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벗이어 해방이 온다'의 작사, 작곡자 이창학씨.
 '벗이어 해방이 온다'의 작사, 작곡자 이창학씨.
ⓒ 이창학씨 제공

관련사진보기


[관련기사]
[인터뷰①] "'벗이여 해방이 온다'는 내게 트라우마였어요"
[인터뷰③] "꼭 기억하고 싶은 사람이요? 김광석이요"  

* 맨 아래 볼륨을 높이면 '벗이여 해방이 온다' 노래가 나옵니다. 

- 책에 수록된 곡들이 어떤 대상을 노래했나 봤더니 4.3 제주항쟁, 4.19혁명, 5.18광주민중항쟁, 망월동 묘역, 김세진-이재호 열사, 박종철 열사, 조성만 열사, 가수 김광석, 노무현 전 대통령, 세월호, 고 김용균 등이었어요. 저는 이 곡들이 대부분 '진혼곡' 같더라구요.

"좀 그래요. 책 추천사를 써준 후배 원동욱이 예전에 나를 '무당'이라고 했어요. 어떻게 하다 그런 얘기가 나왔냐 하면, '벗이여 해방이 온다'라는 노래로 내가 유명해지기도 했지만 지나고 보면 제 노래 같지 않았어요. 내가 24살에 썼다고 믿어지지가 않은 거죠. 최근에 오케스트라로 편곡해서 클래시컬하게 연주하는 것을 보니 수준이 되게 높은 거예요. 음악도 전공하지 않았던 내가 24살에 쓴 거 같지가 않았어요. '벗이여 해방이 온다'는 한땀한땀 열과 성의를 들여 하나하나 허투로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어떻게 저런 가사를 저런 멜로디를 내가 썼을까 싶어요. 그래서 내 노래 같지 않다고 얘기하니까 동욱이가 '그러니까 형은 신내림을 받은 거다, 형은 무당이었다'고 했어요.

사람이 순간적으로 심하게 격해지잖아요. 아마 그런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가는 거겠죠? 그런 슬픔이 있으면 그걸 잘 견디지 못하는 거죠. 박종철 추모곡('타인의 고통')은 쓸 생각이 없었는데 써 달고 해서 한 거였고, 한라산도 써 달라고 해서 한 거였고, 조상만 열사('그대 진달래 되누나')는 ('벗이여 해망이 온다'와)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미국에 있으면서 그 사건을 들었을 때 가슴이 막혀서 미어져서 쓴 건데, 그게 '그대 진달래 되누나'였어요."

"음악적으로 괜찮은 노래 나온 건 '새벽' 활동할 때" 

- 저는 그 노래들 속에는 '그들'을 위로하거나 '그 역사들'을 망각하면 안된다는 의도가 보이지 않게 있지 않나 싶어요.

"그것보다는 지극히 개인적이었어요. 내가 당위를 싫어하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제 노래들에는 전혀 없어요. 당위가 있는 건 '부활하는 산하' 정도죠. '부활하는 산하'는 공연주제곡으로 쓰려고 한 거고, 뭐도 모르고 처음 쓴 거였기 때문에 아예 의도적으로 쓴 거였어요. 첫 노래가 '사월 그 가슴 위로'였는데 그것도 의도적이었죠. 그거 빼고는 대개는 개인적이었어요. '한라산'의 경우 후배들이 4.3이 금기였으니 그 금기를 풀고 재조명하자는 1987년 당시의 분위기를 띄우고자 내게 부탁했죠. 하지만 부탁한 것만 가지고는 노래를 못쓰니까, 쓰게 된 것은 아주 개인적인 것이었어요.

한라산'에 '조국통일만세'가 나오지만 이념적인 거는 하나도 없어요. 단지 슬프다, 억울하다, 왜 저런 떼죽음을 당해야 해? 이런 거였어요. '조국통일만세'는 그 사람들이 당연히 분단되는 나라를 싫어하니까 나온 거죠. '조국통일만세'는 그들이 외친 구호들이긴 하지만 그게 심각한 얘기냐? 하는 얘기였던 거예요. 나한테 4.3은 죽어간 사람들에게 느꼈던 억울함, 눈물나는 아픔 이런 거였어요."

