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뛰어난 사람은 고뇌를 통하여 환희를 차지한다.' 악성(樂聖)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이 남긴 어록이다. 평생 자신을 괴롭혔던 장애와 역경, 운명에 굴하지 않고 끝내 음악사에 남을 위대한 유산을 일구어낸 인물이었기에 할 수 있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6월 13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03회에서는 '장애를 이겨낸 불멸의 음악가 베토벤' 편을 통하여 한 천재 음악가의 예술세계과 인간승리의 여정을 조명했다. 조은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독일 출신의 베토벤은 평생 720여 곡이 넘는 명곡들을 남기고 오늘날까지 음악의 성인이라는 칭송받는 역사상 최고의 클래식 작곡가다. 슈베르트, 바그너, 브람스 등 후대의 음악인들은 물론이고 화가 구스타프 클림프, 작가 레프 톨스토이 등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이 베토벤의 음악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일화가 유명할 만큼, '위대한 음악가들의 음악가', '예술가들의 뮤즈'로도 불리우고 있다.
 
가혹하고 폭력적인 스승이었던 아버지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베토벤은 1770년 12월 17일 쾰른 선제후국의 수도(훗날 서독의 수도) 본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본 궁정악단의 단장이었고, 아버지 요한 판 베토벤은 궁정 테너 가수로 활동한 음악 명문가 집안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베토벤에게 음악과의 첫 만남은 그리 행복한 기억이 아니었다. 아버지 요한은 알콜중독자였고 아들에게 잠도 재우지 않고 음악 연습을 강요하는 등 가혹하고 폭력적인 스승이었다. 음악가로서는 그리 대성하지 못했던 요한은, 당시 유럽 음악계에서 '신동'으로 이름을 떨치던 모차르트 부자의 성공에 자극받아 아들을 제2의 모차르트로 키우겠다는 욕망을 갖게 됐다.
 
1778년 베토벤이 8세 때 요한은 아들의 데뷔 무대를 기획하면서 실제 나이보다 2살을 속여서 홍보한다. 모차르트가 처음 궁정에서 연주를 하여 이름을 떨쳤을 때의 나이가 6세였음을 의식하여 따라했던 것. 하지만 당시 베토벤은 모차르트만큼의 파급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성급하게 추진한 연주회는 실패로 끝났다.
 
초조해진 요한은 베토벤을 더욱 들볶으며 학교조차 다니지 말고 연습에 매진할 것을 강요했다. 베토벤은 훗날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의 나는 묘기 부리는 원숭이와 같았다. 피아노를 도끼로 부숴버리고 싶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유년 시절의 기억은 훗날 베토벤의 성격에도 큰 영향을 미치며 성인이 된 이후에도 권위과 권력에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성향으로 나타난다.
 
베토벤은 실력이 쌓이면서 차츰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자립하게 된다. 베토벤의 첫 스승이었던 궁정음악가 크리스티안 네페는 아버지에게 정확한 연주만 강요받아왔던 베토벤이 템포와 음량을 다양하게 변주하며 자유롭게 음악적 창의성을 발휘할수 있도록 독려했다.
 
베토벤은 12세 때 직접 작곡-연주한 '드렉슬러 행진곡 주에 의한 아홉 개의 변주곡'을 처음으로 출판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고, 그해 궁정 오케스트라에까지 캐스팅되기에 이른다. 당시 베토벤이 리허설에서 조율이 안 되었던 건반악기를 즉석에서 조옮김을 계산해가며 완벽하게 연주했다는 일화는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던 그의 천재성을 보여준다.
 
1787년 17세의 베토벤은 문화예술의 메카로 꼽힌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의 수도 빈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빈에는 모차르트도 거주하고 있었는데, 베토벤을 만나 그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격려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하지만 두 음악 거장의 만남이 과연 실제로 성사되었는지는 불명확하다.
 
하지만 베토벤은 빈 유학 2주 만에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 마리아 막달레나의 비보를 듣고 귀국해야 했다. 베토벤은 알콜중독자인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를 돌봐야하는 소년가장의 무게까지 떠안게 되면서 돈을 벌기 위하여 귀족들의 파티에 불려가 연주를 해주거나 귀족 여성들에게 음악 레슨을 해주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음악가들은 존중받는 예술가라는 인식보다는, 왕족과 귀족의 유흥을 위하여 고용된 하인 혹은 기술자 정도의 취급을 받았다. 부당한 현실에 자괴감과 분노를 느낀 베토벤은 차츰 상류층과 계급사회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됐다.
 
