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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길(작가, 지역사연구가, 울산민예총 감사)

신고송의 결혼

1927년은 신고송의 아동문학 활동과 삶의 전환점이었다. 1925년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이 1927년 계급투쟁을 목적으로 '방향 전환'을 했기 때문이다. 1929년 후반에 접어들면서 신고송은 동시, 동화, 아동극, 평론 등 다양한 아동문학의 폭을 넓혀간다. 하지만 그가 본격적인 계급주의 노선에 충실한 시기는 일본유학 이후이다.

당시 신문과 잡지는 일본말 위주의 교육을 받던 아이들에게는 조선어로 읽을 수 있고 발표할 수 있는 매체였다. 잡지는 조선어였고, 신문은 국한문 혼용이라 저학년은 잡지를, 고학년은 신문을 읽었다. 1930년 전후로 정인섭은 일본에서, 신고송은 국내에서 활동함으로 그들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인식은 달랐을 수 있고, 그것이 삶의 방향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1920년대 그들의 소년문화운동의 바탕에는 다른 아동문학가와 마찬가지로 천사 동심주의가 있었다.

1930년 4월 9일 신고송은 언양공보 교사로 재직 중이던 김두이와 결혼을 한다. 교편을 잡고 있던 그는 10월에 휴직을 하고 언양에 돌아와 있었다. 그 후 대구에서 <가두극장(街頭劇塲)>을 창립하여, 무산계급을 위한 맑스주의적 기치 아래에 전무산계급을 위한 연극운동으로서 노동자 농민의 집합체와 연락하고 전국즉으로 연극운동을 통일 규합하려 하였다. 또 그는 12월 소년잡지 <무산소년(無產少年)> 창간호를 준비하였다. 종래의 잡지와 같이 문예에만 치중하지 않고 사회문제, 국제문제,국제정세, 과학지식, 음악 미술 문예 일반 등 현실문제를 평이하게 취급하여 순전히 노동자 농민의 아들딸들의 교양을 목적으로 한 프롤레타리나 소년잡지였다. 집필자는 신고송을 비롯하여 송영, 이기영, 박영희, 권환, 양우정, 윤기승, 박세영, 김병호, 손풍산, 이구월, 엄흥섭, 이주홍 등으로 당시 프로문학운동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신고송은 사회주의 혁명 기념을 준비하다가 12월 10일 울산경찰서 고등계 형사에게 체포되어 한 달 동안 구금을 당하였다. 훗날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당당히 강령으로 내걸기는 했으나 공연 한 번 못하고 유치장 구경만 하게 되었다."라고 회고했다. 그 후 임신한 아내를 두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렇게 해서 그의 대구시절은 끝났다. 대구시절은 그가 계급의식을 자각하는 시절이었다. 유학시절인 1930년대부터 신고송의 카프 예술인으로, 계급주의 문학운동에 전면적인 활동을 한다.

1930년 5월 또다른 결혼식이 있었다. 1930년 5월 20일 오후 1시, 울산청년동맹회관에서 언양의 청년운동, 농민운동을 하던 사회운동가 신학업(신주극)과 김수봉의 결혼식이 있었다. 식장에 경성 신간회 본부에서 온 박문희가 내빈을 대표하여 축사를 하였다. 경찰은 이것이 불온하다하여 박문희를 일주일동안 구류처분하였다. 학성공원 산정(山亭)에서 결혼 피로연에 참석한 40여 명의 동지들이 이 소식을 듣고 극도로 분개하여 경찰서에 몰려가 항의를 하였다. 고등계 주임 경찰은 구류가 아니라 검속이라 변명하였다. 다음 날 아침 청년동맹 대표가 찾아가니 구류처분이 옳다며 불복하려고 해도 이미 결정되었기에 번복이 안 된다고 하였다. 경찰의 고압적 태도와 경찰서 내의 의견 불일치를 사람들은 비난하였다.

