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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복 화백은 제2의 고향인 서산을 안견문화 도시로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다고 했다. 모든 경계를 허물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그이기에 믿음이 간다.
 박수복 화백은 제2의 고향인 서산을 안견문화 도시로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다고 했다. 모든 경계를 허물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그이기에 믿음이 간다.
ⓒ 방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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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야든 자신의 이름 석자를 각인시키기 위해선 고단한 과정을 거쳐야만 하고, 애석하게도 결과가 다 좋은 것도 아닌 것이 세상살이다.

25일 서산시 지곡면의 호젓한 명당자리에 위치한 해인미술관에서 만난 박수복 화백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굵직한 행사에서의 퍼포먼스와 뉴욕 타임스퀘어 전광판에 오를 정도의 유명세, 고액의 이베이 작품 등록 등 속세의 기준으로 보면 대단한 성과를 거둔 그가 '어느 정도'라는 단어를 쓴 것은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늘 새로운 것을 갈망합니다. 한 가지 소재로 50작품 이상 절대 그리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죠. 얼마나 새로운 것이냐가 성공의 기준입니다. 머릿속과 가슴에 새로운 것이 가득합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많다는 것이죠."

지금이야 웃으며 말하지만 마흔도 되기 전 그림과의 인연을 끊고, 일면식도 없던 서산에 쫓기듯 내려왔을 때만 해도 그의 삶은 고민 많은 여느 화가들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7살 꼬맹이가 어머니의 무한한 격려 덕에 '환쟁이'라는 멸시를 극복해낸 것처럼 운명은 뜻밖의 기회를 줬다며 그는 웃었다.
 
일필휘지로 모든 작품을 그려낸다는 박수복 화백은 “자신은 무척이나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창작의 고통보다 희열이 훨씬 큰 탓이다.
 일필휘지로 모든 작품을 그려낸다는 박수복 화백은 “자신은 무척이나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창작의 고통보다 희열이 훨씬 큰 탓이다.
ⓒ 방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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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생각 없이 방문한 안견기념관에서 마주한 몽유도원도(영인본)가 그렇게 날카롭게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할머니의 조상인 허련(소치) · 허건(남농) 선생이 그림을 그리라고 이끌어 주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에겐 전환점이 된 중요한 사건이었죠."

마음을 다잡고 3천 원짜리 먹을 산 그는 인적이 드문 산속에서 닥치는 대로 작품을 그렸다. 추우면 난로에 땔감으로 썼다고 하니 엄밀히 말하면 습작. 그러나 그 습작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세상과 그를 연결해 주는 작은 불씨 역할을 해줬다.

이후 그의 삶은 열정적이었다. 방송프로그램 화첩기행의 진행을 맡아 10여 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미술을 알리는 데 앞장 섰고, 장르를 초월한 실험적인 작품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통하는 화가로 성장했다.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만도 하지만 박 화백은 새해부터는 그동안 도전하지 않았던 일에 새롭게 도전해보려 한다.

한참을 세상 눈치 안 보며 자유롭게 살아온 탓에 걱정도 앞서지만 예술가로서 황금기를 가져다준 제2의 고향 서산을 위해 어색하지만 기쁜 마음으로 감투 하나를 쓴 것이다.

"안견기념사업회 이사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됐습니다. 정신적 스승인 안견 선생을 선양하는 일이니 영광이지만 고민도 큰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서산이란 땅에서 받은 축복을 조금이나 돌려줄 수 있도록."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청뉴스라인에도 실립니다.


태그:#박수복화백, #안견, #안견기념사업회, #서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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