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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두고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단지 죽음에 담대할 뿐이다. 지난 9월 25일 일요일 오전 김성동 작가가 '병속의 새'로 살다, 마침내 저 세상으로 날아갔다. 양평군 용문산 자락에서 충주시로 이사한 지 2년을 못 채우고 향년 75세로 일기를 접었다.

지난 6월 말 김성동 작가는 혼자 말기 암 판정을 받고 항암치료를 포기한 체 회오리처럼 몰아치며 살았다. 병상에서도 그는 꼿꼿하게 앉아 원고 교정을 봤다. 그가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겨야 할 세 권의 원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 시작과 끝을 마무리한 개정판 
 
 김성동 작가의 유작이 된 우의소설 '죽고 싶지 않았던 빼빼"
▲ 표지  김성동 작가의 유작이 된 우의소설 '죽고 싶지 않았던 빼빼"
ⓒ 이서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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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첫 번째 원고 <죽고 싶지 않았던 빼빼>(이서방)가 지난달 30일 출간됐다. 이 책은 동물을 의인화하여 쓴 '우의소설'이다. 김성동 작가 자신의 고향, 충남 보령 시골 아기염소 '빼빼'가 도시를 거치며 사람 세상에서 나서 죽는 동안의 이야기다.

'죽고 싶지 않았던 빼빼'는 1981년 도서출판 백제에서 같은 제목으로 정준용 선생 그림과 함께 처음 나왔다. 이후 2002년 청년사에서 역시 같은 그림으로 제목만 바꿔 <염소>로 개정판이 나왔다. 이번에 나온 '죽고 싶지 않았던 빼빼'는 완전 개정판이다.

개정판이 나온 그간의 사정은 작가가 책 뒤편에 쓴 '글지 말'(2022∙2002∙1981 각 머리말 격 글) 세 개를 읽어보면 짐작할 수 있다. 복잡하면서도 한편 아주 단순한 재미가 있는 '글지 말'이다.

개정판에서는 전작과 다른 그림을 볼 수 있다. 동양화를 전공한 박사 화가 이진하가 야심 차게 그려냈다. 또한 너무나 한국적이어서 어려운 김성동 작가의 소설 속 토속어를 현재의 규정과 맞춤으로 '우리말 풀이'를 첨가했다.

하지만 전작과 크게 다른 점은 따로 있다. 맨 뒤 '업(業)'이라는 꽤 긴 글 뭉텅이를 완전히 빼버렸다. 없애고 나니 신기하게도 어느 시간이나 세월, 어느 공간과도 상관없이 완벽한 시작과 끝이 되어 있었다.

이 책이 비유 또는 상징하는 것은 '1980년 광주'와 '인류보편은 어디로 가나?'이다. 42년이 지났지만 변한 것은 없다. 이 책을 출간한 출판사 '이서방'의 대표 이장곤 시인은 띠지에 이런 글을 남겼다. "42년 앞이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라면 지구, 사람, 훼손 0.042℃"

주인은 없지만 잔치는 연다 
 
생전 고 김성동 작가 서재에서
▲ 감성동  생전 고 김성동 작가 서재에서
ⓒ 이서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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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 작가는 원래 '잔치'를 열 계획이었다.

"이서방에서 김성동 책 세 가지를 동시에 내고 이서방이 출발하는 것도 널리 알리고, 코로나네 뭐네 코로나가 아니어도 무슨 조화인지 당최 요즘 문인 동료 선후배들이 탄회하게 만나는 자리가 없어. 그러니 이번 기회 종로 어디를 잡아놓고 문인 동료 선후배들, 기자들, 시민들 너나 할 것 없이 불러 못 한 얘기 나누고 한 잔 걸치고…… 잔치하자고."

그러나 주인공이 없어 잔치는 할 수 없다. 12월 12일 월요일, 술 마시기엔 아직 이른 오후 3시. 서울특별시청 시민청 지하 2층 워크숍룸에서 '출판기념회' 대신 '출간 기념 회의'를 한다. 잔치가 별건가? 생전 김성동 작가를 기억하는 소설가, 시인, 평론가, 화가, 출판인 무엇보다도 독자들이 모여 무대와 객석 구분 없이 출간 회의도 하고 막걸리 뒤풀이도 하면 그게 잔치다. 어차피 주인도 없으니 손님이 잔치의 주인이다.