박문희(1901~1950?)는 부산출신 여성독립운동가이다. 1929년 신간회중앙본부 간부로 광주학생운동을 지원하고 전국적으로 확신시키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바로 이런 상황에 울산을 방문하였으니 결혼식 축사 내용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외5촌 당숙이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김두봉이고, 그녀의 여동생이 의열단장 김원봉과 결혼한 박차정이다.

천재동요시인, 서덕출

『어린이』의 애독자였던 서덕출(1907~1940)은 1925년 『어린이』 4월호에 「봄편지」가 당선되었다.

연못가에 새로핀/ 버들이플 따서요/ 우표한장 부처서/ 강남으로 보내면/ 작년에 갓던 제비가/ 푸른 편지 보구요/ 조선봄이 그리워/ 다시 차저 옵니다

이재철은 <세계아동문학사전>에서 이 작품에 대해 "나라를 잃은 일제 하의 많은 어린이와 어른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 넣어준 시로, 그 꿈이 제비를 통한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주로 어린이들의 노래로 창가가 있을 뿐이었던 당시 이 작품은 예술성이 짙은 동요로서 선구적인 의의를 지녔으며 모두에게 커다란 감흥을 주었다."라고 하였다. 또 당시 문단의 주조였던 애상적 정서에서 벗어나, 창가의 7·5조 운율을 극복한 참신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이 작품으로 서덕출은 일약 동요문학의 스타가 되었고 '봄편지의 시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봄편지 동요는 당시 북간도에 있던 윤극영에 의해 1946년 <어린이> 4월호 목차 다음 쪽에에 노래 게재되어 불리고, 홍난파도 이 명시를 노랫말로 하여 곡을 지었다.

1926년 『어린이』 10월호에 「천재 어린이 예술가 두 분」이 실렸다. 두 소년은 윤석중과 안병소였다. 16세의 윤석중이 조선물산장려회 주최로 열린 「물산 장려가」 모집에 1등 당선을 한 내용과 서예가 안중식의 아들로 한쪽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었으나 독일인 음악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워 개인 연주회를 열었던 14살의 양정고보 안병소의 이야기였다. 이 글을 읽은 서덕출은 1946년 『어린이』 11월호에 「안병소에게」란 글을 투고하였다.

"남보다 뛰어나는 천재(天才)를 가지고도, 한 다리 쓰지 못하여 병신생활을 하여 온 당신에게는 남모르는 눈물의 날이 만헛슬 것을 나는 압니다."라면 장애인으로서 슬픔과 고난에 대한 동료애를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적었다. "냇가 역시 왼편다리를 쓰지 못하는 불구의 소년입니다. 어릴 적이엇슴니다. 우연한 병으로 알기 시작한 것이 일생의 불행이 되야 종시 고치지 못하고 병신이 된 그대로 울면서 죽지 아니하고 이날까지 살아왓습니다. 나르는 새와갓치 춤추는 나비와 갓치 씩씩하게 쾌활하게 커가야 할 어린 세월을 병신된 설음으로 방구석에만 응달진 곳에서만 외롭게 자라는 소년의 마음을 얼마나 쓰쓸하다면 좃켓슴닛가? 얼마나 애달프다면 좃켓슴니가…"

서덕출은 1907년 2월 9일 경남 울산시 중구 교동에서 아버지 서형식과 어머니 박향초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정출(正出)이고, 호적에는 덕줄(㥁茁)이다. 부친은 「시대일보」의 기자, 한시집 『일청집(日廳集)』을 낸 엘리트였다. 모친은 고성 사또의 딸이었다. 그는 5남 4녀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여섯 살이 되던 해였다. 교동에서 학산동으로 분가한 집 대청마루에서 베개를 가지고 놀다가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의 부친은 부산의 의사까지 울산으로 불러 치료에 적극적이었지만 염증이 척추까지 번져 등이 굽고 하반신이 마비되는 장애의 몸이 되었다. 결국 후천적 장애인이 되고 말았다. 정규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대신 모친에게 한글, 바느질, 수예를 배우고 부친이 구해준 문예지와 서적을 통해 그는 세상과 소통을 했다. 그 후 부친은 장애아들을 위해 복산동으로 새집을 지어 이사했다. 대지 500평의 넓은 정원과 오동나무, 버드나무가 우거지 연못이 있는 집이었다. 마당의 자연과 잡지 『어린이』를 벗 삼아 살았다.

