노래가 마음을 긁어대고 공감돼요.

나라고 살면서 기쁠 때가 없겠어요? 그런데 기쁠 때는 노래를 쓰지 못하겠어요. 그렇게 써버릇하지 못해서요. 살면서 너무 슬프고, 너무 분노할 때, 마음이 어쩌지 못할 때 노래를 쓰는 것들에 익숙해져 있어요. 2012년부터 내가 편하게 힘을 빼고 노래를 쓰긴 했는데 그리고 나서 쓸 노래가 없었어요. 뭘 써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 내가 맨날 격하게 뭘 느낀 것도 아니구요.

그런데 '세월호'가 있었죠. 내가 이런 얘기를 어떻게 노래로 써? 당시에 그런 노래를 감히 쓸 거라고 생각 안했어요. 나는 이런 주제보다는 사는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데… '박예슬'이라고 세월호에서 죽은 여학생이 있었는데 학생이 재능이 많아서 그 학생의 미술작품으로 전시회를 한다고 했어요. 후배가 그 전시회 포스터를 저한테 보내줬어요.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했죠. 포스터 자체에 그 학생의 작품이 깔려 있고, 포스터의 3분의1을 차지한 채 예슬이가 환하게 웃고 있는 장면이에요. 너무 밝게 웃고 있으니까 그걸 보는 순간 눈물이 확 나오는 거예요. 미안하고. 아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개인적으로 미안하고 마음이 아픈 거예요. 환하게 웃고 있으니까 더욱 더요. 그래서 그 감정으로 노래를 쓸 수 있겠다 싶어서 노래를 썼죠('잊지 않을게'). 주로 그런 감정들이 올 때 노래를 쓰는 게 버릇이 됐어요. 거기에 분노도 들어가고."

- 책 속에 자주 등장하는 아픔, 슬픔, 분노, 이런 것들이 결국은 노래를 떨치지 못한 이유였군요.

"그렇죠. 편하고 행복한 세상이 되면 내가 노래를 못쓸 것 같아요. 나는 기쁜 노래는 잘 못쓰니까요. '행복하다 랄랄랄' 이런 노래는 못쓰거든요. 그런 세상이 와서 안쓰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내가 눈물이 많은 편이 아닌데 특정적인 데서 많이 울컥해요. 울컥한 것만 아니고 전신이 울적하고, 울렁울렁거리고, 그런 느낌이 있어요. 그런 느낌들을 가지고 노래를 상상하면 그런 느낌이 잘 표현되는 노래가 흘러가는 거죠. 그렇게 해서 노래를 적어 내고, 그것을 모티브로 삼아 악기를 가지고 발전시키고 후반 작업하는 거예요."

- 책에서도 "아픈 마음으로 슬픔에 빠져 써내려간 노래들"이라고 했더군요.

"그쵸. 탁 보면 마음이 아프고 눈물을 왈칵 쏟고, 그런 경우들이 많아요. '한라산'도 후배들이 처음 노래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 '아 분노스러운 사건,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 그런 생각이 들고, 냉정한 (역사적) 기록을 봤으니까 노래를 못쓰거든요. 노래를 쓰려면 개인적으로 공명이 돼야 하는데. 그러다가 <녹두서평>에 이산하 선배의 시 '한라산'이 나왔다고 해서 잡지를 사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죠. '한라산'이 서사시잖아요. <녹두서평>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어요. 거기에 효수를 하고 고문을 하고, 빨갱이들이라고 개머리판으로 짓이기고, 군홧발로 밟아 죽이는 장면들이나 산에서 토벌하는 장면들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어요. 그걸 다 읽는데 그때도 눈물이 줄줄 나더라구요.

한라산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고하고 죄없는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죽여버릴 수 있는가, 학살할 수 있는가? 이런 데 대한 분노와 슬픔이었죠. 너무 슬프더라구요. 그때 눈물을 흘리다가 그 감정에 가장 잘 어울리는 모티브를 찾았고, 그게 '한라산' 처음 시작하는('노을이 질 때') 모티브였죠. 항상 격해서 쓰기 때문에 노래들이 그렇게 격했던 것 아닌가 해요."

'동지'나 '친구'가 아닌 '벗'이라고 쓴 이유 
 
'벗이여 해방이 온다' 악보
 '벗이여 해방이 온다' 악보
ⓒ 건강미디어협동조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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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그 '슬픔'과 '아픔', '분노'의 마음이 가득한가요?