'피아노 연주 배틀'에서 명성 얻기 시작한 베토벤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1788년, 18세의 베토벤은 본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청강하다가 이성적 사고와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계몽주의(啓蒙主義, Enlightenment) 사상을 접하게 되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불과 1년 뒤에는 프랑스에서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다. 계급사회와 상류층의 모순에 의구심을 갖고 있던 베토벤은 이에 큰 감명을 받으며 특권에 대한 저항의식을 키우게 된다.
 
1790년 20세가 된 베토벤은 당대 음악계의 거장으로 꼽히던 '교향곡의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을 새로운 스승으로 모시게 되며 빈으로 두 번째 유학길에 올랐다. 하지만 베토벤과 하이든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성공한 음악가였던 하이든은 너무 바빠서 제자인 베토벤을 세심하게 챙겨줄 여유가 없었다. 베토벤은 하이든에게 배운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며 불만이 쌓였고, 하이든은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항상 자신의 음악적 주장을 굽히지 않는 베토벤을 괘씸하게 여겼다. 결국 1년 만에 베토벤은 하이든과 결별하고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베토벤은 빈에서 홀로서기를 위하여 '피아노 연주 배틀'에 나서며 유명세를 떨치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당시 빈 상류사회의 파티 문화에서 유행하던 피아노 연주배틀은 현대로 치면 <쇼미더머니>의 프리스타일 랩 경연처럼 청중들의 반응으로 승패를 가렸고, 음악인들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홍보의 무대이기도 했다. 베토벤이 유명 피아니스트 다니엘 슈타이벨트와의 대결에서 먼저 연주한 상대의 음정과 선율을 즉석에서 정반대로 뒤집어 연주하는 묘기를 선보이며 상대를 기술적-음악적으로 압도한 일화는 전설로 회자된다.
 
이후 베토벤은 수많은 피아노 연주배틀을 잇달아 이기며 빈에서 그 명성을 쌓아나갔다. 당시 귀족 사회에서는 베토벤을 어떻게든 초청하기 위하여 경쟁이 붙을 만큼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하지만 베토벤은 귀족들에게 고분고분 영합하지 않은 당당함과 음악적 재능으로 빈를 사로잡았다. 귀족 부인이 무릎까지 꿇으며 간절하게 부탁한 앵콜 요청을 단칼에 거절하거나, 자신의 피아노 연주 중 대화를 나누는 귀족에게 "돼지새끼들에는 연주해줄 수 없다"며 화를 내고 연주를 중단했다는 일화도 전한다.
 
어릴 때의 베토벤은 귀족처럼 화려하고 단정한 복장을 했다면, 나이가 들면서는 헝클어진 머리와 자유분방한 복장을 유지했다. 자신이 귀족의 하인 아닌 자유로운 음악가라는 걸 보여주는 그만의 표현 방식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쁜 남자'에 더 열광하는 심리처럼, 당시 세상은 베토벤의 이러한 괴팍함과 퉁명스러움을 오히려 '괴짜천재'라는 이미지로 받아들이며 더 열광했다고 한다.

심지어 권위주의에 대한 베토벤의 반감과 저항의식이 나이들어서도 변함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일화로 '테플리츠 사건'이 있다. 42세의 베토벤은 대문호 괴테와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왕족들과 마주치자, 괴테는 정중하게 모자를 벗고 인사했지만 베토벤은 그들을 무시하고 뒷짐을 진 채 발걸음을 옮겼다고 한다.
 
심지어 베토벤은 괴테의 행동을 못마땅해하며 "한 나라의 스승이 되어야 할 시인이 반짝이는 것(돈, 명예, 권위 등)을 위하여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게 말이 되나?"라고 저격했다고. 반면 괴테는 괴테 대로 그런 베토벤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너무 부정적인 사람"이라며 불쾌해했고, 두 사람은 테플리츠 사건 이후로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고.
 
