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21 11:41최종 업데이트 22.11.21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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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이렇게 이야기해 보자고 마음먹었을 때는 좀 오버한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이왕이면 웃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지 궁상떠는 찌질한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그게 맘 같지 않았다. 이야기하다 보니 아팠던 기억들이 자꾸 떠올랐고 그걸 그냥 다시 묻어두기가 힘들었다.

무슨 억지 눈물 신파극이냐는 소릴 듣더라도, 무슨 일기장도 아닌데 이런 말을 하느냐는 소리를 듣더라도, 독하고도 끈질기게 자꾸만 꼬물꼬물 비집고 나오는 그 아픈 기억을 털어버리고 싶었다.


웬만큼은 다 털어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전히 아쉬움이 비집고 나온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세상을 향해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어진다.거기다가 아직도 들려오는 장애인들의 힘든 이야기는 이런 나를 더욱 부추기고 밀어댔다. 육체적 장애로 인해 감겨 버린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해서도 그래야겠지만,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도 나 같은 장애인들은 혼자만의 세상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손끝에 작은 상처 하나만 생겨도 종일 신경 쓰이는 게 우리 인간 아니던가. 그런데 생활에 장애를 줄 정도로 몸 어딘가가 망가졌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걸 잊고 살 수 있을까.

그래서 난 장애인들의 감정 상태는 절망과 우울함이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 같은 장애인들은 어떻게든 절망과 우울의 감정을 떨쳐 버리려 항상 노력해야 한다. 설령 다소 오버라고 느껴지더라도, 조금은 엉뚱하게 보이더라도,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

이때 반드시 내가 아닌 '남'이 필요하다. 비록 노력도 행동도 내가 해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내가 아니라 남과 함께할 때 훨씬 좋다는 걸 느껴야 하고, 내 옆에는 나를 도와줄 남이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만 장애인들도 밖으로 나와 같이 어울리고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염치 불고하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사실 별로 대단한 건 아니다. 근데 막상 당하는 나 같은 장애인으로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먼저 하고픈 아쉬운 소리는 우리 장애인의 입장에서 말하고 들어줬으면 하는 것이다. 친하고 편하더라도, 그냥 한두 마디 지나가는 말이나 글이라도, 낫지 않는 몸의 상처가 마음으로 번져가는, 그래서 어쩌면 아이처럼 약해져 버린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해 줬으면 한다. 요즘 유행하는 꼰대 같은 말투나 태도는 정중히 사양한다.

결심할 때마다 꼭 벌어지는 일

'머피의 법칙'이란 게 있다. 뭘 하려는데 꼭 원치 않는 일이나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다는 건데, 내게도 나만의 머피의 법칙이 있다. 

뭔가 일이 잘 안 풀리거나 고질병인 우울증이 도질 때면 나는 책상에 턱을 괴고 앉아 청승을 떨거나 베개에 얼굴을 묻고 궁상을 떤다. 참으로 우울한 음악까지 틀어놓고 새삼 신세 타령을 덧붙이다 보면 다시 절망의 늪에서 헤매며 마음의 눈까지 멀어간다.

그러다 문득 그런 나 자신을 깨닫고, 이래서는 안 된다고 각오를 다지며 다시금 마음을 다잡는다. 바로 이때 여지없이 나만의 머피의 법칙이 나타난다.

으라차차 힘내자고 두 주먹을 불끈 쥐면 이상하게도 책상 위에 있던 텀블러가 그 주먹에 맞아 나가떨어지거나 물컵이 엎질러진다. 기운차게 각오를 다지려고 몸을 벌떡 일으키면 책상 모서리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내 무릎과 부딪쳐 눈물까지 찔끔거리게 한다. 뭔가 해보겠다고 기운차게 밖으로 나갈 때면 여지없이 문 모서리가 얼굴이나 입술에 부딪혀 가끔은 피까지 보게 만든다.
  

나만의 머피의 법칙. 따뜻한 한마디면 거뜬하게 날릴 수 있다. ⓒ 김승재

 
아내나 친구들의 도움에 고무되어 세상을 만나러 기분 좋게 밖으로 향할 때면, 이상하게도 옆 사람이 들고 있는 음료수병이나 휴대폰이 내 손이나 팔에 부딪혀 저만치 날아가 버린다.

머피의 법칙은 언제나 예외 없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도 당사자는 엄청나게 그걸 뻥튀기해서 자기에게는 항상 그런 나쁜 일이 일어난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당연히 나도 그렇다. 나만의 머피의 법칙이 100%일 리도 없고, 내가 못 보는데도 조심하지 않아서 일어나는 일이지 우연히 그런 게 아니란 것도 잘 안다. 하지만 기껏 기운을 북돋웠는데, 어렵게 우울과 절망과 싸웠는데, 말짱 도루묵이 되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이럴 때 남이 참 중요하다.

"에이, 조심하지. 왜 그렇게 덤벙대."
"뭐 하는 거야? 에이, 아까워라."
"내 이럴 줄 알았어. 지나치게 까분다 싶더니만."