"내가 그렇게 노래를 쓴 첫 경험이 '벗이여 해방이온다'였어요. 그 첫 경험 때문에 그 다음에도 그렇게 노래를 계속 쓰는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내게 일종의 트라우마 같은 거였어요. 그런 친구들(김세진, 이재호 열사)을 잘 아느냐? 몰랐죠. 그리고 제가 졸업하고 '새벽'에서 노래운동을 하고 있을 때였어요. (김세진, 이재호 열사가) 두 학번 후배들이었는데 전방입소훈련을 반대했죠. 전방입소훈련을 반대하려고 집회를 하다가 마지막 택(tac)으로 택한 거잖아요. 여기저기 농성이 다 안돼서 최후 택으로 택한 건데 아무 방어 택이 없이 신림사거리 옥상에 올라가서 신나 뿌리고 있다가 떨어져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냥 슬펐죠. 그때는 나도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었고, 그때는 혁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너무 미안한 거예요. 내가 허투로 사는 것 같고 그 얘기를 듣는 순간부터 슬펐고, 슬프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어요.

그 전까지 노래들은 공연하는 데 주제곡을 만들어라, 어떤 노래가 필요하니 만들어라 하면 연구해서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것은 처음으로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만들었어요. 힘들어서 노래라도 써야겠다, 걔네들에게 노래라도 헌사해야겠다 하면서요. 그때는 그 노래가 (대중들에게) 전달될 거라고 생각도 안했고, 노래를 누가 부른다는 생각도 안했어요. 보통 노래를 쓸 때는 공연하기로 해서 쓰는 건데 그런 게 없었잖아요. 그 노래는 그냥 내가 쓰겠다고 해서 쓴 거니까요. 어디서 발표하거나 공연할 게 아니고, 그냥 내가 쓰겠다는 거였어요. 내가 미안해서 내 마음이 너무 슬퍼서 노래라도 써야겠다, 그런 생각에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쓴 거죠.

그때는 노래도 몇 개 써보지 않아서 잘 못쓸 때였어요. 그런데 1주일 동안 거의 슬프고 마음이 아려서 모티브를 생각하려고 머릿속에 계속 멜로디를 그려보면서 지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솔파미레 도시라시도'('그날은 오리라')가 생각난 거예요. 내 슬픈 마음에 딱 공명이 되는 거예요. 윤선애가 부른다고 생각하고. 슬픔이 땅을 치며 우는 것도 아니어야 하고,너무 질척거리는 것도 아니어야 하고, 비통하고 촌스러운 슬픔도 아니어야 하고, 뭔가 맑으면서... 맑은 날이 더 슬프잖아요. 그 당시에 내 마음이 그랬어요.

그게 괜찮다 싶어서 그거 가지고 앉아서 내 방에서 앞부분은 금방 완성했거든요. 앞부분을 완성한 다음에 멜로디에 가사를 붙여 나가기 시작했죠. 그 당시에는 그런 얘기를 노래로 쓰면 가장 일반적인 단어가 '동지'나 '친구'였어요. '동지여 고이가소서', '친구여 고이가소서'였어요. '벗이여'를 쓴 거는 내가 처음이에요. 그때 얼마나 슬펐냐 하면 단어 단어 하나를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어요. 처음에는 '동지여'라고 생각났어요. 그런데 '동지여'라고 하면 너무 상투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동지'라고 못쓰겠더라구요. '친구'도 뭔가 마음에 안들었어요. 그래서 생각해보다 '벗'이라고 했더니 내 마음 속에서는 너무 맑고 고귀하고... 단어 하나가 주는 게 얼마나 크게 다르기야 하겠냐마는 내 마음과 어울리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후반부 멜로디로 가야 하는데 거기서 1주일 동안 막혀서 고민하다가 어느 날 '도시라시도'를 한 옥타브 높여서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다음부터 분노를 표현해서 뒷부분을 발전시켜 쓴 거죠. 얘네들에게 주고 싶은 내 고귀한 슬픔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가자 이제 목숨을 걸고'였어요. 근데 '목숨'이 싫은 거예요. '목숨'의 '목'이 목에 걸려 노래할 때 노래의 감을 떨어뜨리는 것 같았죠. 다른 단어가 없을까? 그러다가 '생명을 걸고'로 생각했어요. '생명을 걸고' 이렇게 쓴 것도 내가 처음이에요. 상투적으로 쫓아갔으면 '목숨을 걸고'로 했어야 했죠. 그때 내가 분노, 슬픔밖에 없는 노래들이 주를 이루느냐고 하면 그때 노래를 썼을 때 경험했던 격함, 감정, 공명 때문인 것 같아요.

그 전까지는 그렇게까지는 아니었거든요. 그 이전까지는 주문제작하듯이 4.19 노래가 필요하다 하면 만들고, 공연주제가가 필요하면 만들고 그랬죠. 그런데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만든 그 다음부터는 제 감정이나 이런 것들을 표현하는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죠. 그것은 '벗이여 해방이 온다'의 경험이 큰 것 같아요. '벗이여 해방이 온다'는 제가 노래 만드는 시간에서, 민중가요를 만드는 시간에서 전혀 다른 경험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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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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