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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 소행성이 날아와 내일 지구가 멸망하게 되었다고 해도, 가족과 함께 걷는 산책은 빼먹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에게 걷기는 일상의 이동 수단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번 주말에는 강릉 남대천 억새밭을 걸었다. 코로나에 걸려 고생할 때 쿠폰으로 받은 치킨 세트를 배달시키기가 싫어서 매장까지 가서 저녁으로 먹고 오기도 했다. 소파에 누워 있다가 먹는 치킨보다, 살짝 걸은 후에 먹는 치킨이 더 맛있다.

걷지 않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걷는다. 그렇지만 나는 의식적으로 걸음을 생각하면서 산다. 하루의 걸음수가 충분하지 않으면 자기 전에라도 밤에 아파트 단지를 재빨리 돈다. 아내도 나도 휴대전화에 걸음수 체크 앱을 설치하여 매일 관리하는 중이다. 심지어 여덟 살, 여섯 살 먹은 딸들이 걸음수를 슬쩍 보고는 평가하기도 한다.

"아빠, 오늘 5000 보 밖에 안 걸었네."

아마도 만 보 걷기에 성공한 날에 서로 축하하고, 주간 걸음 수를 계산하는 모습을 보고 자란 탓이 클 것이다. 우리 집은 스마트 워치를 사용하지 않기에 휴대전화를 소지한 상태에서 걸은 경우에만 걸음수가 찍힌다. 실내에서 맨손으로 돌아다닌 걸음은 만보기 앱에 기록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의 걸음수는 작정하고 야외에서 힘차게 쌓은 숫자이기에 더 단단한 느낌이 든다. 

육아의 고민 거리가 덜어지는 취미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산책은 꿀잠과 밥 잘 먹기와 같은 육아의 실용적인 면에서 매우 좋았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산책은 꿀잠과 밥 잘 먹기와 같은 육아의 실용적인 면에서 매우 좋았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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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는 가급적 아이들을 대동해서 함께 걸으려 노력한다. 단지 운동을 시켜야겠다는 차원이라기보다, 생활 습관 갖추기와 기분 관리 면에서 걷기가 교육적으로 매우 유용하다는 사실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두 살 터울인 자매는 서로 사이가 좋은 듯하면서도, 집에 있으면 자주 투닥거린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경포 호수 한 바퀴를 돌거나, 마명산 숲을 다녀오면 잘 싸우지 않는다. 분명 한 시간 이상 걸었으므로 다리가 아플 텐데 표정이 밝다. 날카롭게 소리 지르지 않고, 사이좋게 논다. 

처음에는 그저 단풍놀이를 다녀와서 그런가 보다 했다. 그렇지만 점차 데이터가 누적되면서 아이들의 몸 건강, 마음 건강이 걷기와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이 되었다. 아토피를 앓았던 첫째는 밤에 푹 잠 못 드는 날들이 왕왕 있었다.

그런데 벚꽃길을 걷고 나면 컨디션이 개선되어 꿀잠을 잤다. 야채 편식이 있었던 둘째도 신나게 깡충깡충 뛰고 온 날에는 야채 볶음밥을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었다. 육아의 고민거리가 덜어지는 취미 생활이라니, 비싸게 모셔야 하는 '육아 돌보미 이모님'들보다 나았다.
   
온 가족이 깨끗하게 씻고 나른함에 빠져 누워 있으면 '걷기는 마법이다'라는 판단이 절로 되었다. 이것은 건강관리 지침서에서 '운동은 몸에 좋습니다'라고 적힌 문장을 읽는 것과는 전혀 다른 실질적인 깨달음이었다. 게으름을 떨쳐내고, 신발끈을 질끈 묶어, 호숫가로 당찬 발걸음을 내디뎌야만 깨우치게 되는 진리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걷기 운동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어떤 메시지가 몸에 저장된다는 느낌을 비로소 체감할 수 있었다.

아내와 나는 초등교사이므로 '걷기의 힘'을 학급에서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궁리해 보았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우리 집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장기간 걷기 실험의 효과가 매우 좋았으므로 학급 아이들과 짬을 내어 걸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이들과 잠깐 걷는다고 민원이 발생하거나, 비교육적이라 비난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으므로 용감하게 실행에 옮겨보았다. 