조금도 틀린 소리가 아니고 나쁜 소리는 더더욱 아니다. 근데 내가 너무 소심해서 그런지 이런 소릴 들으면 정말 심하게 위축된다. 어렵게 다졌던 각오는 온데간데없어지고 마음속에선 더욱더 깊고도 어두운 기운이 번져간다. 그 사람이 날 미워한다거나 내 행동으로 맘이 상했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느끼는 감정은 정말 하늘과 땅 차이다. 아이도 아닌데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고 한다면, 어쩌면 감정이 아이만큼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답을 하고 싶다.

그럴 때 이런 소리를 들으면 기운이 난다.

"괜찮아? 많이 아프겠다."
"이런, 기운이 너무 넘쳤네. 그래, 그렇게라도 기운 내."
"신경 쓰지 마. 난 괜찮아."

  
별로 힘들지도 않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이왕이면 아이한테 대하듯 말을 했으면 한다. 아이는 제대로 알지 못해서, 경험도 없어서 실수한 거란 걸 잘 알기에 책망하기보다는 격려해 주는 것이리라. 그런 면에서 장애인도 실수한다는 걸 이해해 줬으면 한다.

나누면 두 배가 되는 기쁨과 즐거움도 있지만 나누면 절반이 되는 슬픔과 괴로움도 있다. 그래서 가끔은 내 슬픔과 괴로움을 털어놓고 싶어진다. 아무리 가상의 눈을 동원해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남들의 눈을 빌려 그 그림에 덧칠해 봐도 진짜 내 눈으로 보고 싶단 생각을 완전히 떨쳐 버릴 수는 없다.

감정에 반하는 말은 노땡큐

우리 애들이 어렸을 때 내가 직접 찍었던 아이들의 동영상을 들을 때면 너무도 생생한 그림이 그려지지만, 그래도 보고 싶단 생각이 그만큼 더욱더 간절하다. 좋아했던 영화나 뮤지컬 음악을 들을 때도 그렇고, 가서 직접 내 눈으로 봤던 멋진 경치 앞에 다시 섰을 때도 그렇다.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시게 푸를 가을 하늘을 상상해도 그렇고, 화려한 군무를 즐기는 오색의 나비처럼 이리저리 공기까지 물들이고 있을 단풍을 그려봐도 다시 한번 내 눈으로 보고 싶단 생각을 떨치기는 어렵다.
   

어쩔 수 없는 그리움. 때론 슬픔으로 때론 아픔으로 찾아오지만 함께 나눌 사람이 있다면 절반에 또 절반으로 가벼워진다. ⓒ 김승재

 
그러다 보면 기분 좋게 잘 있다가도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을 때가 있다. 그리고 점점 농도를 더해가는 답답하고도 우울한 그 감정을 떨쳐 버리려고, 그래서 절반으로, 다시 절반으로 그걸 나눠보려고 입 밖으로 내뱉을 때가 있다.

"왜 또 그런 소릴 해? 장애인 올림픽 보니까 팔다리가 모두 없어도 수영을 하더라. 넌 그 사람보단 낫잖아?"
"쓸데없는 소리. 그럴수록 속만 상하지. 이젠 잊어버려."
"너무 알려고 하지 마. 봐도 별거 없어. 네 기억 속이 더 멋있을 거야."


역시 틀린 말이 아니고, 날 공격하는 말도 아니다. 근데 상처가 남는다. 더욱 심하게 조여오는 답답함에 더해 괜히 말을 꺼냈다는 후회까지 한몫한다.

"그렇겠다. 정말 얼마나 보고 싶을까."
"그렇지? 나도 또 봐도 좋은데, 너는 오죽하겠니."
"에이, 정말 그렇겠다. 네 눈만큼은 아니겠지만 내가 설명해 줄게. 그러니까, 저기..."


조금씩 더해가던 안개가 걷히는 기분이 든다. 맘으로 느껴지는 공감에 한두 마디 더 하고 나면 어떨 때는 거짓말처럼 맘속을 가득 채웠던 답답함과 우울함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사람들은 자기의 감정 상태와 비슷한 말과 행동에 더욱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우울할 때 쾌활한 말이나 슬플 때 기쁜 말과 행동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많은 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이건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상관없이 사람이라면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우연히 인터넷에서 들었던 우울증 환자에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이 딱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다.

"네가 감정을 다스려야지."
"너만 생각하니, 다른 사람도 생각해야지."
"긍정적으로 생각해. 모든 건 생각하기에 달린 거야."
"뭐, 그런 거 가지고 그래."
"네 심정이 어떨지 잘 알아."
"힘내. 너보다 더 안 좋은 사람도 많아."


아무리 맞는 말이더라도 애써 당사자의 감정에 반하는 말은 노땡큐다. 그리고 누군가와 비교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건 또 다른 책망이요, 정신적 가해에 불과할 뿐 절대 위로가 되지 못한다.

갑자기 얼굴이 후끈 달아오른다. 장애인들이 항상 이렇게 속이 좁다는 게 아니란 걸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다만 평범한 이 세상과 만나는 게 어렵고 힘들어서 그럴 때가 있다는 거다. 그때 남의 말과 태도가 엄청나게 큰 힘도 되고, 높은 벽도 된다는 얘기일 뿐이다.

아, 그런데 굳이 장애인이 아니더라도, 사람이라면 꼰대의 말투보다는 공감 어린 따뜻한 말이 더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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