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1.28 11:28최종 업데이트 23.02.09 09:50
  • 본문듣기

평화누리 자전거길 4코스, 농기계 우선도로. ⓒ 성낙선

 
평화누리길 3코스와 4코스 사이에 경계가 불분명하다. 이렇다 할 이정표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3코스가 끝난 지점이 어딘지 명확하지 않은 자리에서 바로 4코스가 이어진다. 공식적인 3코스 종료 지점명은 '파주출판도시휴게소'이다. 그런데 자전거길에서 휴게소가 어딘지 잘 보이지 않는다. 이 휴게소를 이용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 자전거길을 지나가면서 휴게소 없는 휴게소에서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파주출판도시휴게소는 일종의 '고속도로 휴게소'이다. 자유로를 지나가는 차들이 쉬어가는 장소를 자전거길 종료 지점으로 지정한 이유가 너무 단순하다. 자동차 휴게소이지만, 자전거라고 쉬어가지 말라는 법이 없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자전거길 한 쪽에 3코스를 거쳐 갔음을 인증해 주는 파란 박스가 세워져 있다. 그 박스가 이곳이 3코스 종료 지점임을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다. 전화박스처럼 생겼지만, 용도는 그게 아니다. 박스 안에 인증 표시를 찍을 수 있는 도장 같은 게 있다.
 

평화누리 자전거길 4코스, 5코스 안내도. ⓒ 성낙선

 
뭐, 장소와 이름이 대순가? 여하튼 자전거도로는 계속해서 4코스로 이어진다. 출판도시는 계획적인 도시답게 자전거도로로 이용되는 도로 역시 곧고 평탄한 편이다. 도로 주변의 건물들은 무척 세련된 형태로 지어졌다. 도로가에 주차한 차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는데, 아마도 출판도시로 출근하는 직장인들이 세워놓은 차들로 보인다. 출퇴근 시간이 아니어서, 도로를 지나다니는 차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출판도시를 벗어나는데 꽤 긴 시간이 흐른다. 자전거길이 도로 안쪽을 지나가는 게 아니라 도시 밖으로 나 있는 이면도로를 지나간다. 길가 풍경이 다소 단조롭다. 그래서 그런지 실제보다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진다. 출판도시를 벗어나면서 다시 시골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공릉천을 가로지르는 송촌교가 보인다. 공릉천은 양주시 사패산에서 발원해 고양시와 파주시를 거쳐 한강으로 흘러드는 국가 하천이다.
 

공릉천 하구, 송촌교 다리 난간에 걸려 있는 현수막. ⓒ 성낙선

 
송촌교 다리 난간 위로 작은 현수막 십여 개가 걸려 있는 게 눈에 띈다. 주변에 사람들도 없고 민가 하나 보이지 않는 이곳에 이 많은 현수막들이 내걸린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현수막에 시민단체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현수막에 적힌 문구들로만 봐서는 하천 정비 사업에 반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몇 년 전부터 공릉천 하구를 정비하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 사업의 일부로 제방 폭이 넓어지고, 제방 옆으로는 다시 폭 2.5미터, 깊이 2.5미터의 수로가 조성됐다. 그 길이가 500미터가량 된다. 그 정도 수로면, 공릉천을 서식지로 삼은 동물들에게 큰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시민단체들은 동물들이 수로에 빠지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수로를 원래 상태로 복구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환경단체 등 시민단체들이 반대하고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때마침 다리 아래로 왜가리 한 마리가 한가롭게 서성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 왜가리가 이 지역이 철새도래지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현수막 뒤로 가만히 몸을 감추고 카메라를 꺼내 든다. 3코스를 지나올 때는 그냥 눈으로만 지켜보았던 왜가리를 비로소 이곳에서 사진으로 담을 수 있었다. 그것도 환경단체들이 걸어둔 현수막 덕분이다.
 

