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사이공 최후의 날, 그곳에 알려지지 않은 한국인들이 존재했다. 1975년 4월 30일은, 당시 '월남'이라 불리던 남베트남이 지구상에서 사라진 날이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현 호찌민)이 북베트남군에게 함락되면서 장장 20년에 걸친 '베트남 전쟁'이 막을 내렸다. 당시 사이공에서는 베트남을 떠나기 위한 필사의 탈출작전이 벌어졌고 그 긴박한 현장에 우리 한국인들도 있었다.
 
2월 9일 방송된 SBS 스토리텔링 예능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에서는 '1975 베트남 대탈출' 편을 통하여 역사적 혼란기에 베트남에서 필사의 탈출작전을 이끌었던 대한민국 외교관들의 활약상을 다뤘다.
 
1975년 당시 <한국일보> 안병찬 기자는 신문사로부터 '함락 직전 사이공의 마지막 표정을 컬러로 찍고 돌아오라'는 임무를 부여받았고 사이공으로 파견된다. 당시 베트남에는 파병 군인들 외에도 기술자, 노동자 인력들을 비롯 심지어 아예 현지에 정착한 교민들까지 다수의 한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가난을 면하기 위하여 한국을 떠나온 이들이 많았다.
 
사이공이 풍전등화에 놓이면서 안희완 당시 주남베트남 한국 대사관 영사와 이달화 무관 보좌관 등 대한민국 외교관들은 교민들을 철수시키느라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또한 한국 정부는 구호물품 전달 목적으로 해군 함정을 파견했는데 사실 이들의 진짜 임무는 교민 탈출을 위한 피란선이었다. 함정이 베트남에 도착했을때 이미 항구 주변은 북베트남군이 거의 장악한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피란민 몰린 항구, 1360여 명 태운 해군 함정

탈출 작업은 순조롭지 않았다. 여기에는 내부적인 갈등도 있었다. 교민들 중에는 의외로 위급한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탈출을 망설인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이미 베트남 여인과 결혼하여 현지에 정착한 사람들, 한국에 돌아가봤자 생계가 막막한 가난한 서민들, 혹은 사업투자로 베트남에 많은 이해관계가 걸려있던 사업가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탈출을 거부하는 경우가 속출하면서, 외교관들은 이들을 설득하는 데 진땀을 빼야 했다.
 
대사관 측은 함대 사령관에게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간곡히 설득했고, 함대 측에서는 24시간 이상은 어렵다고 최후 통보를 날린다. 외교관들의 노력으로 탈출을 거부하던 교민들도 겨우 마음을 돌렸다. 한국 교민과 결혼한 베트남 가족들, 남베트남 피란민까지 몰리면서 피란선이 정박한 항구는 순식간에 인산인해를 이뤘다.
 
약 1360여 명의 피란민이 해군 함정 두 척에 나눠 타고 사이공을 탈출했다. 당시 자료사진은 함정 갑판 위에 피란민을 위한 천막촌이 설치된 모습으로 처절했던 탈출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떠나는 교민과 피란민들은 배 위에서 멀어지는 베트남의 모습을 바라보고 손을 흔들며 '사이공~사이공'을 외치면서 구슬프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1차 교민 철수 작전은 무사히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상황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직 베트남을 떠나지 못 하고 남겨진 한국인들은 대사관 직원 15명과 안병찬 기자였다. 한국은 동맹국인 미국과 유사시에 외교관들의 철수를 돕기로 약속된 상태였고, 당시 미국 대사관이 아직 베트남에 남아있다는 것을 믿고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4월 28일 오전 9시,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긴급한 연락이 전해진다. 2시간 이내에 비행기로 철수할 예정이니 준비하라는 것. 발등의 불이 떨어진 한국 대사관팀은 1956년 개관부터 무려 19년이나 축적된 각종 외교문서와 기밀자료를 촉박한 시간 내에 소각하는 데 진땀을 빼야 했다. 안병찬 기자는 주한 남베트남 대사관에서 마지막 국기하강식을 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하지만 약속시간이 지나도 미국대사관이 보내주기로 한 버스는 오지 않았다. 늦게서야 연락이 온 미국 측은 "준비한 비행기가 취소되었으니 다시 연락을 기다리라 "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전한다.
 