최고의 전성기에 찾아온 어둠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1798년 28세의 베토벤이 발표한 피아노 연주곡 <비창 소나타>는 평론가들에게 '거장의 탄생을 알리는 예고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현대에도 익숙해진 베토벤의 명곡들이 하나둘씩 발표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 베토벤은 작곡 의뢰, 개인 레슨비, 공연수익, 연금 등으로 경제적으로도 여유로운 삶을 누리게 된다. 또한 산업혁명으로 인한 출판산업의 발전과 신흥 부르주아에서 유행한 피아노 연주 열풍 등으로 당시 '악보 판매 베스트셀러 1위'였던 베토벤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하지만 비로소 빛을 보는 듯했던 베토벤의 일생에 생각지 못한 어둠이 다시 드리우게 된다. 바로 청각장애로 음악가에게 생명과도 같은 소리를 잃게 된 것. 1796년 발진티푸스라는 열병을 앓았던 베토벤은 그 후유증으로 이명 현상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점점 청력을 잃어갔다. 베토벤은 어떻게든 청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온갖 위험한 민간요법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도리어 부작용만 늘어나며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가기만 했다. 어떻게든 자신의 상태를 세상에 숨기려고 했지만 소문은 어느새 점점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때부터 베토벤은 대인기피증을 앓게 되고 성격도 점점 괴팍해져갔다. 절망에 빠진 베토벤은 한때 죽음까지 생각하며 동생들에게 쓴 유서(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에서 "다른 사람에게 들리는 노랫소리가 나에겐 전혀 들리지 않는다. 절망의 심연으로 굴러떨어져 죽고 싶다"고 할 만큼 비참한 심경을 드러냈다.
 
하지만 베토벤은 유서를 써놓고도 끝내 동생들에게 부치지는 않았다. 베토벤은 가혹한 운명에 대한 넋두리를 쓰다가 오히려 희망의 실마리를 찾았다고 전해진다. 베토벤은 "내면에 있는 모든 악상을 불러내기 전에 세상을 떠나는 것은 억울하다. 올테면 오라. 용감하게 맞서겠다"며 가혹한 운명에 맞서 극복하겠다는 결심에 이르게 된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음악을 선택한 베토벤은 이때부터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어 더욱 음악활동에 매진하게 됐다.
 
당시 베토벤은 건강이 계속 악화되는 상황속에서도 피아노 소나타 <월광>, 교향곡 <운명> <합창> 등의 위대한 명곡들을 완성해낸다. 소리를 빼앗긴 베토벤은 대신 온몸의 감각을 활용하여 음악을 느끼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았다.
 
베토벤은 악보를 연주할 때마다 피아노에 얼굴을 묻고 몸을 최대한 밀착하면서 소리 대신 각각의 음마다 다른 미세한 진동의 차이를 느끼면서 작곡을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베토벤은 피아노를 연주할 때마다 막대기를 입에 물고 다른 쪽 끝을 악기에 접촉시키는 방식으로 '음의 공명'을 확인했다.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악기를 경험하며 그 원리를 터득하고 있었던 베토벤이었기에 미세한 진동만으로 심지어 반음의 차이까지도 구분해내는 게 가능했다고. 음악에 대한 베토벤의 무서운 집념과 끈기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베토벤의 대표곡인 교향곡 <영웅>은 본래 프랑스의 전쟁영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을 모델로 하여 만들어진 헌정곡으로 기획되었으며 원제 역시 '보나파르트'였다. 베토벤은 특유의 까칠한 화법으로 "내가 음악만큼 전쟁을 알았다면 나폴레옹을 정복했을 것"이라고 할 만큼 나폴레옹에 대한 열렬한 팬심을 드러낸 바 있다. 하지만 정작 나폴레옹이 기대를 배신하며 황제로 등극하자 베토벤은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며 분노했다고 한다. 베토벤은 헌정을 취소하고 특정인이 아닌 '영웅'을 지칭하는 의미로 곡의 제목도 바꾸었다.
 
1808년 38세의 베토벤은 그의 또다른 걸작인 교향곡 5번 <운명>을 선보인다. '고난을 넘어 환희로'라는 주제의식을 극적으로 표현한 <운명>은 바로 청력상실이라는 운명을 극복하려는 베토벤 본인의 의지가 강하게 묻어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베토벤의 추종자였던 안톤 쉬들러가 베토벤이 이 곡을 두고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는 말을 했다고 주장했고 그래서 교향곡 5번의 제목이 <운명>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소문도 있다.
 
