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 이야기는 어젯밤 스친 꿈같은 그저 짧은 이야기입니다."

본격적으로 막이 오르기 전, 무대 뒤 편에 관객들을 위해 이렇게 문구가 내걸렸다. 아마도 작품의 소개뿐 아니라 공연을 관람하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알려주고 싶었던 제작진의 의도로 보인다. 기억하려 애를 써도 떠오를듯 말듯 어렴풋이 머릿속을 맴도는 이야기들. 달콤한 잠에서 깨어나 기억의 저편을 오가는 몇 개의 단상들. 앞뒤 구분 없이 뒤섞여 있는 듯한 조각모음들이 차례로 펼쳐진다. 그러나 이전의 얘기가 기억나지 않아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툴툴 털고 새롭게 시작하면 되니까.

공책을 찢은 듯한 배경. 극장 안에 또다른 작은 무대가 깔렸다. 정사각형의 단상으로 이루어진 무대 위로 배우의 동선은 제한된다. 가끔 그곳을 내려와 주위를 걷고 문지방에 걸터앉은 듯한 자세도 취하지만, 그의 구역은 '극장 속의 극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단상의 양쪽으로는 각양각색 전통악기들이 채워졌다. 그리고 네 명의 악사들이 두 명씩 좌우로 배치됐다. 배우와 악사가 주고받는 티키타카와 주인공의 입말을 돋보이게 만드는 연주기법은 조금의 빈틈도 발견할 수 없다. 마치 오래된 경력을 자랑하는 더빙영화의 베테랑 성우처럼. 
 
 전통판소리 1인극 <판소리 쑛스토리 모파상篇> 공연 장면

전통판소리 1인극 <판소리 쑛스토리 모파상篇> 공연 장면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하지영

 
다시 무대에 관한 설명으로 넘어가보자. 정면에 보이는 배경은 런어웨이를 연상시킨다. 메모장을 찢은 배경은 시·공간을 넘나드는 역할을 기대하게 만든다. 이것은 150년을 뛰어넘어야 할 관객들에겐 더할나위 없는 무대장치다. 한국적 판소리의 배경이 프랑스의 에피소드였다는 간극을 메우기엔 더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배우의 대사와 악사의 음악은 한국적 요소로 채웠지만, 등장인물의 이름과 단막극의 중간을 이어주는 내레이션은 프랑스어로 교차시켰다. 이처럼 이질적 요소가 거리낌 없이 섞이게 만들기 위해서 몽환적인 무대가 한몫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여하튼,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전통판소리 1인극 <판소리 쑛스토리 모파상篇>(1월27일~29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이다. 

제목에서 유추하듯 이 작품은 우리 국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판소리극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우수한 신작을 발굴하기 위해 진행하는 '공연예술창작산실-올해의 신작'에 선정된 28편 중 하나로, 전통 분야에 주목하는 작품들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공연은 소리꾼과 고수가 주고받는 구조에 뼈대를 두지만 철저하게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점이 돋보인다. 2000년대 후반 여성민요그룹에서 활동한 뒤 2011~2012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차세대예술가로 선정되면서 판소리 각색에 두각을 나타낸 박인혜(39)씨가 중심을 이끈다. 

<판소리 쑛스토리 모파상篇>에서 연출, 각색, 음악감독, 작창, 배우 등 1인 5역을 맡은 박 씨는 '필경사 바틀비'라는 작품으로 제5회 이데일리 문화대상(2018)을, '아랑가'로 제4회 한국뮤지컬어워즈(2020)에서 상을 받을 만큼 떠오르는 국악인으로 주목받았다. 특히, 판소리 뮤지컬 '적벽'과 드라마 '역적'에서는 판소리에 기반해 장르를 넘나드는 창작 작업을 선보였는데, 필자가 기억하는 그를 기억하는 작품은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2021)였다. 전작에서 배우를 넘어 연출가로 데뷔한 그는 판소리를 돋보이게 만드는 극작술과 연출 양식, 음악 어법을 통해 '박인혜' 만의 색깔을 대중에게 전파했다. 

무엇보다 전승하고 보존해야 할 판소리보다 '창작의 도구로 운용'되는 판소리에 관심이 많았다고 고백한 박씨는 재작년에 '놀다'라는 동사와 '애'라는 접미사를 붙여 '판소리아지트 놀애박스'를 결성했다. 이것은 지금 소개하고 있는 '판소리 1인극'뿐 아니라 지금까지 충분히 결과를 보여줬던 창극과 뮤지컬 등에서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영역을 넓혀갔다. 이를 위해 판소리가 가진 고유의 성질에 충실했으며, 전 세계로 뻗어나갈 발판을 마련하는 데에서도 나름의 역할을 보여줬다. 

