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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김장철이 왔다. 작년에는 작은 텃밭이라도 배추 100여 포기와 무를 거두어 여름내 키운 고추, 대파와 함께 처음으로 김장을 했었다. 텃밭의 한 줌 땅도 남겨두지 않고 알토란같이 작물을 키워서 한 해를 마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올해는 책방을 열고보니, 텃밭에 가는 일이 현저히 줄었다. 년초 밭갈이를 할 때만 해도 머릿속으로 목표와 달성까지의 계획이 순서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막상 책방일 하나를 더하고 보니 생각처럼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아서 텃밭은 남편에게 맡겼다. 각시 없는 텃밭 일은 재미가 없다고 결국 6월 감자알 수확만 하고 여름, 가을을 보냈다.

해마다 자원봉사센터에서 4000여 포기의 김장을 해서 독거노인과 저소득층 주민들에게 나눈다. 그 어마어마한 배추를 어떻게 다 할까 궁금해서 처음 김장 봉사 현장에 갔다. 두 번째 김장 담그기 봉사 현장에는 700포기의 배추들이 있었다. 몇 해 전만 해도 생배추를 뽑아다 절여서 물빼기까지 다 직접 했는데, 요즘은 봉사하시는 분들도 고령화로 절인 배추를 공수받았다고 했다.

봉사자 30여 명이 빨간 장갑과 앞치마를 두르고 각자의 자리에 섰다. 워낙 요리에는 한 가닥 하는 분들이 많아서 누가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척척 움직였다. 배추 양념을 준비하는 과정에 쓰여질 육수물 내기, 찹쌀풀 끓이기, 양파와 쪽파 다듬기, 당근 썰기, 마늘 까기, 갓 썰기 등을 시작했다.

한쪽에서는 배추에 들어갈 무를 준비했다. 싱싱한 무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모님들이 무 머리를 자르는 순간 갑자기 무청으로 만드는 무시래기가 생각났다. 책방을 오시는 손님들마다 마을 이름의 말랭이가 무슨 뜻인지를 물으면서 무말랭이가 많이 나는 마을이냐고 농을 던져서 진짜 무말랭이 마을 한 번 만들어 볼까 하는 호기심이 당겼다.

"이 무청 버리시는 거예요? 저 몇 단만 주세요. 시래기 만들어볼게요."

바쁜 사람이 무슨 시래기까지 만드냐고 하시면서도, 알뜰하게 살림한다고 가지고 가서 만들어 좋으면 겨우내 최고의 반찬거리라고 하셨다. 굳이 무시래기의 영양가를 들먹이지 않아도 생선탕이나 갈치나 고등어조림에 들어가 있는 시래기가 생각났다. 또 감자탕 등뼈 국물에 풀어지는 시래기의 쫄깃거림에 절로 침이 고였다.

명태머리와 대파, 무를 넣고 끓여서 나온 걸죽한 육수를 식히는 동안 봉사단 회장은 봉사자들을 위해 점심을 직접 준비했다. 어디 가서나 먹는 것이 최고라며, 맛나게 먹어야 봉사도 재밌다며 늘 봉사자들을 위한 식사를 만들어 온다. 어느 비싼 뷔페 집에서나 나올 만한 낚지볶음, 게장무침, 장어구이를 비롯한 밥상이 펼쳐지니 사람들이 오전내 수고했던 주름이 펴졌다.
 
무시래기가 걸린 책방은 가을속에 깊이 빠졌다
▲ 책방난간에 걸린 무시래기 무시래기가 걸린 책방은 가을속에 깊이 빠졌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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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념준비가 끝나고, 실어온 배추는 물을 빼야 한다며 반나절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 나는 무청을 가지고 말랭이 마을로 들어섰다. 막상 가져왔지만 작은 책방에서 어느 세월에 삶을 것인가 걱정되었다. 마을의 대소사를 거둬주는 한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니, 저 책방 작가예요. 무청을 가져왔는데, 경로당 식당에서 삶을 수 있을까요?"
"그거 어디서 났어요? 일단 우리집으로 가져와봐요. 내가 금방 삶아줄텡게."