서덕출을 방문한 동요시인들

1926년 이광수가 '아기네 노래의 찬탄할 천재'라 불린 윤석중과 함께 신고송, 서덕출 등은 '기쁨사' 동인 활동을 하며 '굴렁쇠'란 회람잡지를 만들었다. 1927년 대구에서 윤복진, 서덕출, 신고송이 참여한 문예단체 '등대사'가 만들어지고 동인지 『등대』를 발간했다.

1927년 여름날 윤석중이 서덕출을 방문하였다. 서울에서 왔지만, 척추를 다친 서덕출은 반갑게 나가 맞이할 수도 없었다. 당시 걸어 다닐 수 없는 서덕출은 자수를 놓고 있었다.

윤석중은 서덕출의 '봄편지'라는 짤막한 동요 한 편이 온 겨레의 마음을 달래주고 희망을 주는 노래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8월 7일 도착한 윤석중은 서석출의 집에 놀러와 있던 신고송과 밤새워 이야기하고 놀았다. 비 오는 날 9일 없는 돈에 여비를 마련하여 대구에서 윤복진이 왔다. 윤복진이 1920년에 발표한 "울 밑에 귀뚜라미 우는 달밤에 길 잃은 기러기 날아갑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넓은 하늘은 엄마 엄마 찾으며 흘러 갑니다…" 「기러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이다. 서울 윤석중, 대구 윤복진, 언양 신고송, 울산 서덕출, 네 사람은 이별이 아쉬워 동시 「슬픈 밤」을 공동창작하였다.

오동나무 비바람에 잎 떠는 이 밤/ 그립던 네 동무가 모였습니다/ 이 비가 개고 날이 맑으면/ 네 동무도 흩어져 떠나갑니다/ 오늘밤엔 귀뚜라미 우는 소리도/ 마디마디 비에 젖어 눈물 납니다/ 문풍지 비바람에 스치는 이 밤/ 그립던 네 동무가 모였습니다

8월 10일 아침 기념사진을 찍고 언양으로 물놀이를 갔다. 오후에 서울로 윤덕중은 떠나려 했으나 섭섭함과 아쉬움에 기차를 놓치고 다시 서덕출에게로 갔다. 이튿날 새벽차를 또 놓치고 둘째 차를 타고 서울로 갔다. 움직일 때마다 머슴의 등에 업혀야 하는 서덕출은 올 때나 갈 때나 나가 볼 수 없는 몸이었다. 서덕출은 그때 이렇게 한탄했다.

"노래를 좋아도 하고, 또 많이도 짓고도 싶지만 …… 그 넓은 하늘도 한번 시원스럽게 바라보지 못하고 이렇게 늘 방구석에만 드러누워있으니 어떻게 좋은 노래가 나오겠습니까 ……."

서덕출은 방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늘 마당을 바라보는 공간적 제약이 있었다. 윤석중은 내년 방학에 오겠다고 하였고 그 약속을 지켰다. 당시 방학이 되어 고향인 언양에 정인섭이 왔다. 정인섭은 윤석중이 서덕출의 집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울산에 왔으나 서덕출의 집을 찾지 못하자 서덕출의 동요 '봄편지'를 불렸다. 골목에 울려 퍼지는 노래 소리를 듣고 뛰어나가 맞아들였다. '봄편지'가 노래를 타고 마음의 편지 구실을 해준 것이었다.

당시 윤석중은 16살, 서덕출은 21살로 신고송, 윤복진과 동갑이었고, 정인섭보다 2살 적었다. 해방 후 훗날 윤복진과 신고송은 북행을 택하였다. 그때까지 그들은 동심주의 어린이문학 활동을 하였다. 당시 정인섭은 일본어로 우리의 민담과 전설을 수록한 『온돌야화』를 간행하였다. 이 책을 1952년 영문으로 발간했을 때 99편 중 언양이 29편, 온양 1편, 울산 1편이 소개되었다. 언양지역 채록은 그의 가족과 친지들이 많았다. 신고송은 신문에 「소년잡지 독후감」을 게재하며 본격적인 평론활동을 하였다.

