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등산로 입구부터 볼 수 있는 상고대와 눈꽃
▲ 태기산 등산로 등산로 입구부터 볼 수 있는 상고대와 눈꽃
ⓒ 이기원

관련사진보기


강원도 횡성, 평창, 홍천에 걸쳐 있는 태기산의 겨울 풍경은 시리도록 아름답다. 해발 980m 양두구미재 주차장에서 1261m 정상까지 올라가는 좌우로 펼쳐지는 새하얀 상고대와 눈부신 눈꽃 풍경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주차장에 차 세우고 정상까지 포장된 길을 따라가기 때문에 가쁜 숨 몰아쉬며 올라가는 힘든 코스는 아니다. 하지만 상고대와 눈꽃이 어우러진 겨울 절경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몰아치는 찬바람에 맞설 채비와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찬바람과 눈·서리가 만들어낸 눈부신 겨울꽃과 더불어 시리도록 파란 하늘 향해 줄지어 우뚝 선 새하얀 풍력발전기가 이국적 느낌으로 다가온다. 바람 따라 웅웅대며 돌아가는데 속도감이 느껴지진 않는다. 저렇게 천천히 돌아도 전기가 생산될까 싶지만, 까마득한 상공에서 30m 길이의 거대한 날개 셋이 회전하며 만들어내는 운동에너지가 엄청날 거란 생각도 든다.
 
파란 가을 하늘 향해 우뚝 선 새하얀 풍력 발전기
▲ 태기산 풍력발전기 파란 가을 하늘 향해 우뚝 선 새하얀 풍력 발전기
ⓒ 이기원

관련사진보기


겨울꽃, 파란 하늘, 새하얀 풍력발전기 따라 1.8km 정도 올라가면 맞은편으로 새하얀 태기산 정상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포장도로 따라 내려가서 가파른 산길로 직진하면 금방이라도 도착할 거 같지만 억센 철망이 산길을 가로막고 있다. 태기산 정상에 군부대가 있기 때문이다. 오를 수 없는 산길 대신 포장도로 따라 휘돌아 2.6km 더 가면 정상에 도착할 수 있다.

휘돌아 내려가면 다시 오르막길이 나온다. 좌우로 늘어선 겨울꽃 감상하며 사부작사부작 올라가면 알려졌던 태기분교 터가 나온다. 정확한 명칭은 둔내면 봉덕국민학교 태기분교였다. 태기산 일대에 모여 살던 화전민 아이들을 대상으로 1965년부터 1976년까지 운영되었던 태기분교는 해발 1200m 고지대에 세워졌던 '하늘 아래 첫 학교'였다.

태기산 정상이 지척인 1200m 고지에 학교가 세워질 만큼 태기산 고원지대에 많은 화전민이 모여 살았다. 농사가 주가 되던 시절, 농경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었던 일반적 사례와 달리 태기산 일대 화전민촌은 정부 주도로 만들어졌다. 1965년부터 박정희 정부는 대대적으로 화전 정리사업을 추진했다. 강원도에서 강행된 화전 정리사업의 실상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태기산 화전민촌이다.
 
해발 1200m 고원지대 남아 있는 태기분교 터, 눈 쌓인 겨울 백패킹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 태기분교 터 해발 1200m 고원지대 남아 있는 태기분교 터, 눈 쌓인 겨울 백패킹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 이기원

관련사진보기

 
강원도 일대에 흩어져있던 화전민들을 태기산 고원지대로 이주시켰다. 3년간 정부 지원을 약속을 믿고 태기산 일대로 들어온 사람들은 원시림을 벌목하고, 산을 깎아 계단식 밭을 만들며 움막에서 생활했다. 태기산 산등성이에서는 매일매일 무수한 나무가 쓰러졌고, 골짜기에서는 불기둥이 치솟았다. 불탄 자리를 개간해서 계단식 밭을 만들었다. 벌목과 개간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정부가 제공한 것은 밀가루가 전부였다.

밭을 일구고 곡식을 심어도 제대로 수확하기 힘들었다. 10월 초부터 서리가 내리는 고원지대 기후가 작물 생육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모여들었다. 해방과 분단, 6.25 전쟁으로 이어진 상황에서 생계가 막연했던 사람들에게 어린아이라도 일하면 밀가루를 받을 수 있다는 태기산 화전민촌은 동경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횡성뿐만 아니라 이웃한 평창과 홍천, 경기도 여주와 용인, 심지어 수원과 인천 등지에서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다.

밀가루 외에 화전민들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정부의 지원은 거의 없었다. 움집을 짓고 생계를 유지를 위한 노력은 화전민들의 몫이었다. 작물 생육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약초 재배 등의 돌파구를 찾았다. 산길 따라 30km 이상을 내려가야 학교가 있어 아이들을 가르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방치된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워주려는 노력은 정부도 교육청도 아닌 이명순이란 개인이었다. 태기산 화전민촌 아이들을 모아 한글과 산수를 가르치던 이명순 선생님이 횡성 교육장을 만나고 강원도지사를 만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해서 국제 구호단체의 지원을 받아 학교 건물을 세울 수 있었다.

해발 1200m에 세워진 '하늘 아래 첫 학교'는 1965년 횡성군 갑천면 봉덕초등학교 태기분실로 문을 열었다가 1973년 행정구역 변경으로 둔내면 덕성초등학교 태기분교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3년 뒤인 1976년 태기분교는 문을 닫았다.

박정희 정부는 1972년부터 태기리 주민들에게 40만 원 이주 지원금을 제안하면서 철거를 추진했다. 1960년대 화전 정리사업의 명목으로 박정희 정부는 태기산 화전민촌을 건설해 강원도 일대 화전민을 모아 정착시켰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가까스로 정착해오던 태기산 화전민촌은 1970년대 급격히 쇠락했다. 화전 금지를 앞세운 정부가 태기산 화전민의 이주를 강력히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화전민의 인적이 사라진 태기산은 최근 눈꽃산행과 백패킹의 성지로 알려지면서 등산객과 백패커들이 즐겨 찾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눈꽃 세상 태기산 고원지대가 화전민들의 시린 삶이 이어졌던 곳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 많지 않다.
 
태기산 등산로에서 바라본 겨울 설경
▲ 태기산 겨울 풍경 태기산 등산로에서 바라본 겨울 설경
ⓒ 이기원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페이스북


태그:#태기산 화전민의 삶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