평화누리 자전거길 4코스. 농부와 자전거, 자동차가 함께 사용하는 길임을 알려주는 표지판. ⓒ 성낙선


자전거 여행길에 마주친 '장준하'

공릉천 하구를 지나면서 자유로 너머로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비무장지대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오두산 통일전망대는 북한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이 자주 방문하는 곳 중에 하나다. 전망대에 오르면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북한 땅인 개풍군을 눈앞에 두고 바라다 볼 수 있다. 단지 강 하나를 건너면 바로 북한 땅이다. 그런데 70여 년이 넘도록 그 짧은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통일은 허망한 꿈일까? 통일전망대에 다다르기 직전, 오른쪽 도로변으로 '장준하 추모공원'이 보인다. 추모공원이 의외로 소박하다. 무언가를 거창하게 내세우려 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파주 통일공원 입구 잔디밭에 하얀 대리석 몇 개를 세우고, 거기에 선생의 얼굴과 약력 등을 새겼다. 대리석 뒤로는 검은 돌 하나가 놓여 있다. 이것이 선생의 묘인가 싶지만, 선생의 실제 묘는 이곳에서 산 쪽으로 40미터를 더 올라가야 한다.
 

장준하 추모공원, 대리석에 장준하 선생의 얼굴과 약력 등이 새겨져 있다. ⓒ 성낙선

 
선생은 조국이 해방되기 전에는 일제에 항거해 싸웠고, 해방이 된 이후에는 박정희 유신독재에 맞서 싸웠다.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평화통일을 위해 일했다. 그러다 1975년 포천 약사봉에서 산행 도중 의문의 사고사를 당했다. 이후 타살 의혹이 제기됐지만 아직껏 명확한 결론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 현실은 선생이 살아 있을 때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선생의 꿈이 실현되지 못한 데 일말의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장준하 추모공원을 나와 오두산 통일전망대 앞을 지나가는 마음이 무겁다. 통일전망대가 사실은 통일을 전망하는 곳이 아니라 분단 현실을 조망하는 곳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통일전망대 앞을 지나면서부터는 도로 주변이 점차 어수선해지기 시작한다. 파주 맛고을이다. 길가에 음식점과 카페들이 늘어섰다. 북한을 코앞에 둔 채, 눈앞에 마주하게 된 풍경치고는 조금 낯설다. 북한 땅에서 맛고을까지 직선거리로 약 2km밖에 되지 않는다.
 

자유로 너머로 멀리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올려다 보인다. ⓒ 성낙선

 
맛고을 입구에서 길 하나를 건너면 바로 헤이리예술마을과 파주 국립민속박물관이다. 헤이리예술마을은 한두 번 와본 기억이 있지만, 국립민속박물관은 처음이다. 이 박물관은 2020년 개관했다. '국내 최대 민속자료센터'로서, 각종 민속품을 '개방형 수장고' 형태로 전시하고 있다. 개방형 수장고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다. 말로 듣는 것보다는 눈으로 보는 게 더 빠르다. 보통 민속박물관하면 낡고 어두운 분위기가 먼저 떠오르는데, 이 박물관은 그런 이미지를 말끔하게 지웠다.

박물관 로비에서부터 '아 민속박물관도 이렇게 변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전시 방식을 바꿨을 뿐인데, 우리가 예전에 일상적으로 사용해온 전통 옹기와 개다리소반이 이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신선한 충격이다. 조상들이 쓰던 다양한 물건뿐만 아니라 사진이나 책 등 여러 가지 민속자료들도 편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관람은 예약제로 운영된다. 갑자기 찾아갔지만, 마침 관람객 수가 적어 운 좋게 입장이 가능했다.
 

파주 국립민속박물관 전시물 일부. ⓒ 성낙선


이대로 여행을 계속 해야 하나?

민속박물관까지 갔을 때만 해도 길이 좋았다. 하지만 그 후로 펼쳐진 평화누리 자전거길은 내게 더 이상 '평화'를 선사하지 않는다. 며칠 전 내린 눈이 녹아 얼어붙으면서, 길이 빙판이나 다름없이 미끄럽다. 그늘이 진 부분은 아예 눈이 녹지도 않았다. 일반도로는 바로 제설이 되는 반면, 자전거전용도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로 여행을 계속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이 인다. 그래도 좀 더 가보기로 한다. 계속 가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부터는 상황이 바뀔 수도 있다는 기대를 버리지 못한다.