교실에서 실천해 본 10분 산책

마침 환경도 뒷받침해주었다. 내가 근무했던 학교의 뒤뜰은 야트막한 언덕으로 되어 있어 소나무 숲과 관목들이 오밀조밀 자라고 있었다. 짧지만 짙은 그늘을 제공해주는 단풍나무 터널도 있고, 굵은 밤송이를 떨어뜨리는 밤나무와 야생 달래가 자라는 근사한 산책로였다. 교실이 위치한 3동 건물에서 산책로까지는 스물세 명이 줄줄이 알사탕으로 천천히 걸어도 3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 사이에 경쟁 기류가 강하게 흐르거나 축 처져 수업 분위기가 나지 않는 날이면 '십 분 산책'에 나섰다. 점심시간 마지막 십 분, 아침 활동 십 분을 자주 사용했는데 아이들은 십 분을 손꼽아 기다렸다. 뒤뜰 언덕의 계단을 디디면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신비한 터널 속에 들어간 것처럼 낯선 바람이 불었다. 불과 백 미터 남짓 움직였을 뿐인데 교실과 전혀 다른 공기와 분위기에 휩싸였다.

우리 집 딸들과 천변에서 플로깅을 하듯, 학교에서는 학급의 커다란 종량제 봉투와 집게를 들고 쓰레기를 주웠다. 학교 내부에 있는 산책로라 쓰레기가 없을 것 같지만 뒤뜰 북쪽으로 여러 채의 상가 건물과 인도가 연결되어 있어 정체불명의 온갖 쓰레기가 출몰했다. 엄지 손가락 굵기의 철근부터 솔의눈 캔까지 초등학생이 버렸으리라고 추정할 수 없는 쓰레기가 유독 많았다. 나는 어린이가 생활하는 공간에 무단으로 쓰레기를 투기하는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학교 뒤뜰 언덕은 '십분 산책'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학교 뒤뜰 언덕은 '십분 산책'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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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할당량도 없는데 담배꽁초라도 눈에 띄면 "어! 저기 쓰레기!" 하면서 얼른 달려가 집게로 건져 올렸다. 땅속에 박힌 보일러 온수 파이프를 셋이서 잡아당겨 뽑기도 했다. 손이 더러워질 텐데도 아랑곳 않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 웃었다. 아이들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체육 시간보다 더 재밌어 하는 아이도 있었다. 종목에 따라 호불호가 나뉘는 체육과 달리 산책은 거부감이 거의 없었다. 

학년 말에 조사한 설문지에서 1년 중 가장 좋았던 교육 활동으로 '10분 산책'을 꼽은 친구들이 네 명이나 되어 깜짝 놀랐다. 비율로 따지면 20%에 육박하는 수치다. 정규 수업도 아니고, 학급 동아리도 아니며 그저 짬짬이 쉬엄쉬엄 걸었을 뿐이다. 오프라인보다 온라인 게임 속 캐릭터가 움직이는 걸음수가 더 많을 수 있는 세대의 아이들에게 걷기는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앞으로도 반 아이들을 데리고 조금씩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잘 걷기 위해 달라진 일상

가정과 학교에서 걷기의 위력을 맛본 나는 조금 진지하게 걷게 되었다. 패션 스타일 위주로 구입하던 신발은 어느새 쿠션과 반발력을 고려하여 전문 러닝화를 고르게 되었고, 관절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체중 조절도 하기 시작했다. 약간만 방심하면 금세 체중이 불어나는 나는 채소와 과일 섭취를 늘리고 밤에 즐기던 배달음식도 사실상 끊었다. 

걷기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걷기의 세계>, <걷는 사람, 하정우> 같은 걷기 관련 기본서와 에세이를 사서 읽기도 하였다. 저자들은 하나 같은 현대인이 걷기의 기적을 외면하는 위험천만한 삶을 살고 있다고 우려하며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걷기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나는 걷기를 예찬하는 그 문장들을 조금도 과장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해 질 녘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걷는 황금빛 산책의 따스함은 다른 방식으로는 좀처럼 얻기 힘들다. 나 같은 문과 성향의 걷기 마니아가 아니라면 과학자의 말을 참조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걷기의 세계>를 쓴 뇌과학자 셰인 오마라는 걷기를 이렇게 소개한다.
 
단지 일어나서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뇌 활동이 빈번해지고, 심장을 비롯한 각종 장기의 스트레스를 낮추고 기능을 회복하도록 도와주며, 노화가 유발하는 역기능들을 지연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분이 좋아지게 만들어 창의성을 높여준다. 

교육방송 다큐멘터리에나 나올 법한 과학자 방식의 감탄이지만, 하나하나 주옥같은 혜택이지 않은가.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이고, 저마다의 속도와 방법으로 세상을 경험하는 걷기는 인간이 태생적으로 누리는 축복이다. 혼자 걸어도 좋지만, 함께 걸으며 이야기 나누면 더 좋다.

날씨가 차가워졌으니 보온성이 뛰어난 외투를 걸쳐 입고 탁 트인 길로 나가보자. 탄력 있게 빠른 속도로 걷다 보면 어느덧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외투를 벗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겨울 바람이 차고 시린 것만은 아니라는 기쁨을 상쾌한 산책길에서 맛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태그:#산책, #걷기, #어린이, #자연, #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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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교사입니다. <선생님의 보글보글> (2021 청소년 교양도서)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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