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런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한 지 1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일본의 경찰들은 2500여 명의 실종자들을 수색하고 있단 얘기. 수년간의 DNA감식을 끝내고, 이제야 차가운 바다에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사람이 있었다는 얘기. 그날 사라져간 이들의 존재를 공동체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인상 깊었다.

재난을 대하는 우리 세대의 바람직한 자세에 대해 생각하던 차에, 지난 1월 13일부터 19일까지 7일간, 일본 외무성 주관으로 일한문화교류기금에서 주최하는 '2022 JENESYS 한국청년방일단'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JENESYS 프로그램을 통해 대지진의 피재지를 시찰할 기회를 얻었다. 

그들 앞에 닥쳤던 미증유의 재해를 일본은 어떻게 인식하고 기억하고 있을까. 또 원인은 다르지만, 서로가 겪은 재해의 아픔에서 아직까지도 벗어나지 못한 한일 양국이 공유하고 연대할 수 있는 지점이 없을까 궁금했다.

금고 안에서 발견한 희망

피재지(被災地) 시찰은 미야기현(宮城県)의 이시노마키시(石巻市)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이시노마키시는 미야기현에서도 가장 큰 인적피해를 입은 지역으로, 보고된 사망자와 실종자의 수는 약 4000명에 달한다. 

시찰은 대지진 당시의 모습이 보존된 건물, 또는 관련 기록이 정리된 박물관을 둘러보는 필드워크로 진행됐다. 답사에는 '카타리베(語り部)'라고 하는 가이드 봉사자가 동행했는데, 이들 모두가 2011년 대지진의 참상을 직접 경험했으며, 또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날의 잔상에서 자유롭지 못할 당시 주민들이었다. 

이들 카타리베는 참사의 흔적이 역력한 장소 곳곳으로 인원들을 안내하며 자신들의 기억을 공유했다. 우리를 안내해준 젊은 남성 카타리베 카토(加藤)씨는 당시 카도와키소학교(門脇小学校)의 학생으로, 하교를 목전에 두고 덮쳐 온 쓰나미에 삶의 터전을 잃었다. 다행히 그 시각 학교에 있던 224명의 학생은 평소 훈련했던 것처럼 교정 밖 뒷산으로 대피해 전원 살아남았지만, 이미 하교한 후였던 일곱 명의 목숨은 구하지 못했다.
 
카도와키소학교의 정면 모습이다. 건물 전체가 화재로 탄 흔적이 역력하다.
▲ 카도와키소학교 카도와키소학교의 정면 모습이다. 건물 전체가 화재로 탄 흔적이 역력하다.
ⓒ 박진웅

관련사진보기

 
"이곳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워지는 사람들이 있어, 한동안 가림막으로 가려져 있었어요. 이렇게 일반에 공개된 것은 불과 1년도 안 된 일이네요."

학교로부터 해안선까지의 거리는 약 800m. 파도가 직격한 건 교사(校舍) 1층 높이인 1.8m였지만, 두려워해야 했던 것은 물뿐만이 아니었다. 침수된 주택과 차량이 바닷물을 타고 이동하는 과정에서 LPG통이나 전기배선 등이 산기슭에 쓸리거나 건물에 부딪히며 화재가 발생했다. 실제로 일본화재학회의 2014년 조사에 따르면, 동일본대지진 당시 보고된 화재 371건 가운데 159건(42.90%)이 쓰나미에 의한 것이었다. 카도와키소학교 또한 쓰나미가 몰고 온 인화물질이 발화해 화마에 삼켜졌다. 

카도와키소학교 일대는 재해의 상흔이 역력한 폐허였다. 그렇지만 학교는 검게 타들어 간 채 의연하게 서서, 그날의 진상을 몸소 증명하고 있었다. 건물 안으로 진입할 순 없었지만 제법 가까이서 내부를 들여다볼 기회가 주어졌다. 나무 부분이 모두 타버리고 골조만이 남은 책상과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천장과 벽면에 덕지덕지 붙은 그을음과 원형을 상실한 채 아무렇게 방치된 가재들에서, 복도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던 그날의 악몽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지진은 졸업식을 불과 1주일 앞두고 닥쳐왔다. 졸업식 준비를 위해 천장에 매달아 놓은 종이장식들이 검댕이 돼 늘어져 있는 것을 보니, 자연의 무심함에 깊은 허탈감이 밀려왔다. 1층 끝에 자리한 교장실도 불길에 전소했지만, 안에 있던 견고한 내화(耐火) 금고만은 멀쩡했다고 한다.

