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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고향도 나라도 없습니다."

구소련 독립국가의 이주민들이 참여한 7분짜리 단채널 영상 <빨래프로젝트2>(2022)에 등장하는 한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작품의 배경을 설명하면 이렇다.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생겨난 난민들이 한국에 들어올 수는 없는 상황인데, 유일하게 입국할 수 있는 대상은 고려인뿐이다.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을 안고 이주할 수 있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구소련 독립국가로 모두 다른 나라에 흩어져 살지라도 '러시아어를 쓰는 한민족'이라는 믿음으로 조국에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결국에 한국에 와서 느낀 것은 "여기도 나의 나라가 아니"라는 고백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구(舊)소련'은 '포스트 소비에트(Post Soviet)'에서 기인한다. 4선째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오는 2024년까지 장기집권이 예정되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소비에트연방의 스탈린이 집권했던 31년의 뒤를 바짝 쫓을 만큼 상당한 기간인 셈이다.

소련의 해체와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된 이후 '포스트 소비에트'가 찾아오면서 다양한 국가들이 생겨났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이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제대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계속 이주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앞선 설명처럼) 구소련 독립국가에서 발생한 이주민들이 들려주는 자신들의 속내가 솔직하게 담겨 있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는 권은비 작가
 
아르코미술관 기획전 <일시적 개입>의 전시 첫날에 권은비 작가는 수 개의 비누가 공개되는 현장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날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부득이하게 마스크를 쓰고 사진을 찍었다.
 아르코미술관 기획전 <일시적 개입>의 전시 첫날에 권은비 작가는 수 개의 비누가 공개되는 현장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이날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부득이하게 마스크를 쓰고 사진을 찍었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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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의 제작을 이끈 작가는 권은비씨다. 그는 사람의 앞모습보다 뒷모습을 눈여겨본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것은 기울어진 땅에서 중립으로 서 있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란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 꾸준하게 고민해 왔으며, 작품에서 화두로 꺼내는 것은 자본, 정치, 사회, 국가, 식민 등 사회적 문제에 주목했다.

지금까지 해왔던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관객이 참여하거나 누군가와 협업하는 형태로 전개됐다. 이번 작품도 이주민의 마음을 드러냄으로써 그의 전작들과 전혀 이질적이지 않는 흐름을 보여준다. 그는 어떤 이유로 국가와 전쟁, 이데올로기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작품을 이어왔을까. 이에 대한 질문에 그는 "분단국가라는 이유로 남한에서 행해왔던 반공이데올로기와 레드컴플렉스(멕카시즘)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어린 시절부터 겪었던 이념이 작업을 지배해온 것으로 보인다. 

"8년간 독일에서 사회적 예술을 공부했어요. 초기에는 어렸을 때 받았던 반공교육 때문에 선입견이 있었죠. 하지만 그런 사상을 가진 이들은 어떤 사람일까라는 궁금증이 생겼어요. 그런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니 결국은 그게 선입견이더라구요."

비누는 아픔을 치유받는 느낌
 
비누에 새겨진 '1988'이라는 숫자는 그해 전쟁에서 자식을 잃어버린 해라고 대답했다. 전쟁으로 인한 자신의 아픈 기억을 치유하기 위해 비누에 당시의 해를 새겨넣었다고 말했다.
 비누에 새겨진 '1988'이라는 숫자는 그해 전쟁에서 자식을 잃어버린 해라고 대답했다. 전쟁으로 인한 자신의 아픈 기억을 치유하기 위해 비누에 당시의 해를 새겨넣었다고 말했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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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작가는 앞선 영상 외에 독일 동독지역의 베르나우 주민들이 참여한 15분짜리 단채널 영상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2022)도 동시에 공개했다. 또한 눈에 띄는 것은 동독과 구소련 독립국가의 주민들이 직접 참여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받는 결과물로 여러 개의 비누를 만든 것이다.

장소는 달라도 비슷한 배경을 가진 두 영상, 그들이 실제로 참여해 만든 두 종류의 비누까지 총 네 종류가 공개된다. 이런 작품의 제목에는 '빨래'라는 공통점을 보았다. 권 작가가 지난 2015년 이후 이렇게 한결같이 과정을 이어온 이유가 궁금했다. 
  
"비누를 선택한 것은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분단 국가인 한반도를 벗어나 독일에서 공부하며 많은 것을 느꼈어요. 인간이 타향에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잖아요. 인종차별도 있고요. 그런데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있어서 한 번은 울며 잔 적이 있었는데, 깨어나보니 베개에 눈물자국이 있더라구요. 아침에 일어나 비누로 빨래를 하니까 뭔지 모르게 괜찮아지는 느낌이었어요."

그런 과정은 동화 속 마녀들이 누군가의 병을 고치려고 약을 만드는 것처럼 글리세린에 녹여가면서 향료와 색소뿐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넣으면서 비누를 만든 것에서 기인된 것이란다. 또한 작품의 제목으로 이어진 '빨래'에 대한 설명도 잊지 않았다.

그가 독일에서 지역주민과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가 빨래였는데, 그들은 한국식(발로 밟는 방식)이 생경하다고 전했다. 이 퍼포먼스의 목적은 단순히 혼자 빨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큰 바구니 안에 들어가서 손과 어깨를 잡고 함께 빨래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것은 권 작가가 일관된 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부분과 묘하게 겹쳐져 있다. 

사회적 문제는 '함께' 풀어가야

"국가나 사회적 문제로 상처를 받았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개인 문제로 인식되며, 외롭게 떠안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개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풀어가야할 부분이에요." 