그렇지만 길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미끄러운 길이 계속 나타난다. 중간중간 눈 녹은 길이 보일 때마다, '이제부터는 괜찮겠지' 기대를 걸어보지만 그때뿐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계속 나아가기도 어렵고, 뒤로 물러서는 건 더욱더 어렵다. 지나치게 미끄럽다 싶을 때는 자전거에서 내려 걸어간다. 걸음을 옮겨 딛을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나야 하는 눈밭이 빠드득 소리를 내며 깨져 나간다.
 

눈이 채 녹지 않은 자전거 전용도로. 평화누리 자전거길 4코스. ⓒ 성낙선

 
곁눈질을 할 겨를이 없다. 한눈을 팔다가는 눈길 위에서 자전거와 함께 나동그라질 판이다. 조심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아스팔트 위로 얇게 얼음이 언 비탈길에서 결국 보기 좋게 넘어진다. 아스팔트 표면이 그냥 물에 젖어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일종의 블랙 아이스다. 이후로는 모든 길이 블랙아이스처럼 보인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그러다 나도 모르는 새, 4코스 종료 지점인 반구정을 그냥 지나친다. 반구정은 조선의 명재상이었던 황희 정승이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반구정으로 가려면 자유로 밑으로 지하도를 통과해야 한다. 그러려면 길을 잘 살펴야 한다. 평상시에도 반구정으로 들어가는 길을 놓쳐 그냥 지나치는 여행객이 많다고 한다. 그러니까 오늘처럼 길이 꽝꽝 얼어붙기라도 한 날엔 더 많은 사람들이 같은 실수를 할 수밖에 없다.
 

임진각, 총탄 자국을 간직한 채 녹슬어가는 장단역 증기기관차. ⓒ 성낙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임진강역이다. 멀리 역사에 전철이 대기하고 있는 걸 보고서 임진각이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찌 됐든 이 평화롭지 않았던 여행도 드디어 끝이 보인다. 설 명절을 앞두고 임진각이 사람들로 북적인다.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매우 부산하다. 여기까지 오면서 좀처럼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임진각이 예전 같지 않게 더 어수선해진 분위기다. 한쪽에서는 놀이기구들이 놀이공원 특유의 음악과 함께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다시 내려앉기를 반복하고 있다. 설 연휴를 맞아 관광객들이 이전보다 더 많이 몰려온 탓이리라. 총탄 자국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장단역 증기기관차를 보러 가는 길에는 기념품 가게가 활발히 영업 중이다. 여느 관광지 못지않게 완벽하게 '관광지화'한 모습이다.
 

임진각 ⓒ 성낙선

 
임진각에 실향민들을 위한 '망배단'이 마련돼 있다. 명절이 다가오면, 이곳에서 실향민과 탈북민들이 망향의 한을 달래며 함께 차례를 지낸다. 그리고 임진각은 전쟁통에 입은 상흔이 여기저기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촬영 금지' 표지판이 붙은 철조망 너머로 긴장감이 흐른다. 그런데 그런 곳에 마땅히 있어야 할 엄숙함이 사라졌다.

번잡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근처 평화누리공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공원 바깥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잔디가 깔린 공원 언덕을 걸어 오른다. 잔디 위에 평화와 통일을 상징하는 조형물들이 다양한 형태로 배치돼 있다. 그 조형물들에서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몸'이 정작 다른 데 가 있다. 파주출판도시휴게소에서 임진각까지 자전거로 달린 거리는 약 32km였다.
 

평화누리공원, 작품명 <통일부르기>. ⓒ 성낙선

 
덧붙이는 글 이 여행은 지난 10일과 21일, 이틀에 나눠서 다녀왔다. 10일에는 파주출판도시휴게소에서 파주 국립민속박물관까지, 21일에는 파주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임진각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 10일에는 도로 사정이 좋았지만, 21일에는 도로가 얼어붙어 자전거를 타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