판소리의 새로운 시도는 멈추지 않아
 
 전통판소리 1인극 <판소리 쑛스토리 모파상篇> 공연 장면

전통판소리 1인극 <판소리 쑛스토리 모파상篇> 공연 장면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하지영

 
제주도의 토속 신화를 배경으로 만든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가 판소리로 합창을 선보이겠다는 시도를 했던만큼 박씨는 <판소리 쑛스토리 모파상篇>를 통해 판소리의 새로움을 전파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작품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사실주의 소설가의 단편작품을 토대로 제작했다는 소개가 전혀 낯설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 다시 작품에 대한 소개로 넘어가 이번 공연은 19세기 프랑스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표 작가 '기 드 모파상(Guy de Maupassant, 1850~1892)의 단편소설 세 편을 모은 것이다. 

작품의 제목에서 '모파상' 이름 뒤에 '책편(篇)'이라는 한자를 넣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추측된다. 우선은 '판소리아지트 놀애박스'의 본격적인 향후 행보가 단편소설이 될 것이란 점이다. 다음은 '판소리 쑛스토리'라는 이름을 뜯어보자면, 단편을 모아서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시킨 형식을 예측케한다. 실제로 90분의 러닝타임을 30분씩 담당(?)하는 세 편이 옴니버스 식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모파상 단편소설 세 편을 한 무대에

<판소리 쑛스토리 모파상篇>은 모파상이 서른 살쯤에 썼던 '보석', '콧수염', '비곗덩어리'을 판소리 1인극으로 재탄생시킨 공연이다. 판소리와 모파상의 만남에 의구심을 갖는다면 박인혜 연출가가 지난 11일,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밝힌 이 말이 도움이 될 것이다. 

"모파상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예요. 소재를 택할 때 판소리와 잘 어우러질 것인가를 염두에 두었어요. 가장 중요한 건 동시대 우리에게 유효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여부입니다."

주제를 언급하기에 앞서 필자는 모파상을 잠깐이라도 소개해야겠다. 1850년 프랑스의 소도시에서 태어난 그는 스무살이 되던 1870년에 프로이센(후에 독일이 된다)과 프랑스 간의 전쟁이 발발하자 군입대를 하고 이듬해 제대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가 겪었던 전쟁의 참혹함은 이후의 작품 세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중에 여러 요소들이 작품을 지배하지만 이번 공연의 소재로 사용된 단편들을 들여다보면 대체로 이렇게 요약된다. 

에피소드의 처음을 장식하는 '보석'은 현대인을 상징하는 파리지엔느의 이기적인 삶을 가감 없이 노출시켰다. 여기에 '비곗덩어리'와 '콧수염'는 전쟁의 참상이 공연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짓누른다. 이밖에 다양한 소재와 결이 드러나 있지만, 모파상의 공통점을 하나로 뽑아내면 '인간에 대한 성찰'이다. 이것이 때로는 염세적으로 표현되지만, 이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의 본능과 속세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그의 경험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박인혜 연출가는 이렇게 작품을 소개한다.  

"인간의 속물근성, 전쟁 속에 드러나는 본능과 충동, 삶의 어두운 부분을 과감하게 보여주며 생동감있게 무대 위에 그려낼 겁니다.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면서 인간을 몇 가지의 유형으로 구분하지만 모파상의 소설을 읽다 보면 인간을 쉽게 유형화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인간이 내포하고 있는 다면성과 어리석음
# '랑탱'은 아름다운 아내를 사랑하지만, 아내의 가짜 보석 수집이 못마땅하다. 모조보다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믿었지만, 아내가 죽은 후 가짜 보석이 진짜임을 알아챈다. 하지만 그마저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민낯을 숨기지 못하게 된다. 「보석」(1883)

# '잔'은 친구에게 편지를 통해 근황을 전한다. 편지는 남성의 콧수염에 관한 내용으로 채워지며, 편지의 끝, 콧수염을 예찬하게 된 계기를 소개한다. 양쪽으로 날카롭게 지켜올라간 남자의 콧수염에는 전쟁의 참상에서 뇌리에 박힌 인간의 잔인함이 숨겨져 있다. 「콧수염」(1883)

