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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들어 많은 덕담이 오간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건강하십시오" 등 의례적인 말을 매일 듣다시피 하는데 요새는 SNS로도 주고받아 상투적이고 식상할 때가 많다. 덕담은 자칫 마음의 상처를 주기도 해 자녀들에게 건넬 때는 특히 조심스럽다. 오늘도 이런저런 덕담이 있었다. 가만 지난 시간을 잠시 더듬어 본다.     

얼마 전 한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얼굴은 알지만 평소 전화를 하는 사이는 아니어서 처음엔 약간 당황했다. 요지는 간단하다. 그는 "아버님 안부를 여쭈려고 전화했는데 귀가 어두우신지 안 받아 문자만 남겨 두었다"며 대신 새해 인사를 전해 달라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 덕담에는 '정성'이 묻어 있었다.

또 어떤 분은 집으로 찾아와 아버지 안부를 묻고 올해도 건강을 빌며 정중히 인사드리고 갔다고 한다. 내 또래 연배인데 그 한 마디 하려고 집까지 직접 왔다는 얘기를 듣고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했다. 옆집 사는 아버지와 같은 90대의 6.25 참전용사는 자식이 갖다 준 코로나 감염 자가검사 키트를 몇 개 놓고 가면서 아버지 건강을 내게 특별히 당부했다.      

모두 한 동네 사는 분들인데 94세나 된 노쇠한 아버지 안부를 챙기는 걸음들이 자식 입장에서 참으로 고마웠다. 이들을 보며 새해인사도 발품과 정성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이웃들의 새해 방문은 사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분들의 새해 덕담을 내가 특히 주목하는 이유다.      

동네 노인들에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세태가 보통인데 이웃들은 덕담은 윗사람만 하는 것이라는 내 생각도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어찌 보면 가족보다 더 가까운 분들이다. 아버지도 물론 인사하러 온 이웃들에 반색했다.      
일출 장면.
 일출 장면.
ⓒ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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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에는 정월대보름까지 친척 아닌 동네 이웃 어른들에게도 찾아가 세배를 드렸다. 그걸 당연한 의례로 받아들였다. 지금도 인사드리라는 아버지 채근이 생생하다. 세배를 드리지 않거나 속여 부모님으로부터 꾸지람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요즘 동네 이웃 세배는 거의 볼 수 없다. 내 경우도 새해 덕담 문자 보내는 게 전부다. 더군다나 안부 전화를 따로 하거나 찾아가 인사드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차라리 무관심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그분들이 느꼈을 섭섭함을 생각하면 죄책감마저 든다.      

내 생각이 짧았다. 나이 들면 세상이 무심하더라도 그러려니 살라고 무심코 하는 말이 아버지에겐 상처가 되고 거슬리게 들렸을 게 틀림없다. 아버지가 방문한 이웃을 격하게 환영하는 걸 보니 아버지가 체념한 듯 못 보고 안 듣는 것 같아도 희망을 품어보고 꿈을 꾸어도 좋을 새해를 누구보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고향 친구와 동창들은 90세 이상으로 거의 돌아가셨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매우 정정한 아버지는 90세를 넘기자 기력이 떨어지고 거동이 불편해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다. 갑자기 어두워진 눈과 귀도 대화를 힘들게 한다.      

급격한 노쇠 현상에 아버지는 외부인들과 만남을 극히 자제하고 있다. 상대의 말을 놓치거나 알아듣지 못하는 실수가 두렵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바깥출입은 자연 줄고 심지어 오랫동안 이어온 모임과 행사에도 얼굴을 내밀지 않겠다고 한다.

이렇게 자신을 가두는 아버지 심경을 바라보는 가족들도 안타깝다. 그래도 새해 덕담을 앞세워 집까지 찾아주는 이웃이 있다니 아버지는 분명 행복한 분이다. 자식으로서도 흐뭇하다. 내친김에 나도 새해 소홀했던 어르신들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높은 연세에 남에게 존경받는 것은 아버지 덕도 있다. 아버지는 여태껏 누굴 비판하거나 나쁘게 말한 걸 본 적이 없다. 인생을 살면서 신세진 분들의 덕담을 내게 자주 전해주신다. 경로당에서 회원이 작고했다면 아버지는 늦게라도 고인 가족을 찾아 위로할 정도로 정이 많다.

아버지 방에서 들리는 새벽기도에 힘이 느낀다. 추운 겨울 답지 않게 포근하면 바깥 날씨를 이야기하는 모양새가 집 밖 구경을 하고 싶다는 눈치다. 고작 경로당과 병원 나들이가 외출의 전부이니 아버지는 이웃이 궁금하고 집 들른 지인들도 무척 보고 싶으셨는지 모른다.

엊그제는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는 이웃 몇 분을 모시고 동네 식당에서 오찬을 대접했다. 나는 스스럼없는 대화를 위해 잠시 자리를 피해드렸다. 오간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지만 아버지 얼굴은 시종 즐거운 모습이었다.

행복한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끼리 만난다고 한다. 행복도 전염된다는 의미이다. 행복을 건네는 아버지 지인들이 나까지 행복하게 한다. 허물리는 아버지가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친절히 찾아준 이웃들께 감사할 뿐이다.    
  
집안 분위기가 달라졌다. 해를 넘기면서 아버지가 곁에 따뜻한 이웃이 있어 덤으로 우리 집에 훈기가 돈다. 아버지 덕분에 세상 이치를 하나 더 깨쳤다. 세대 간 소통이 아쉬운 시대, 진심을 담은 새해 덕담이 모두를 즐겁고 신나게 만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게재할 예정 입니다.


태그:#새해덕담, #동네이웃, #아버지, #세배,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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