- 개인적인 것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은 전체로, 역사로 나아가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노래는 부르고 나면 그 다음에는 듣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죠. 그것은 그쪽의 자유영역이니까요. 거기서 작사가나 작곡자의 의도 자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 것 같아요."

- "내게는 아마 열 손가락 중 깨물면 가장 아프게 느낄 만큼 아끼는 자식 같은 노래"가 '사랑하는 이여'라고 했는데 왜 그런가요?

"물론 제 노래가 다 좋은 노래라고 생각하지만, 제 노래를 평론하는 평론가라면 음악적으로는 다 좋은 노래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음악적으로 괜찮은 노래가 나온 시기가 '새벽'에서 활동할 때, '벗이여 해방이 온다'를 쓸 때부터에요. '벗이여 해방이 온다', '귀례이야기', '한라산' 세 곡을 연이어 썼어요. 2-3개월, 6개월 간격으로요. 그때 노래들이 괜찮아요. 그리고 나서는 한동안 여러 노래를 쓰긴 했지만 저에게는 별로예요.

1993년~1995년 이때의 노래들이 '망월동, 1993년 여름', '사랑이는 이여', '하늘'이거든요. 장르가 다 다른데 음악적으로만 보면 다 괜찮아요. 이때는 '새벽'에서 활동할 때였고, 전두환 정권이었고, 졸업했는데 직업도 없고, 혁명운동하겠다고 노래운동하겠다고 살면서 경제적으로 힘들고, 부모님이랑 맨날 싸우고, 그럼에도 내 의지를 다져야 했던 때에요. 문승현 선배 등 내가 음악적으로 자극을 받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내가 되게 힘들었을 때에요. 음악적으로도 이런 것을 잘 받아들이고 표현도 잘하고 나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겸손하게 표현하고, 그러면서 커 나가던 때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러다가 소비에트가 망하고, 사회주의 이념이 붕괴하면서 믿을 데도 없고, 아버지는 작은 아버지 빚보증에 개인 파산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워) 당장 먹고 살아야 하고, 애들도 둘이어서 힘들었어요. 뉴욕에서 '우리문화찾기회'를 하면서 여러 뮤지션들을 만났어요. 서울대 작곡가 84학번인 신동일, 그 친구가 그 당시에 뉴욕에 와서 석사를 하고 있었거든요. 그 친구랑 음악작업을 몇 번 같이 했어요. 내가 작사하면 신동일이 작곡해서 노래를 만들어 공연에서 같이 불러보곤 했죠. 근데 음악적으로 굉장히 신선하더라구요. 내가 김민기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처럼.

또 한사람이 '신현중'이라고, 옛날 노찾사를 했던 성균관대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당시 보스턴의 버클리대를 다니고 있었거든요. 자기 후배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 공연에서 반주를 하게 됐어요. 재즈피아니스트에요. 내 노래를 막 재즈화성으로, 블루스 화성으로 연주하는 거예요. 그 전까지는 블루스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그것에 자극받아서 집에서 혼자 피아노로 화성을 연습해보곤 했어요. 이렇게 음악적 자극들이 있었고, 배울 것들이 있었어요.

기독교식으로 얘기하면 사회주의 붕괴로 인한 정치적 혼란, 경제적 어려움 등이 하나님이 나에게 시험을 줘서 마음을 강퍅하지 않게 만들었다고 할까, 교만하지 않게, 하나의 고정적인 관념에 빠지지 않게 만들어준 것 같아요. 오히려 나를 부드럽게 만들어준 것 같아요. 그때 음악적으로 다른 기법으로 해볼 수 있었던 노래들이 그 당시 노래들이에요. '사랑이여'가 그 당시 제 절절한 심정을 음악적으로 표현한 거였어요. 화성이 왔다갔다 하고, 중간에 클래시컬하게 변화도 줘서 만족스러웠죠. 내 잔잔한 얘기를, 솔직한 얘기를 충분하게 담아준 것 같고, 음악적으로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하고, 가사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또 한 가지 내 팍팍했던 심정들을, 사회주의 붕괴 등으로 머리가 혼란스럽고 유학온 사람으로서 한국에 있는 여러 사랑하는 동료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얘기들, 이런 얘기들을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내가 노래를 만들고 선택했어요. 그 소통할 상대방에게 발표되고 전달된 적이 없어서 얼마나 소통이 됐는지 모르지만, 내 입장에서는 소통하기 위해 충분하게 표현을 잘 한 곡이라고 생각해요."