# 프랑스 루앙이 프로이센군에게 점령된 후, 루앙에서 디에프로 가는 마차를 함께 타게 된 10명으로부터 시작된다. 교활한 상인 부부, 귀족 부부, 세력가이자 퇴역장교 부부, 수녀 두 명, 혁명가 그리고 비곗덩어리라 불리는 매춘부를 태우고 마차는 출발한다. 매춘부라는 사실만으로도 비곗덩어리를 제외한 부인들은 동질감을 나누고 좁은 마차 안은 정확한 신분의 경계선이 그어진다. 「비곗덩어리」(1880)

모파상의 단편작 세 편은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내용을 이어간다. 동일한 간격으로 시간차를 두지만 서로 간에 인과관계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이기심에 가득찬 인간과 현세대를 비판하려는 원작자의 의도를 판소리로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이를 위해 창작의 도구로 인용된 판소리는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모파상의 메시지를 이해하게 만든다. 여기에서 박 연출가는 작품을 관람하는 팁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들려준다. 

"이번 작품의 포인트는 세 편의 이야기가 전환될 때마다 관객들은 빠르게 앞 이야기를 '훌훌' 털어버릴 수 있다는 겁니다. 다음 이야기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악기와 음악의 변화에 따라 세 이야기의 질감 변화를 충분히 즐기시길 바랍니다." 

<판소리 쑛스토리 모파상篇>은 단편소설의 장점을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것은 비움의 미학을 통해 간결한 형식미를 자랑하는 '판소리'의 특성을 그대로 옮겼다. 두꺼운 장편소설을 들었을 때의 답답함이 억누르는데, 90분을 삼등분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한결 혼가분해진다.

마치 몇 시간이 넘는 판소리 완창을 대하는 준비자세를 내려놓아도 된다는 느낌으로. 박 연출가는 이런 낯선 관객들을 배려해서 "앞선 에피소드에 대한 기억을 끌고오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시킨다. 극과 극을 이어주는 소개에서는 뒤에서 전개될 작품에 대한 소개를 직접 읊어줌으로써 다음 공연을 미리 짐작하게 만든다. 이것은  단편소설의 미감과 판소리 대목이 상당히 유사하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판소리 쑛스토리 모파상篇>에 소개되는 '보석' '콧수염' '비곗덩어리'은 철저하게 인간의 속물근성과 이기주의의 이면을 낱낱이 보여준다. 이것이 150년 전, 우리나라의 반대편에서 일어났던 일화였지만 아직도 유효한 에피소드를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이번 작품을 통해 글을 읽는 독자에게, 객석을 찾은 관객에게도 동일한 메시지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1인극에 충실했던 판소리의 묘미
 
 전통판소리 1인극 <판소리 쑛스토리 모파상篇> 공연 장면

전통판소리 1인극 <판소리 쑛스토리 모파상篇> 공연 장면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 ⓒ하지영

 
판소리의 형식으로 채웠고, 현대판 전통극의 모양새를 갖췄지만, <판소리 쑛스토리 모파상篇>이 돋보이는 이유는 극의 중심을 잡은 주연 배우의 몰입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전작인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에서도 초연 이후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다양한 버전을 이어온 비결이 여기에 있다.

판소리의 비움과 여백의 미를 살렸지만 정통극에 못지 않은 그의 연기는 이 공연의 백미라 자신한다. 그것은 책 속의 활자를 배우의 몸동작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소리꾼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연기의 깊이가 남다르다. 가짜 보석을 세는 '모조'의 단어를 연이어 내뱉을 때나, 인간의 이기심과 허영심의 끝판을 보여즌 랑탱이 보석의 진실을 알고 돈을 채는 '챕챕'을 외칠 때는 일인다역의 한계를 멋지게 뛰어넘었다. 

마지막으로 작은 무대의 꼭지점에서 지원사격을 아끼지 않았던 네 명의 악사들도 눈여겨 봐야한다. 두 번째 단편을 소개하는 '콧수염'에서는 입술 위를 뒤덮고 있는 콧수염의 털 끝이 살짝 올라가는 매력을 이야기하면서 턱수염이 따라가지 못함을 비유하는데, 공교롭게도 악사(정상화)의 턱수염을 바라보면서 주고받는 장면은 색다른 재미를 던져준다.

덧붙여 한 명의 악사가 책임지는 악기의 종류도 만만치 않은데, 90분을 이끌어가는 음악에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한 온갖 종류의 악기들은 쉴틈이 없다. 여기에 악사들의 정통 연주기법뿐 아니라 악기를 긁는 소리, 휘파람, 비음 등 예측불가능한 음향을 듣는 것만으로 무대를 찾은 관객은 귀가 즐거울 것이다.  
판소리 박인혜 창작산실 판소리 쑛스토리 모파상篇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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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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