이렇게 싱싱한 무청을 어디서 났냐고 '욕심도 많네 우리 작가님'이라며 무청을 들고 당신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노란잎 하나 없응게 그대로 씻어서 삶아놓겠다"라며 책방 가서 문 열고 관광객들 오면 마을 홍보나 잘해달라고 하셨다. 염치없지만 부탁을 드리고 책방으로 올라갔다.

서너 시간쯤 지났을까. 어머니께서 전화를 주었다. 무청 다 삶았다고 가져가서 책방난간에 걸면 된다고 해서 후다닥 내려갔다. 싱싱한 초록잎 무청이 소쿠리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초록색이 진해지도록 소금을 넣어 삶았다고 이제 잘 마르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다. 말랭이는 햇빛과 바람이 자유로우니 요즘 같은 날엔 배추 우거지나 무시래기 말리기 딱 좋은 때라고 하셨다.
 
말랭이마을의 햇빛과 바람을 맞은 무청은 가을색 시래기로 변신했다
▲ 푸른무청이 갈색무시래기로 변신 말랭이마을의 햇빛과 바람을 맞은 무청은 가을색 시래기로 변신했다
ⓒ 박향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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챙겨주신 삶은 무청을 책방으로 가져왔다. 난간 어디에 어떻게 널어야 좋은지 이쪽저쪽 방향을 살폈다. 혹시 널어놓은 무청이 날아갈 것을 대비해서 노끈으로 동여맬 생각까지 하면서 정성을 들여 무청을 잘 널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책방 앞 난간의 길이가 길어서 가져온 무청을 다 널 수 있었다. 물기를 쭉 짜서 한 가닥씩 난간에 걸쳐보니 정말 말랭이마을에 제격이었다. 다 널고 나서 지인들에게 사진으로 보내니 모두 대단하다고 한 마디씩 올렸다.

지난 며칠 동안 책방의 무시래기는 관광객들에게 진짜 광경이 되었다. 보는 사람마다 다시 또 말을 걸었다. '여기 진짜 무말랭이 마을이에요?'라고. 오늘은 모 영화를 찍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책방을 한 컷 찍겠다고 했다.

주인공이 책방 주변을 둘러보는 장면이었는데, 갑자기 감독이란 사람이 무시래기를 보더니 진짜 마을의 모습이 여기 있다며 열심히 카메라를 돌렸다. 뒷켠에 서 있던 책방지기인 나도 역시 갑자기 영화 속 마을 사람이 되어서 환상 속에 빠졌다.

주말이라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늘었다. 마을 아래 양조장에서는 어머니들이 파전을 부쳐서 관광객들에게 한 점씩 드셔보라고 인심을 베푸는 날이다. 부침 한 장의 인심을 얻고 책방까지 올라온 사람들은 한결같이 책방 앞에 놓인 무시래기를 만져보며 마을의 소담스럽고 정겨운 풍경에 빠졌다.

"정말 군산 아름답네요. 근대역사거리에 있는 가옥들만 보고 가려다 화살표 따라 올라왔는데, 이곳을 안 보고 갔더라면 정말 후회했을 것 같아요. 이거 무말랭이 맞죠?"

수원에서 왔다는 아름다운 청춘 두 연인이 말했다. 마을 이야기와 말랭이의 뜻도 듣고 이야기마당에 전시된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정말 감동적인 삶이네요'라고 말하는 젊은 청춘들의 따뜻한 마음에 오히려 고마웠다. 다시 또 온다는 손가락 약속을 걸고 그들을 배웅하며 돌아오면서 다시금 우리 마을과 사람들을 생각했다.

'아!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분명 인연이었어.' 눈 덮인 추운 겨울날, 잘 말린 무시래기를 넣고 끓인 뜨끈뜨끈한 생선탕이나 감자탕을 끓여 어른들께 대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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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과 희망은 어디에서 올까요. 무지개 너머에서 올까요. 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임을 알아요. 그것도 바로 내 안에. 내 몸과 오감이 부딪히는 곳곳에 있어요. 비록 여리더라도 한줄기 햇빛이 있는 곳. 작지만 정의의 씨앗이 움트기 하는 곳. 언제라도 부당함을 소리칠 수 있는 곳. 그곳에서 일상이 주는 행복과 희망 얘기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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