권 작가가 선보인 작품들 사이에는 열악한 연결고리가 보인다. 그는 분단국가에서 자라면서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생각한 국가가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경험했다. '불안한 영혼을 잠식시킨다'는 프로젝트는 동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는 2차 세계대전, 나치, 분단, 통일, 냉정을 비롯해 지금은 또다른 신냉전을 경험하고 있는 지역주민들과 함께 비누를 만들었다.

그곳에서 작업한 이유는 한국에도 미군기지가 있듯이 예전에 나치가 사용했던 군사기지가 있는데, 패전 이후 소비에트 군대가 주둔했고, 통일 이후에는 군대과 사라지면서 빈 공간으로 살아야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곳의 주민과 함께 자신이 전쟁을 통해 받은 상처와 분단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2015년도 그랬지만, 2022년은 더 확장된 형태로 우크라이나 전쟁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권 작가는 이런 역사적 배경에 "미술가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미술관에서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전쟁으로 구소련 독립국가에 거주했으나, 지금은 한국에 이주한 이들과 함께 비누를 만들고 우리가 함께 경험한 국가에 대한 폭력과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 그래서 실제 전시를 앞두고 아르코미술관 필룩스에 그분들을 초대해 같이 작업까지 이어졌다. 그가 선보인 여러 비누 작품들 중 가장 인상 깊은 참여자의 사연을 들려줬다. 

"어떤 분이 비누에 '1988'이라는 숫자를 쓰더라구요. 이게 무슨 의미냐고 물어봤더니 그것은 자식을 잃어버린 해라고 하네요. 너무 아픈 해였다며 그걸 비누로 만드는 거예요. 또 다른 이야기는 2015년에도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동베를린 참여자 중에 우크라이나 여성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분이 '상실'이라는 비누를 만들었는데 실제 2015년에 우크라이나에서 가족들이 돌아가셨대요."

이 이야기를 듣고 권 작가는 서로 다른 내용과 사연이 있을지라도 하나로 통하는 궤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고려인들 중에서 이쪽으로 이주하면서 자신은 고향도 나라도 없다고 말하는 분들의 슬픔과 서러움을 비누로 만든 것이나, 다른 국가지만 한반도에서 독일,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구소련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보인 공통점. 그것은 역사적인 이데올로기와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잊을 수 없었단다.

2015년부터 시작한 <빨래 프로젝트>는 분단국가인 남한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자신이 얼마만큼 일상적인 전쟁 위협에 적응해왔고, 국가적 대립으로 인해 불안이 내재되었는지 인지하는 과정이다.

이런 불안을 비누로 씻고자 했던 권 작가는 이주자로서 정체성을 지닌 채, 독일에서 전쟁과 냉전, 분단의 역사를 경험한 타인들과 관계 맺기를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불안을 나누는 제의적 퍼포먼스로 빨래를 선택했다. 마지막으로 전시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바라는 마음을 들려달라고 부탁하자 이렇게 바람을 드러냈다.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오히려 위로를 받았어요. 제가 미술가로서 참여자에게 감히 위로를 줄거라는 생각은 못했어요. 저도 나름의 상처와 아픔이 있었는데, 참여자를 만나면서 치유를 받았습니다. 동베를린 참여자 분들은 저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고맙대요. 참사, 전쟁 등 큰 단위의 고통이 개인에게 부과됐을 때, 홀로 남는 느낌이 강한데 그런 아픔을 같이 나누는 것이 굉장한 힘이라고 생각해요. 혹시 관객 중에서도 그런 아픔이 있는 분들이 계시면,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같이 고민하고 회복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다양하게 유입된 사람들이 이웃과 관계 맺는 60여 작품들
 
아르코미술관 기획전 <일시적 개입>은 총 14개팀 60여 작품이 공개된다. 행정구역으로 인한 로컬 개념이 아니라 다양한 곳에서 유입된 인구들이 서로 관계맺기를 하는 것에 주목한 전시이다.
 아르코미술관 기획전 <일시적 개입>은 총 14개팀 60여 작품이 공개된다. 행정구역으로 인한 로컬 개념이 아니라 다양한 곳에서 유입된 인구들이 서로 관계맺기를 하는 것에 주목한 전시이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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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작가의 프로젝트를 비롯해 총 14팀의 작가들이 60여 개 작품을 선보이는 아르코미술관(관장 임근혜) 기획전시 <일시적 개입>이 진행된다. 다양한 지역과 국가에서 참여하는 이번 전시는 기존에 행정구역으로 구분된 로컬(local) 개념이 아니라 다양한 유입인구들의 관계맺기에 주목했다.

이것은 팬데믹 이후 안전, 연대, 돌봄에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웃과 함께하는 공동체 활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국가 간의 이동이 어려워지면서 주변에 관심이 높아졌고, 자신의 거주지에 집착하지 않고 다른 지역과 커뮤니티에 기반해서 활동해온 작가와 기획자들이 참여한다. 

여기엔 경상도 지역 선박 문화를 다룬 아카이브(거제 섬도), 가상의 여성주의 예술가 레지던시(노뉴워크), 제주도의 인권문제와 소수자를 위한 차별 없는 가게 네트워크(다이애나랩), 부산 바다의 생태 환경을 둘러싼 프로젝트(실험실C), 광주와 필리핀 트랜스 로컬적 예술 프로젝트(오버랩), 가치 중심인 맛의 커뮤니티를 생성하는 로컬리티 레시피(스몰 바치 스튜디오) 등이 소개된다. 내년 1월 21일까지 아르코미술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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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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