"김민기형 노래가 교과서였어요, 다른 교과서가 필요 없어요"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 시절의 이창학씨(왼쪽)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 시절의 이창학씨(왼쪽)
ⓒ 이창학씨 제공

관련사진보기

 
- 약 40년에 걸친 노래 인생에서 처음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미친 게 '기독교'였나요?

"그쵸. 어렸을 때는 교회음악이 컸죠. 찬송가가 고전음악이잖아요. 고전음악에 가사가 붙어서 장중하게 울려퍼지면 마음이 푸근하고 감동들이 밀려올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경험들을 어렸을 때부터 했죠. 교회를 계속 다녔으니까요. 그리고 학교가 미션 스쿨(한신대 병설학교)이어서 일주일에 예배를 서너 번씩 봤으니까요. 그게 영향이 제일 컸죠.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거의 음악을 안하고 있다가 그때는 심야 방송이나 대학가요제를 많이 들었어요. 심야방송 들을 때 정태춘이나 송창식, 산울림 음악들을 가장 많이 들었어요. 김민기는 '아침이슬'만 알고 잘 몰랐어요. 한대수도 몰랐고, 양희은은 알았죠. 대학 들어가서 처음에 선배들의 노래들을 듣는데 한동헌 노래에 뿅 갔어요. 한동헌 선배의 '그루터기'보다 '신개발지구에서'에 뿅 갔죠. 그리고는 한대수 노래가 좋았어요. 그리고 나서 김민기 노래에 꽂히기 시작했어요. (문)승현이형의 '영산강'은 좋은 노래지만, 저한테는 후순위였고, 한동헌의 '신개발지구에서'나 '나무'에 팍 꽂혔어요.

한대수 노래를 좋아하다가 김민기 노래는 졸업하고 노래운동하면서 다시 봤어요. 화성 진행, 음악적인 풍, 가사, 가사와 화성과 악곡의 적합성, 와! 교과서예요. 초기 노래들을 보면 어떻게 저렇게 예쁜 화성들을 저런 진행으로 저런 화성으로도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똑같은 노래던데 화성을 이렇게 바꾸면 이런 느낌이 나네, 이런 것들을 김민기 노래에서 다 배웠죠. 민기형 노래가 교과서였어요. 다른 교과서가 필요없어요. 거기서 많이 배웠어요."

- 어렸을 때 삼촌방에서 발견한 '하모니카'도 영향을 미쳤겠지요?

"네. 하모니카는 내가 음악을 좀 한다는 생각을, 자부심을 갖게 만들어준 거였죠. 어머니가 피아노를 배우라고 해서 피아노는 좀 칠 수 있었고, 그래서 악보는 볼 줄 알았어요. 근데 초등학교 2~3학년 때엔가 삼촌방에 하모니카가 있었는데 하모니카로 '도레미파 솔라시도'를 불어보니까 나오더라. 이후 동요 악보를 보고 부르고 다녔죠. 애들이 신기해하고, 선생님도 학예회 때 너 하모니카 독주하라고 하고. 그래서 '내가 음악을 못하지 않구나, 나도 재능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됐어요.

'하모니카 소년'이라는 얘기는 내가 쓴 얘기가 아니에요. 내가 수유리의 한신대 미션 스쿨을 나왔는데, 여의도로 이사오면서 애들이랑 다 헤어졌어요. 걔들은 그 동네서 사니까 자기들끼리 만나고. 그러다 2000년대 초반인가 30년 만에 동창회를 한다고 연락이 와서 나갔어요. 거기서 여자애들이 저를 '하모니카 소년'이라고 얘기하더라구요. 그들은 나를 '하모니카 소년'으로 기억하고 있었어요."

"부모님은 사탄에 빠졌던 자식이 되돌아왔다고 하셨죠"
   
'벗이여 해방이 온다'의 작사, 작곡자 이창학씨와 그의 어머니.
 '벗이여 해방이 온다'의 작사, 작곡자 이창학씨와 그의 어머니.
ⓒ 이창학씨 제공

관련사진보기

 
- 그런데 책에서 기독청년문화운동의 범주와 자신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했다고 썼는데요.

