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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말부터 영 케어러(Young carer, 가족돌봄청(소)년)라는 말이 사람들 입을 오르내렸습니다. 대구 수성구에서 병든 아버지를 돌보던 아들이 간병에 지쳐 아버지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찾아보니 이 청년은 결국 대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고 합니다). 이 사건 이후로 정부는 다양한 대책을 내놓았고, 지방자치단체들도 조례 제정과 특별사업을 통해 대응해왔으며, 국회에서는 특별법 제정을 위한 움직임을 보여 왔습니다.

저는 작년 2022년 후반부에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연구용역을 받아 가족돌봄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를 수행했는데요. 그 연구를 수행하면서 우리 사회가 놓치고 있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지점을 발견했습니다. 이 기사에서는 그 지점들에 대해 다루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영 케어러'를 사용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영어 표현인 이 개념을 번역하고 한자와 한글로 옮긴 가족돌봄청소년이나 가족돌봄청년이라는 말이 현상 전체를 포괄하는데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이 기사가 제기하는 문제들 중 하나입니다.

우선 영 케어러란 "가족 구성원이 질병이나 신체장애, 정신장애, 알코올 중독 등의 문제를 갖고 있을 때 그들을 직접 돌보는 사람"을 말하는데, 여기에서 돌보는 사람의 연령이 실제로는 초등학생인 10대부터 30대 중반의 청년까지 매우 다양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열 살 초등학생이나 서른 네 살의 청년도 영어에서는 Young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리거나 젊다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초등학생 아동도 이 집단에 포함되는데 이들을 청소년이나 청년이라고 부르는 것도 적절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일단 영 케어러나 가족돌봄청(소)년이라는 말을 떠올렸을 때, 그들이 20대 청년이거나 고등학생 정도는 되는 청소년일 거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위에서 언급한 연구를 통해 만난 한 영 케어러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병든 엄마를 간병하기 시작했다고 진술했습니다. 또한 여러 기관이 발표한 자료들을 보면 부모나 조부모, 형제를 돌보고 있는 초등학생 아동의 수와 비율이 적지 않은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참 돌봄을 받고 있어야 할 나이에 사망, 질병, 장애, 중독 등으로 인해 무기력한 상태에 있는 부모를 돌보는 아동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또한 부모가 떠난 자리를 제법 잘 메워 주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치매 등 노인성 질환으로 당신의 몸도 제대로 건사하기 어려운 75세 이상의 연령이 되면 때마침 사춘기의 절정에 접어든 청소년들의 힘겨움과 혼란스러움이 어느 정도일지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습니다.

위 연구에서는 그래도 중학교까지는 이 아동, 청소년들이 같은 반 친구들과 큰 차이를 느끼지 않으면서 지낼 수 있었던 반면에, 고등학교부터는 경로부터 크게 달라지기 시작한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부모가 없거나 청소년기 이후 부모의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이들은 일반고보다는 특성화고를 선택하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학습 환경이 적절하지 않았던 것도 한 몫을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까지 갈 수 있을지, 그 뒤에 취업이나 할 수 있을지 걱정하면서 차라리 특성화고를 나와서 빨리 돈을 벌자고 생각하는 아이들의 비율이 높은 것입니다.

돌봐야 하는 가족 구성원의 상태가 더 나쁘다면 아예 그런 생각도 갖지 못합니다. 일단 상황이 달라질 때까지 버텨보자는 생각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어찌어찌 대학에 입학했어도 가족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대학 생활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이도 있고, 중고등학교와 대학교,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언제 집에서 연락이 올지 몰라 비상대기 상태에 있던 이들도 많습니다.

