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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후 서울 강서구 탑산초등학교에서 열린 ‘강서지역 공립 특수학교 신설 주민토론회’에서 장애인 학부모들이 무릎을 꿇고 지역 주민들에게 장애인 학교 설립을 호소하고 있다.
 5일 오후 서울 강서구 탑산초등학교에서 열린 ‘강서지역 공립 특수학교 신설 주민토론회’에서 장애인 학부모들이 무릎을 꿇고 지역 주민들에게 장애인 학교 설립을 호소하고 있다.
ⓒ 신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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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 피해자 부모님 한 분이 진상 규명을 호소하며 무릎 꿇은 사진을 보았다. 울분이 솟았다. 자식을 잃고 무엇을 잘못했다고 무릎까지 꿇어야 한단 말인가? 이 참담한 사진은 2017년 '강서구 특수학교 무릎 사건'을 퍼뜩 떠올리게 했다. 십수 명의 엄마들이 장애인 특수학교를 짓게 해달라며 토론장에서 무릎을 꿇고 호소했던 사건 말이다. 당시 이 장면은 보는 이의 마음을 무척 아리게 했다.

내가 사는 곳에 아이가 다닐 학교가 없다면, 보통 부모들은 당장 머리띠 두르고 시위하며 교육청이든, 지자체든, 정부든, 성토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당연한 권리를 어떤 부모는 무릎을 꿇고 애원해야 했다. 나는 이 괴리에 충격받았다. 평소 기득권이나 특권을 누리며 산다는 감각이 없던 내게, '내가, 내 아이가 특권을 누리고 있구나'를 깨닫던 순간이었다.

정치의 부재에서 기인한 갈등

바로 이 '무릎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학교 가는 길>로 제작되어 상영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차일피일 관람을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반갑게 책으로 만나게 되었다. 책 제목 역시 <학교 가는 길>로 다큐멘터리를 만든 김정인 감독이 발달장애인 부모 7인과 함께 썼다. 다큐멘터리의 후일담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발달장애인 부모의 육성을 들을 수 있어 귀했다.
 
책 <학교 가는 길>
 책 <학교 가는 길>
ⓒ 책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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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인 감독도 장애인 부모들의 '무릎 사건'에 감흥 받아 이들의 이야기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우선, 토론장에서 "장애인 나가란 말야"라는 말을 듣고도 뭐라도 해야 한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고 결심하고 무릎을 꿇은 장애인 부모들의 입장을 다룬다. 그리고 장애인 특수학교인 서진학교를 반대하는 주민들의 면면도 함께 담는다. 대립하는 양쪽의 의견을 담고 누구의 주장에 동의할 것인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당시 서진학교에 대한 여론은 학교 설립에 관한 청원이 10만이 훌쩍 넘을 정도로 우호적이었다. 나도 서진학교를 반대하는 주민들이 장애인을 차별한다고 느껴 청원에 참여했는데, 이후 서진학교 설립의 갈등을 심층 취재한 한겨레신문 강재훈 기자의 보도(특수학교로 돌아온 가난한 폐교 "왜 내 아이를 싫어할까")를 보고 내 생각이 왜곡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서진학교 설립의 갈등은 주민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정치의 부재에서 기인했다.

서진학교를 세우려던 자리는 폐교된 공진초등학교 터다. 서울 한복판에 초등학교가 폐교되었다니 이상하지 않은가? 이 의문은 공진초를 둘러싼 지역이 전국 최대 규모의 영구임대 아파트가 형성된 곳이라는 데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임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공진초로 다니게 된 건 당연지사, 문제는 임대 아파트 근처에 민간 아파트가 들어서고 이곳 아이들이 공진초를 다니면서 불거졌다.

민간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임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의 경제 격차를 차별하고 혐오하는 사건들이 이어 발생하기 시작한다. 갈등의 골이 깊어지던 중 공진초에서 멀지 않은 곳에 탑진초등학교가 들어선다. 민간 아파트에 살던 아이들이 대거 탑진초로 이동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 공진초의 아이들이 줄기 시작하며 폐교 얘기가 솔솔 피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공진초 근처에 새로운 민간 아파트가 세워지자, 임대 아파트 학부모들은 이곳의 아이들이 공진초로 등교하게 되면 폐교 위기를 돌파할 수 있다고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학부모들의 낙관와 달리, 민간 아파트 아이들은 모두 탑진초로 등교하게 되고 공진초는 비어갔다. 때마침 학령기 아이들의 감소로 초등학교를 축소하려던 서울 교육청은 비용 논리를 내세워 2017년 9월 폐교를 결정한다. 폐교 이후 탑진초로 전학한 공진초 아이들이 겪은 수모는 아이들과 부모들에게 큰 상흔을 남긴다. "공진초 학부모들은 국가로부터 처절하게 버림받았다는 박탈감과 이웃에게서 외면당했다는 서운함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깊은 실의에 빠져 있었다."