"금고 속에는, 기적적이게도 6학년 학생들의 졸업증서가 들어있었어요. 험하고 가혹한 자연 앞에서 모두가 좌절하던 가운데,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살 수 있었다
 
오카와소학교 정문의 모습이다. 쓰나미가 덮쳐와 벽이 파괴되어 내부 모습이 훤히 보인다.
▲ 오카와소학교 오카와소학교 정문의 모습이다. 쓰나미가 덮쳐와 벽이 파괴되어 내부 모습이 훤히 보인다.
ⓒ 박진웅

관련사진보기

 
이시노마키에서의 다음 시찰 장소는 오카와소학교(大川小学校)였다. 전일 방문했던 카도와키소학교는 전원이 대피에 성공한 사례였지만, 오카와소학교는 재학생 108명 중 74명이 사망하고 4명이 실종됐고, 인솔교사 10명도 목숨을 잃는 비극에 직면했다. 당일 결석했거나 일찍이 귀가한 학생들을 제외하고, 학교에서 쓰나미와 조우하고 생존한 학생은 단 4명뿐이었다. '토호쿠 비극'의 상징과도 같은 이곳의 답사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힌 위령비 앞에서의 묵도(默禱)로 시작됐다.

오카와소학교는 바다로부터 약 4km 떨어진 신키타카미강(北上川)의 상류와 인접해있다. 모든 생(生)의 흔적이 지워진 황량한 교정의 터를, 거대한 강이 소리 없이 감싸고 흐르는 광경이 퍽 을씨년스러웠다. 교사는 벽과 일부 천장이 뜯겨져나가, 교실 안에 서 있는 칠판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분명 아이들의 생기가 넘치고 있었을 교정은 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요하게 잠들어 있었고, 무성한 잡초와 이끼 탓에 비가 내리지도 않았는데도 발걸음이 축축했다. 오카와소학교의 시간은 쓰나미가 몰아닥쳤던 3시 37분을 가리킨 채, 십수 년째 정지돼 있다. 
 
오카와소학교 옆에 있는 '오카와진재 전승관'에 전시된 동일본대지진 당시의 시계이다. 쓰나미가 교정에 몰려왔던 3시 37분에 멈춰있다.
▲ 오카와소학교 시계 오카와소학교 옆에 있는 '오카와진재 전승관'에 전시된 동일본대지진 당시의 시계이다. 쓰나미가 교정에 몰려왔던 3시 37분에 멈춰있다.
ⓒ 박진웅

관련사진보기

 
"놀라운 것은, 충분히 모두 살 수 있었다는 겁니다. 경보가 울린 후부터 쓰나미가 덮치기까지, 대피할 수 있는 51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카타리베 스즈키(鈴木)씨의 목소리에 돌연 힘이 실렸고, 공기가 일순 무거워졌다. 실제로 오카와소학교의 맞은편에는, 육안으로도 수백 명이 너끈히 대피할 수 있을 만한 규모의 언덕이 있었다. 당시 쓰나미 도달점의 높이인 8.6m 위에, 절벽의 보강용으로 건설해놓은 평평한 콘크리트 지대가 보였다. 더욱이 그곳은 학생들이 여름엔 버섯을 채집하고, 겨울엔 썰매를 타기 위해 찾던 낯익은 곳이었다.

마을 전체에 대피경보가 울리고 여진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학생들은 교사들의 지시에 따라 교정에 머물며 공포에 떨었다. "여기 있으면 모두 죽어버린다고, 빨리 산으로 가야한다고 울며 호소했던 아이들이 있었지만 모두 묵살됐어요. 밖으로 도망가는 아이들에게 오히려 '돌아와!'라고 소리치며 학교에 붙잡아뒀다지요." 쓰나미는 야속하게도 신키타카미 대교 부근의 제방을 넘어 일대를 급습해, 모든 것을 삼켰다. 
 
오카와소학교 뒷산에 올라 바라본 오카와소학교의 전경이다. 체육관과 교실을 잇는 연결복도가 무너진 것이 눈에 띈다. 3월 11일 그 날 아이들은 이 경치를 보지 못했다.
▲ 오카와소학교 전경 오카와소학교 뒷산에 올라 바라본 오카와소학교의 전경이다. 체육관과 교실을 잇는 연결복도가 무너진 것이 눈에 띈다. 3월 11일 그 날 아이들은 이 경치를 보지 못했다.
ⓒ 박진웅

관련사진보기

 
진실을 위한 움직임

왜 아이들은 학교에서 힘없이 죽어갈 수밖에 없었는가. 의문을 밝히기 위해 유족들 스스로가 나섰다. 유족들은 2014년 3월 현과 시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그날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사건의 경위가 드러났다. 즉각적 피난 조치를 등한시하고 교정에 아이들을 앉혀놓은 채 무의미하게 시간을 허비했던 교직원의 과실이 드러났다. 안전을 총괄하고 책임져야 했던 교장은 자녀의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후에 부재하는 등 지휘체계의 허술함도 밝혀졌다.

사법부는 학교 측에 아동의 안전확보를 위한 일반인보다 높은 수준의 방재 지식과 경험이 요구됨을 지적하고, 그들이 평시 위기관리매뉴얼을 개정해야 하는 의무에 태만했다는 점 등을 들어 유족의 손을 들어줬다. 일본에서 사전방재의 과실로 배상책임을 인정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이는 교육현장과 지자체에 큰 파장을 남겼다. 2019년 10월 최고재판소가 시와 현의 상고를 기각하는 것으로, 장장 5년간의 소송이 막을 내렸다.