"저는 대학 때 '메아리'에서 활동했는데, 당시에는 학생운동을 3학년 때까지 하고, 졸업하고도 계속 운동을 한다면, 징역을 가거나 아니면 공장에 들어가거나 둘 중에 하나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저는 몸도 불편하니까 징역도 못가고, 공장에 가서 노동운동을 하기도 어렵고. 공장을 안 가거나 징역을 가지 않은 친구들에게는 기독교단체나 그 당시 생기기 시작한 민청련(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나 민문협(민중문화운동협의회) 등 재야단체의 실무자로 들어가는 게 대안이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문승현 선배가 '감리교청년회('감청')에서 노래팀을 만드는데 '메아리'에서 사람을 보내 달라고 SOS가 왔으니 네가 한번 가서 일해보지 않을래?'라고 했어요. '너는 어차피 단체일을 해야 하고, 3학년 겨울방학이니 학교일도 끝났으니 그쪽으로 가라'고 해서 파견명령을 받아서 감청을 간 거예요. 기독교청년운동을 하러 감청에 간 게 아니에요. 내 지향 자체도 기독교운동이나 기독교청년운동은 아니었거든요. 노래팀을 만들고 노래팀을 운영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공연하는 게 내가 할 일이었어요.

여기에 계속 있으면 기독교청년운동을 해야 하는데 기독교청년운동하려고 청년대중들을 조직하고 진보적인 교회청년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일은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었어요. 그것보다는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었죠. 이왕이면 문화단체쪽으로 가서 전문성 있는 음악운동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 고민을 하는데 당시에는 마땅한 단체가 없었죠. 그 이전까지 '새벽'(노래모임)이 있긴 했지만, 거의 유명무실했거든요. 프로젝트성으로 공연이 있거나 테이프(제작)가 있으면 몇 명 모였다가 끝나면 해체되는 식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문승현 선배가 와서 '새벽을 상설조직화하자'고 했어요. 근데 선배들도 별로 없었어요. 일단 승현형이랑 나랑 둘이서 한번 해보자고 했어요. 1985년 겨울에 승현이형이 저를 찾아와서 이렇게 합의를 보고 가요. 그래도 구성원이 있어야 할 것 아녀요? 그런데 민문협 밑에서 진보적인 운동을 전임으로 하겠다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고대 '노래얼'의 표신중, 이영미 선배가 있었는데, 두 분은 노래얼이라고 하기보다는 고대 연극반이었거든요. 그리고 승현이형이 있었고, 이게 끝이에요.

내 동기들이나 내 주변에서도 사람들을 모으기가 힘들었어요. 나처럼 전업으로 하겠다는 사람이 없었죠, 대부분 현장일을 하겠다고 하거나 운동을 그만두고 대학원 진학하겠다고 하거나. 제 주변에는 저하고 서울대 음대 출신으로 1년 후배인 여계숙 둘이 있었죠. 연대 대학원 다니던 이광기란 친구도 있었구요. 그렇게 해서 새벽의 진영이 꾸려졌어요.

당시가 1985년, 1986년으로 넘어가던 시기였는데, 각 대학에 몇 안되는 노래팀들이 있었죠. 고대, 서울대, 연대, 성균관대, 이대가 있었을 거예요. 서울대 '메아리'가 대표적으로 학내 조직에 편입될 때에요. 학내 지하정치조직에 편입된다는 것은 문화선전위원회 같은 조직으로 (지하정치조직의) 하위조직으로 편제된다는 거죠. 메아리가 오픈(공개조직)임에도 불구하고 오픈 내에다 셀(cell)을 만들어서 그 셀에다 모든 지휘부를 집어넣어서 이들이 오픈을 다 지휘하도록 할 때였거든요.

그 당시에는 혁명운동을 하는 거여서 대중주의가 아니라 전위우선주의, 교육, 선도투쟁 등이 중요할 때여서 서클내에 '딴따라'가 필요가 없었어요. 노래를 잘하고 기타를 잘 쳐도 정치의식이 투철해야 해요. 정치의식이 투철하지 않으면 분위기만 흐려놓고 언제든지 조직에 해를 가할 수 있고, 그런 사람이 선배가 되면 후배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평가를 받을 때였거든요.