소외와 차별에 낙담해가던 주민들에게 공진초 폐교 자리에 국립 한방 병원을 세운다는 국회의원의 공약은 얼마나 단비 같은 소식이었겠는가. 취약계층 밀집지라는 낙인을 안고 사는 이들에게 낙후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지울 수 있는 호재가 있다면 발 벗고 나서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문제는 애초 공진초 자리에 장애인 특수학교를 지으려던 서울 교육청과 사전 의견 조율도 하지 않은 채 국립 한방 병원을 짓겠다고 설레발친 공약이 나돌면서부터다. "안 그래도 무시당하는 동네인데 왜 더 무시당하게 하냐"며 민심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무책임한 정치가 부추긴 부화뇌동으로 주민들은 장애인 특수학교 대신 국립 한방 병원을 요구하는 지역 이기주의자들로 손가락질 당했으니, 이들이 터뜨린 울분이 터무니없다고 만도 할 수 없지 않은가.

이런저런 소란과 갈등에도 서진학교는 세워졌다. 학교가 설립되는 2년여의 시간 동안 장애인 부모들은 멈춤 없이 싸워 나갔다. 토론회나 설명회에서 욕설과 비난을 듣는 것은 물론이고, 삭발과 오체투지까지 하루하루가 투쟁의 연속이었다. 비장애인 부모 누가 아이가 다닐 학교를 세워달라고 이토록 고군분투하겠는가.

장애인 가족에게 빚을 진 사회

장애인 부모들의 활약상도 눈부시고 김정인 감독의 꿋꿋한 촬영기록도 우묵하지만, 무엇보다 내 마음을 끈 건 장애인 형제자매를 둔 비장애인 언니들의 얘기였다. 장애 아이를 돌보는 데 무엇 하나 수월한 게 없어 홀로 분투하는 엄마를 보면서 자란 아이는 자기라도 엄마에게 짐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어린 나이에 일찍이 어른이 되어버렸다."

얼마 전 큰 인기를 끌었던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등장했던 다운 증후군 동생 영희와 언니 영옥의 상처를 떠올려 보자. 장애 동생을 보살피던 부모마저 세상을 떠나자 갑자기 어린아이가 장애 동생의 보호자가 되어야 했던 영옥의 곤경은 우리 사회의 무지와 무책임을 확인시키지 않았던가.

책에 등장하는 비장애인 언니들은 영옥처럼 장애 동생의 보호자가 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시절 자신이 안쓰럽다"거나 장애 "동생이 부러웠다"는 고백은 바람 몰아치는 언덕에 홀로 서있던 외로움을 애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흔들리는 시간을 통과한 이들은 놀랍게도 어느새 장애 동생 돌봄의 당사자가 되어 있었다.

이들은 동생의 장애를 취약함이 아니라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고, 생애 주기 동안 장애 동생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보살필 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들이 장애인 형제자매를 둔 비장애인 형제자매에게 한 충고가 "힘들면 힘들다고 싫으면 싫다고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하라"는 것은, 이들의 삶 역시 분투의 연속이었으며, 우리 사회가 장애인 가족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김정인 감독의 기록 중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나는 학창 시절 단 한 번도 장애인 친구를 만난 적이 없다"고 깨닫는 순간이었다. 김정인 감독은 이를 기점으로 장애를 대상화해왔던 왜곡된 관점을 탈각하고 있었다. 그는 이 아이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평생 알 수 없었던 빛나는 진실에 도달해 있었다. 책을 덮고 나면 그가 소개하는 반짝이는 장애인 친구들을 만나보고 싶어진다. 자 그럼, 이제 다큐멘터리 <학교 가는 길>을 보러 갈까?

학교 가는 길 - 서진학교, 17년의 기다림과 장애인권 이야기

김정인, 발달장애인 부모 7인 (지은이), 책폴(2022)


태그:#학교 가는 길, #장애인 특수학교, #서진학교, #무릎 사건, #장애인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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