"진실이 애매한 채로 남아있으면, 미래에 무엇을 남길 것이며,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도 애매해질 뿐입니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 남았지만, '생명을 떠맡은 어른들의 책임이 무겁다'는 메시지가 남아 다행입니다."

어린 목숨이 스러져간 비극적인 공간을 굳이 남겨야 하는가에 대한 갑론을박도 있었다. 2015년 이시노마키시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오카와소학교를 보존하는 것에 대한 '의향조사'를 실시했다. 과반의 시민들이 해체를 원한다고 답했지만(54%), 시는 참사의 교훈을 후대에 전승하고자 하는 유족들과 학교 졸업생의 뜻을 받아들여 보존을 결정했다.

"여기 보이는 장소는 결코 유족들만을 위한 게 아닌, 먼 미래의 사람들을 위해 남겨 놓은 거예요."

스즈키씨가 그때를 회상했다. 가메야마 히로시(亀山紘) 전 이시노마키 시장은 "지진에 대한 반성, 교훈을 전하는 것이 최대 피해지로서 이시노마키시의 사명"이라 밝힌 바 있다.
 
ときに大事なことを見失い  気づけなくなることの
(때때로 소중한 것을 놓치고, 알아차리지 못하게 되는 일의)
おそろしさを知ってほしいのです 
(무서움을 알아주길 바랍니다)
なぜ 一番大切なものが見えなくなるのかを考えてほしいのです
(왜 가장 소중한 것이 보이지 않게 되는지 생각해주길 바랍니다)
いのちの尊さを 誰もが理解しています
(생명의 고귀함을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平和な日常を 誰もが願っています
(평화로운 일상을 누구나 바라고 있습니다)
話しあうこと 考えること ともに確かめ合うことで
(이야기나누고, 생각하고, 함께 확인하는 것으로)
きっと あるべき未来は続いていくはずです
(분명 미래는 이어지고 있을 것입니다)

- 오카와소학교 진재유구(震災遺構)의 메시지 중

남겨야 할 것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수필 <고양이를 버리다(猫を棄てる)>에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서술한다. 승려였던 그의 아버지는 전쟁 당시 징집돼 중국 전선으로 보내졌는데, 당신이 속한 부대가 한 중국인 병사를 군도로 처형하던, 생생하고도 충격적인 광경을 어린 아들에게 담담히 털어놓은 적이 있다고 한다. 

피를 나눈 자식에게 자신의 체험을 어떻게든 전하고 남겨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하루키는 추측한다. 일본의 과거사 문제와 반전(反戰)에 대해 강한 소신을 역설해온 하루키의 사상 속에도, 그렇게 전승된 트라우마의 자취가 있을 것이다.

이어서 그는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 속에 있다"고 말한다. 아무리 개인적인 이야기라도,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 전체를 구성하는 일부분이며 우리 세대에겐 그것을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카타리베의 구술 행위는 '생존자가 보존하고 있는 기억'을 시공간을 넘어 재현하는 한편, 체험의 기억을 사회적으로 재구성하며 다음 세대에 계승한다. 죽음의 기억과 마주하는 용기가 있기에, 기억은 풍화되지 않고 역사는 이어진다. 오카와소학교의 또다른 카타리베 사토(佐藤)씨의 말이 긴 여운을 남겼다.

"재해의 경험을 갖고만 있다면 단지 싫은 기억이 될 뿐이지만,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에는 사람을 구하는 가치가 있다고 누군가 얘기해줬어요. 아픔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 생명에 대한 의미, 미래에 대한 의미를 전하고자 합니다." 

오카와소학교의 야외 무대 한 켠에는, 오래 전 학생이 그려넣은 '미래를 개척한다(未来を拓く)'는 빛바랜 글귀가 머물고 있다. 미래 세대를 위한 우리의 책임은 무엇일까. 말해야 하고, 보아야 하고, 남겨야 한다. 그 기억이 괴롭거나 불쾌하고, 잊고 싶을지라도.

*JENESYS란?
2007년부터 일본 외무성의 주관 아래 공익재단법인 일한문화교류기금이 실시하는 인적교류산업으로,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 외교에 관한 이해를 촉진하는 목적으로 아시아대양주에서 인재를 선발하고 파견하고 있다. 2023년 1월에 7일간 진행된 'JENESYS 2022'에는 총 123명의 인원이 선발돼, '방재 투어리즘'이라는 주제 아래 동일본대지진 당시 가장 큰 인적, 물적 피해를 입은 미야기현의 복구상황을 시찰하고 동세대 일본 대학생들과 교류하며 한일 양국의 우호와 이해를 도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태그:#재해, #일본, #재난, #쓰나미, #극복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