1927년 10월 10일 <색동회> 주관의 첫 동요회에서 「봄편지」가 김영복의 독창으로 발표됐다. 이 때 사회를 보던 방정환이 서덕출의 장애를 소개하자 그를 격려하는 모금 운동이 벌어져,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날 모금액 3원 21전이 모여 만년필 1개를 선물로 보내기로 하였다. 이 내용이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보도되어 "불구의 서덕출 소년은 동요의 천재", "생래(生來)의 불우천재조선소년 서덕출. 애상의 동요 「봄편지」! 조선색을 실어서"로 널리 알려졌다.

다시 서덕출을 방문한 동요시인들

1928년 8월 여름방학 때 윤석중, 신고송, 서덕출은 다시 서덕출의 집에서 만났다. 신고송은 당시 대구공립보통학교 훈도였다. 그는 서덕출의 동생과 바지랑대 춤을 추고, 윤석중은 신고송의 비밀 잡기장을 읽는 등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8월 13일 아침 학성공원에 울산 명물 '호박떡'을 싸 들고 놀다 온 다음, 점심때에 다 각각 검은 테 안경을 떡 버티어 쓰고 앞뜰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울산의 명물 '호박떡'에 대해서는 지역민 중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호박을 섞어 떡으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체적으로 닫힌 상황 속에서도 자유와 희망의 열린 세상을 노래하던 그는 아까운 35세의 나이에 타계했다. 서덕출의 시는 대부분 아이의 시각에서 자연을 노래한 작품이었지만, 일제강점기와 신체장애라는 시대적·육체적 아픔을 아동문학의 성취로 이겨내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고 서덕출은 『어린이』뿐 아니라, 주요 신문사와 『신소년』, 『새벗』, 『학생』 등 여러 잡지에 동시 외에도 동화, 작문, 콩트, 편지와 같은 다양한 장르의 글을 발표했다. 서덕출은 32세가 되던 1938년 가을 무렵부터 척추의 신경통이 극심해져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 이후 눈 감을 때까지 대부분을 누워서 지냈다. 1940년 1월 12일, 그는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34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그는 비애와 애상적 정서에 머무르지 않고, 긍정적이고 밝은 정서로 삶의 의지를 다졌던 그의 시는 우리 동시문학사에 뜻깊은 자취를 남겼다.

1927년 『신소년』에 서덕출은 「씨를 리자」를 발표했다. 일제 수탈에 신음하는 식민지 조선에 씨를 뿌리자는 희망을 노래했다. 그는 장애의 애상에 머문 동요시인이 아니었다.

씨를뿌리자 씨를뿌리자/ 묵고썩은 너른터전에/ 광이로쫏고 호미로매여서/ 씨를뿌리자 저 – 넓은/ 너른터전에 가시던풀로/ 울을막아 우리의손으로/ 씨를뿌리자/ 쑥덕씨앗은다 서풍에날이고/ 싹나올씨앗만 가득히뿌리자

나아가 그는 1933년 10월 「다 같은 사람」을 통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입장에서 확연하게 계급적 인식을 드러내기도 했다. 신고송의 영향일 수도 있다.

어디 보자 너 어머니/ 다려오너라/ 너 한 찰에 내 한 찰이/ 분하단 말가/ 너에게 맞고 있을/ 내가 아니다/ 너 어머니 다려오면/ 어쩔 터이냐?// 주사댁 너 어머니/ 세도에 눌여/ 억울하게 너에게/ 마저란 말가/ 주사란 무엇인지/ 모르지만은/ 사람으론 너나 내나/ 마찬가지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삼산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 오마이뉴스에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을 연재하였다.
 

덧붙이는 글 | <울산저널>에도 게재합니다.


태그:#언양소년운동, #울산소년운동사, #언양 소년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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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울산, 양산 지역의 역사문화에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는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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