당초 탈출 루트였던 사이공의 탄손누트 공항이 북베트남군의 폭격으로 비행기 이착륙이 불가능해진 것. 한국 대사관 팀은 속수무책으로 고립됐다. 남베트남편에서 싸웠던 미국과, 그에 협력한 한국 측은 사이공이 함락된다면 '피의 보복'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있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이제 마지막으로 믿을 것은 한국 대사관이 미국 측과 미리 탈출작전을 위하여 정해놓은 비밀교신 암호였다. 미국은 한국 측에 라디오를 통하여 주파수를 FM에 맞추고 만일 방송에서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캐럴과 일기예보가 나오면, 그게 바로 어셈블리 포인트(탈출을 위한 집결지)로 모이라는 긴급신호라고 약속했다. 한마디로 '이 노래가 나오는 순간은 무조건 여권 하나만 들고 집결지로 뛰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임을 의미했다.
 
4월 29일,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마침내 '대한민국 외교관들은 어셈블리 포인트3로 모이라'는 연락이 전해진다. 동시에 FM라디오에서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퍼졌다. 외교관들과 안 기자는 신속하게 대사관을 떠나 차량으로 약속된 포인트인 헬기 착륙장이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하지만 돌연 미군 경비병들이 건물 진입을 거부하며 막아선다. 긴박한 상황속에 미국의 작전계획과 의사소통에 오류가 발생하면서 철수계획에 차질이 빚어진 것. 한국 대사관팀은 결국 헬기를 타는 데 실패했고, 어쩔 수 없이 미국 대사관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대사관 앞에는 이미 베트남을 탈출하려는 수만명의 피란민들이 모여 아비규환이었다.

한국 대사관팀은 외교관 여권과 기자증을 보여주며 간신히 대사관 진입을 허락받았다. 대사관 내부에도 이미 3000여 명에 이르는 피란민들이 운집하며 초조하게 탈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는 한국 대사관팀을 비롯하여 해군 피란선을 타지 못 하고 아직 베트남에 남아있던 140여 명의 한국 교민들도 모여 있었다.

유일한 탈출수단은 대사관에서 헬기로 약 50명씩 사람들을 바다에 있는 항공모함까지 이송하는 것이었다. 미국 대사관은 '아메리칸 퍼스트' 방침에 따라 먼저 자국인과 그들의 현지인 가족들을 먼저 이송했다. 먼저 대기하고 있던 한국인들이라도 뒤늦게 도착한 미국인들에 의하여 연이어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이달화 무관은 당시를 회상하며 "그때는 정말 미국 시민이 아니라는게 참..."이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여기에 불안해진 피란민들은 순서와 통제를 무시하고 새치기를 해서라도 먼저 헬기로 탑승하려고 몰리면서 질서가 무너지고 대혼란이 펼쳐졌다. 이달화 무관은 군복으로 갈아입고 같은 군인인 미군들에게 자신의 신분과 계급을 밝히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하여 안으로 들어갈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안희완 영사는 한국 교민들의 맨 뒷줄에 서서 모든 교민들이 안전지대로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뒤 가장 마지막에서야 들어섰다. 충분히 먼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안 영사는 "수백명의 교민이 있는데, 외교관이 단독으로 나 살겠다고 뛰어갈 순 없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미국은 모든 피란민을 책임지겠다던 약속을 끝까지 지키지 않았다. 피란민을 태운 마지막 수송헬기가 이륙하면서 미군은 아직 남아있던 수천명의 사람들을 그대로 버려두고 떠났다. 미 해병대는 가스탄을 터뜨리며  울부짖는 피란민들의 진입을 저지한 뒤 헬기를 타고 남은 병력마저 모두 철수해버렸다. 그대로 건물이 폭파되는 줄 알았던 한국 교민들과 피란민들은 일제히 미국 대사관을 떠나 다시 밖으로 탈출해야 했다.