그런 애들이 내부에 적응하지 못하고 밖으로 떠돌다가 그만둘 때였어요. 윤선애가 그때 그만두었죠. 자기는 열심히 해보고 싶은데 자기는 운동쪽은 능력이 안되는 것 같다며 메아리를 그만뒀어요. 윤선애가 겨울방학 때 보라매공원 후문인가 정문인가 육교 횡단보도에서 알바를 했어요. 집으로 전화해도 안만나주니까 내가 거기까지 쫓아갔아요. 노래하자고, 새벽을 상설조직화하는 데 합류하자고 설득해서 선애를 데려왔어요. 그리고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안치환을 이광기가 데려오고. 그렇게 시작한 새벽의 상설조직화였어요.

당시 내가 중간에서 애들을 지도하던 선배그룹이었어요. 그렇게 1년 가까이 하다가 집안문제가 있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그렇게 다니니까 집안에서는 서울대 졸업한 애가 2년 동안 뭘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며 압박이 너무 컸어요. 그래서 음악은 계속 할 생각이 있었으니까 뭘 해도 직(직업)은 하나 있으면 좋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영미 누나랑 신중이형이랑 승현이형한테 '서울대 작곡과 대학원에 이론으로 석사과정에 진학하겠다'고 했어요. 안 그러면 이 상태로는 버티기가 힘들다고 얘기했죠. 근데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했죠.

거절을 당한 이유가 더 섭섭했어요. '네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거였어요. 물론 내가 하는 일이 많았지만, 개인적인 어려움을 토로하는데 선배들로서 애정을 가지고 돌아봐 주지도 않았다는 게 되게 섭섭했죠. 결국 견디기 힘든 상태에서 더 이상 못버티겠다 싶어서 그만두고 부모님한테 유학 가겠다고 했어요. 유학 가겠다고 하니까 부모님은 사탄에 빠졌던 자식이 되돌아왔다고 하셨죠."

"진짜 미안한 건 후배들이었어요"
 
전설적인 민중가요 '벗이여 해방이 온다'의 작가, 작곡가 이창학씨.
 전설적인 민중가요 '벗이여 해방이 온다'의 작가, 작곡가 이창학씨.
ⓒ 오마이뉴스 구영식

관련사진보기

  
- 순수한 예술로서의 노래와 변혁운동의 수단으로서의 노래 사이에서 엄청 고민했다고 보면 될까요?

"그 당시에는 승현이형이나 새벽이나 나의 입장은 예술이 수단이 되면 안된다는 거였어요. 노래는 그 자체로서 완성도도 가지고 있고 만드는 사람은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처음으로 민문협 수련회에 가서 진보적 예술가운동을 제안해요. 탈출, 마당극 등 생활문화운동는 사람들한테 진보적 예술가 운동을 해야 한다, 진보적 예술가를 양성해야 한다고 제안해요. 어마어마하게 내부논쟁이 벌어졌죠. 우리쪽에 동조하는 그룹들이 장르별로 달랐어요. 영화, 미술 이런 쪽은 우리 얘기에 동조하고, 마당극, 탈춤 쪽은 달랐어요.

그래서 양쪽(순수한 예술과 변혁운동) 사이의 고민이라기보다 나는 당시 혁명운동에 진보적 예술가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선전선동이 됐건 좋은 작품을 만들어서 세상에 공헌하고 싶었죠. 그런데 무직이고 벌이는 하나도 없고, 과외 하나 해서 겨우 활동비 정도 챙기는 상태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아요. 진보적 예술가 운동을 지향하면서 이 운동을 계속 나간다고 하면 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 서울대 작곡과 대학원을 가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네가 하는 일이 많은데 갑자기 그 일을 누가 하란 말이냐?' 그게 실망스러웠어요. 그래서 버틸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버틸 수가 없으면 다른 길을 택할 수밖에 없잖아요. 물리는 어려서부터 공부하고 싶었던 거고, 물리학 박사를 하겠다고 하고 유학을 간 거죠. 그래서 선배들한테 되게 미안했죠. (문)승현이형한테 미안했고, 특히 진짜 미안한 건 후배들이었어요. 후배들에게 어마어마하게 미안했죠."

태그:#이창학, #벗이여 해방이 온다, #내 노래가 그대에게, #메아리, #새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