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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살면서 언제가 제일 기쁘셨어요?"
"그야 당연히 우리 식구 만났을 때지."
"식구라 하면 자식들이요?"
"아니, 내 마누라."


명절에 눈길을 뚫고 설을 쇠러온 작은댁 할아버님과 나눈 대화였다. 매년 시댁에 오시는 분이셨지만 할아버님이 어떻게 살아오신 분인지는 잘 알지 못했다. 할아버님은 대화의 물꼬가 트이자 살아오신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으셨다.

할아버님처럼 우리에게는 '나만의 이야기'가 있다.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일, 후회되는 일, 가슴 저릿했던 일, 뿌듯했던 일, 죽고 싶었던 일, 다시 살아낼 용기를 얻게 된 일 등 이야기가 모여 '나'라는 한 인간의 역사와 정체성을 구성하게 된다.

소설가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다음 페이지를 어떻게 써내려가야 할지 고민하듯, 우리는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나침반 삼아 앞으로의 미래를 그려본다.

배지근하게 듣는 일 
 
정혜윤 지음, <슬픈 세상의 기쁜 말>
 정혜윤 지음, <슬픈 세상의 기쁜 말>
ⓒ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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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이자 에세이스트 정혜윤의 <슬픈 세상의 기쁜 말>은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외딴 항구의 어부, 뒤늦게 글을 깨친 할머니, 시장 야채장수 언니에서 9·11테러 생존자와 콜럼바인 총기 사건 희생자에 이르기까지, 슬픈 세상에서 건져낸 기쁜 말에 관해, 작가가 그들을 직접 만나고 대화하며 모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심장에서 나오는 진솔한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준다. 좋은 이야기는 내면 깊은 곳에 또 다른 나의 일부가 되어 나를 변화시키고, 결국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조용히 빛을 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다니며 그들의 이야기를 '배지근해지게' 듣고는, 다시 작가만의 독특한 시선과 개성으로 '정혜윤의 이야기'로 담아내고 있다.

'배지근해지다'는 말의 주인공은 제주도 서귀포시에 강장군이라 불리는 할머님이다. 남들이 글 읽는 모습을 부러워하던 할머님은 일흔 여덟의 나이로 노인 대학에 다니며 한글을 배우셨다. 글을 읽게 된 할머님은 그동안 자신이 뭘 몰라도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노인대학을 다니며 열성적으로 공부하게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 귀가 배지근해지는 게 무슨 뜻이에요?"
"어떤 말이 아주 귀에 쏘옥 들어온다는 말이야."

할머니는 우리가 나누는 대화 속에 뭔가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을 공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 믿음을 가지고 인간들끼리 나누는 '말'이라는 신비 속으로 뛰어들었고, 앞날에 죽음 말고는 기다릴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새롭게 배우고 알려고 했다. -56쪽

일흔 여덟의 나이에 언어가 주는 신비를 유영하듯, 귀가 배지근해지도록 글을 배우고 책을 읽으며 내면세계를 넓혀가던 강장군 할머님.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지 궁금해 하고 상상하듯, 앞으로 살아갈 날보다 죽음이 더 가까워진 강장군 할머님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두려움 보다는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마주하는 듯 했다. 배움을 통해 언어가 확장될 수록 할머님이 상상할 수 있는 천국의 세계 또한 넓고 풍요로워져 할머님이 행복해 하셨다는 부분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빛이 안 나도 괜찮아. 하지만 따뜻해야 해." -117쪽

또 다른 사연의 야채장수 멘토님의 말씀이다. 책장을 덮으며 가장 여운이 남는 말이었다. 현재 목표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풀이 죽어 있는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한 말인 까닭이다. 어떤 상황이든 중요한건 삶의 온기를 잃지 않는 태도이다.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말은 무엇인가요?' 삶을 살아가며 꼭 필요한 좋은 화두를 주는 이 책을 함께 나누고 싶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 '느리게 걷는 여자' 게재


슬픈 세상의 기쁜 말 (리커버 에디션) -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말은 무엇입니까

정혜윤 (지은이), 위고(2021)


태그:#정혜윤, #슬픈세상의기쁜말, #정혜윤PD, #나의이야기, #나의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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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강물처럼~! 글과 사람과 삶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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