초판 1쇄는 2000부를 찍었다. 김성동 작가와의 약속이었다. 출판사 이장곤 대표는 황망히 돌아가신 고인의 첫 책이 누가 될까 염려하며 "내 딴에는 할 수 있는 만큼 1쇄만은 최고급으로 장정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판매금의 3%를 공동기금으로 기부한다. 작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고루살이'란 평등한 삶을 듯하는 우리말로서 생전 김성동 작가는 자신의 문학을 '고루살이문학'이라 하였다. 사진은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여한 김성동작가의 뒷모습.
▲ 고루살이문학  '고루살이'란 평등한 삶을 듯하는 우리말로서 생전 김성동 작가는 자신의 문학을 '고루살이문학'이라 하였다. 사진은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여한 김성동작가의 뒷모습.
ⓒ 고석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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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 작가는 생전 '고루살이 문학'을 지향했다. '고루살이'란 '평등한 삶'이란 뜻의 우리말이다. 인민이 고루고루 잘 살길 꿈꾸며 마지막까지 써내려갔던 그의 원고는애초 3권이었다. 함께 출판하기로 했던 '국수(國手)' 직전까지를 다룬 역사인문비평서, '미륵 세상 꿈나라'와 '미륵뫼를 찾아서'도 곧 출간된다.

특히 '미륵뫼를 찾아서'는 작가의 양평 시절 친우들의 도움으로 페이스북에 연재했던 역사비평 에세이다. 이 책에는 몽양 여운형 선생이 동양 최초(?)로 원본과 거의 동시대 번역한 '공산당 선언'이 전문 수록된다.
 
김성동 작가는 충주에 내려가 '해방동모'라는 답사모임을 만들고 첫 답사지로 조선공산당 지도자 김삼룡의 생가와 활동지를 답사하였다. 충주시 엄정면 김삼룡 고향에서 임종헌(좌), 김성동 작가, 김인국 신부(우)
▲ 해방동모 답사 김성동 작가는 충주에 내려가 '해방동모'라는 답사모임을 만들고 첫 답사지로 조선공산당 지도자 김삼룡의 생가와 활동지를 답사하였다. 충주시 엄정면 김삼룡 고향에서 임종헌(좌), 김성동 작가, 김인국 신부(우)
ⓒ 고석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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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뫼는 지금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을 이른다. 남부군이 지리산에 있었다면 북부군은 용문산(미륵뫼)에 자리했다. 작가는 탈이념과 무도과도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시대의 해법을 넌지시 보여준다.

김성동 작가는 말년에 충주로 거처를 옮기고 중원지방을 샅샅이 답사했다. 반도의 중심이면서도 늘 역사적으로 소외되었던 중원지방을 '해방동모(대표 임종헌)'라는 모임을 만들어 김성동만의 방법과 시각으로 답사했다. 동모란 동무, 곧 '벗'을 말한다.

어쩌면 벗들과 해방을 꿈꾸었던 그 답사기야말로 김성동 작가가 남긴 최후의 육성이다. 그 또한 책으로 엮어져 세상에 남겨진 독자들이 시대의 화두를 풀어나가는 데 힘이 돼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난 11월 12일 양평 불암사에서 고 김성동 작가의 지인 20여명이 49제를 치렀다.
▲ 김성동 49제  지난 11월 12일 양평 불암사에서 고 김성동 작가의 지인 20여명이 49제를 치렀다.
ⓒ 고석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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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성동 작가 별세, #고 김성동 작가 유작 , #해방동모 김성동 답사기, #우의소설, #죽고 싶지 않았던 빼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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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직장은 잡지사 였으나 의도된 기사를 강요해 포기. 방송작가와 방송프로듀서를 천직으로 알다 돈 벌어보겠다고 게임 사업함. 외국에서 한국어교사를 하다 돌아와 세계시민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다문화교육 전공. 시니어와 돌봄의 사회문제에 관심 많음. 가끔 시를 쓰나 발표할 생각은 없음. 좋은 기자가 되겠다던 첫 직장에서의 꿈을 이루고 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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