"교민들 있는데, 외교관이 나 살겠다고 뛰어갈 순 없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4월 30일, 사이공 최후의 날이 밝았다. 사이공에 남겨진 한국 대사관팀과 교민들은 프랑스와 일본 대사관 등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일본 대사관 측은 "북베트남과 북한은 형제다. 한국 외교관들을 북한으로 끌고갈 것"이라는 정보를 전해준다. 참담한 지경에 놓인 한국 외교관들은 당시 극단적 선택까지 생각했을 만큼 절망감에 빠졌다고.
 
갈 곳이 없었던 한국인들은 결국 일단 한국 대사관으로 돌아왔다. 탈출하지 못 한 외교관과 교민들이 대사관에서 집단으로 기거하게 됐다. 다행히 우려했던 북베트남의 피의 보복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안 영사를 비롯한 주요 외교관 3명은 북베트남의 형무소로 끌려가 독방에 수감되며 옥고를 치러야 했다. 베트남은 외교관의 면책권을 보장하는 비엔나 국제협약까지 철저히 무시했다.
 
안 영사는 당시 형무소에 북한 관계자들이 수시로 찾아와 협박과 회유를 오가며 심문을 당했던 일화를 고백했다. 안 영사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누구를 부를 수도 없고 혼자 감당해야만 했다"면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떠올리다가 끝내 눈물을 흘렸다.
 
안 영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한국의 가족들에게 보내는 옥중편지에서 가수 패티킴의 노래 '서울의 찬가'를 떠올리며 버텼다고 밝혔다. 노래에는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렵니다'라는 가사가 등장한다. 안 영사는 "서울의 찬가 가사를 써서 속으로 부르면서 내 마음을 굳건히 하려고 했다"고 고백했다.
 
1975년 베트남을 탈출하지 못 하고 남겨진 교민들의 이야기는 정작 당시 국내 언론에서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사이공 함락 직후 대사관으로부터 보고까지 받았지만, 외교적 문제와 협상 등을 고려하여 언론보도를 통제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1976년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하면서 남아있던 한국 교민들은 기나긴 협상 끝에 마침내 출국 허가를 받을 수 있엇다. 하지만 감옥에 수감된 3명의 한국 외교관들은 풀려나지 못했다. 안 영사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옥중에서 전해들어야 했다.
 
1980년 4월, 안 영사를 비롯한 외교관 일행은 드디어 베트남 정부와의 석방 교섭에 성공했다. 안 영사 일행은 사이공 탈출에 실패하고도 무려 5년이 더 흐른 뒤에야 꿈에 그리던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억울하고도 고통스러운 옥고를 버텨내면서 고국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렸던 안 영사의 인내는 헛되지 않았다.

안 영사는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유치원에 다닐 정도로 자란 자녀들을 만나 처음에는 서먹했던 일화를 회상하며 아버지 노릇을 못 했다는 데 대한 미안함을 먼저 떠올렸다. 그리고 이러한 안 영사와 한국 대사관팀의 이야기는 외교문서가 해제된 2008년에야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안 영사는 그 사건으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악몽에 시달린다고 한다.
 
베트남 패망 당시 한국 사회는 "자칫하면 우리도 월남 꼴이 될 수 있다"는 공포감에 휩싸였고, 반공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높아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이공 함락 이후 17년이 흐른 1992년 한국은 공산국가라며 경시했던 베트남과 정식 수교를 맺고 외교관계를 수립한다.

지금은 한국 기업들이 다수 진출하여 케이팝-한류-박항서 축구 감독 등의 영향력으로 베트남은 이제 대한민국의 가까운 이웃이 됐다. 국제사회에서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삶은 우리가 무엇을 절실하게 희생해왔는가의 합계"라는 어록을 남겼다. 반세기 전 그날, 안희원 영사와 한국인들이 애꿎은 베트남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벌였던 처절한 사투는, 지금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와 안보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꼬꼬무 베트남전쟁 한국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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