이 기사에서는 쟁점 몇 가지를 다루려고 합니다. 하나는 '아동, 청소년에게 가족을 돌보는 역할을 떠넘기고 있는 우리 사회의 무책임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위 연구가 끝나가는 시점까지도 생각을 못하고 있었는데, 끝날 때쯤 생각해 보니 이 현상이 오래 전에 존재했던 '소년소녀가장'과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20년도 넘은 일이니까 아마 30대 후반은 되었어야 알만하고, 40대 이상의 독자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 기억하고 계실 듯합니다. 2000년 이전에 '소년소녀가장' 제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같이 살고 있는 한쪽 부모가 질병이나 장애 등으로 부모 역할을 못할 경우, 양쪽 부모가 있더라도 둘 다 역할을 못할 경우, 부모 모두 자녀를 두고 떠나서 조부모나 친척 어른이 돌보다가 그 어른들이 늙거나 병들면서 청소년기 아이가 '가장' 노릇을 하게 된 경우 그 아이를 중심으로 가족을 부양하게 만든 제도죠.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아동, 청소년에게 '가장' 역할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대책을 강구하다가 2003년부터 가정위탁제도를 시작하면서 그 제도로 흡수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 조부모와 친인척, 일반 가정이 부모가 없거나 부모가 돌보지 못하게 된 아동을 돌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잊혀 가던, 그래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소년소녀가장'이 실제로는 다양한 형태로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아동복지 전공자로서 깊이 반성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제도가 만들어지면, 그 이전에 어려움을 겪던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도움과 지원을 받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면서 점차 사라질 거라는 순진한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일본과 서구에서 수행된 연구들을 보면, 대략 아동, 청소년 인구의 적어도 5% 이상이 영 케어러에 해당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계산하면, 우리나라에도 20만 명 이상의 영 케어러가 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교실 정원이 대략 25명 정도니까 한 반에 1~2명은 있다는 것이고, 저소득층 밀집지역에는 더 많을 것입니다.

제가 수행한 연구를 포함하여 영 케어러에 대한 연구들을 보면, 한결같이 나오는 답변이 '주변 어른들이 가족을 돌보는 역할을 은근히 강요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효자다, 효녀다' 하면서 칭찬해 주는 것으로 계속 그 역할을 맡게 한다고도 했습니다. 조부모든 친인척이든, 이웃 어른들이든 자신이 그 역할을 분담하거나 대책을 같이 마련하거나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가끔 용돈을 쥐어주면서 어린 아이에게 '가족이니까 당연히' 부모를, 조부모를 돌봐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연구에 참여한 영 케어러들은 이런 생각부터 빨리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논의할 쟁점은 '가족돌봄청(소)년 지원을 위한 특별법 제정'입니다. 지금도 국회에서는 이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으며, 정부도 더 강화된 정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당장 영 케어러들을 곤경에서 구해내기 위해 이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찬성하였습니다. 더 빠른 방법은 실제로 영 케어러들을 직접 지원할 수 있는 지방자치단체들이 자치 조례를 제정하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당장 필요해 보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영 케어러의 개념을 정의하고 그들을 위해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어쩌면 '소년소녀가장' 제도처럼 한국 사회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현상을 '그럴 수 있는' 현상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갖고 있습니다. 즉 소년소녀가장 제도가 공식적으로 아동, 청소년들에게 가장의 지위를 부여했던 것처럼, 가족돌봄청(소)년 지원제도가 공식적으로 아동, 청소년들에게 가족을 돌보는 역할을 부여하게 될까봐 걱정됩니다.

지금 초등학교 5학년인 아이가 부모가 이혼하고 엄마만 남은 한부모 가정에서 3학년 동생과 살고 있었는데, 그 엄마가 중대질환에 걸려 고통 받다가 결국 장애를 갖게 되었고, 자녀 양육은커녕 집안일도 못하게 되었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아이가 영 케어러라면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돌아와서 집안을 정리하고, 엄마와 동생, 자신을 위해 밥을 차리고, 설거지, 청소, 빨래 등 집안일을 해야 합니다. 친구들과 놀 권리, 공부할 권리, 조용히 책을 읽을 권리를 빼앗기는 거죠.

이 아이를 위해 우리는 병든 엄마를 간병하면서 집안일을 대신해 줄 누군가를 보내줘야 하고, 숙제지도를 포함한 양육까지 책임져줘야 합니다. 그 아이가 아무 걱정 없이 학교에서 생활하고, 방과후 교실도 즐기게 해야 하며, 원하는 학원에도 보내주고, 집에 돌아와서 편안하게 저녁 먹고, 씻고, 또래들이 즐기는 여가도 공유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남의 집 일에 너무 깊이 관여하는 거 아니냐고요? 그러면 너무 많은 돈과 노력이 투입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그럴 돈이 있느냐,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고요? 그 차이가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르는 기준입니다. 국가와 사회가 개인과 가정에 대해 점점 더 많은 책임을 지는 사회, 그것이 선진국일 것입니다. 
 
불꺼진 창을 찾아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이 좋은 사회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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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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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은밀한 맥락을 찾아서, #영 케어러, #가족돌봄청년, #아동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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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 현상의 은밀한 맥락과 패턴을 탐구하는 질적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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