단 4개의 음표만으로 전혀 다른 의미의 구성이 전체 악장까지 변화무쌍하게 이어지는 <운명>의 구성은, 마치 작은 블록이 전체 구조를 관통하는 듯한 놀라운 짜임새가 돋보인다. 베토벤의 <운명>은 청중들의 음악감상 문화를 바꾼 것으로도 유명한데, 반복 사용된 '운명 모티브'의 변화를 알아채기 위하여 연주 내내 집중하며 몰입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연애편지에도 등장한 '불멸의 연인'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당시 베토벤에게는 누구보다 위안이 되어준 '불멸의 연인'으로 불린 존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불멸의 연인'은 베토벤이 직접 쓴 연애편지에도 등장하는 표현이기도 하며, 베토벤은 '나의 천사이자 전부이자 분신'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각별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베토벤은 편지에서 상대에 대한 달콤하고 절절한 애정은 물론이고, 개인적 고통까지 자신의 속내를 그 어느 때보다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베토벤은 '불멸의 연인'의 정체나 실명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베토벤 사후 그의 서랍에서 유품으로 편지가 발견되면서 학자들 사이에서는 '불멸의 연인'의 정체가 과연 누구인지 다양한 해석이 쏟아졌다. 베토벤은 생전에 육체적 사랑보다는 정신적 사랑을 중시했고, 기혼녀-귀족여성-옛사랑의 친언니 등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 전문'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상대들과 나홀로 사랑에 빠지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베토벤의 친구인 프렌츠 브렌타노의 아내였던 안토니 브렌타노. 베토벤의 제자이자 <월광>의 헌정대상으로 알려진 줄리에타 귀차르디, 실제로 베토벤과 교제했던 것으로 알려지며 '엘리제를 위하여'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소문도 있는 테레제 말파티 등이 '불멸의 연인'으로 유력한 후보에 거론된 인물들이지만 정확한 사실은 끝내 알려지지 않았다. 베토벤은 수많은 짝사랑에도 불구하고 생전에 그 누구와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홀로 쓸쓸하게 남겨졌다.
 
1817년 47세의 베토벤은 미세하게 남아있던 청력마저 모두 잃게 된다. 이 무렵 베토벤은 자신의 장애를 솔직히 인정하고 '대화 노트'를 통하여 필기로 질문을 받으며 육성으로 직접 대답해주는 방식으로 사람들과의 소통을 이어갔다고 한다. 침체기였던 1813년에서 1820년까지 베토벤은 7년간 단 6곡을 작곡하는 데 그치며 조금씩 잊혀져가는 듯했다. 이 당시 베토벤은 청력상실 외에도 온갖 질병에 시달리며 건강을 잃었고, 성격도 더욱 예민하고 괴팍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은 그의 인생을 지탱하는 마지막 희망이었고, 베토벤은 말년에 최후의 걸작으로 불리우는 교향곡 <합창>을 완성하게 된다. 1824년 5월 7일, 베토벤은 청력을 완전히 상실했음에도 초연에서 본인이 지휘할 것을 끝까지 고집하면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합창>을 완주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의 이야기에 따르면 초연에서 청중들의 흥분에 공연이 몇 번이나 중단될 만큼 반응이 뜨거웠다고 한다, 모든 지휘를 마친 베토벤이 그제야 뒤를 돌아 청중들의 반응을 확인하자, 우레같은 박수가 쏟아지며 감동의 눈물을 쏟아낸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어쩌면 베토벤이 남긴 인생 최후의 불꽃과도 같은 장면이었다.
 
1827년 3월 26일, 병세가 악화되며 혼수상태에 빠졌던 베토벤은 57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한다. 사망 원인은 간경변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거장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고 그의 장례식과 추모행렬에는 2만 명이 넘는 군중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슈베르트, 체르니 등 당대의 거장들도 베토벤을 배웅하는 마지막 길에 동참했다.
 
역사에는 수많은 천재 예술가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베토벤은 유난히 가혹한 운명을 이겨내고 '인간승리'를 일궈낸 주인공이라 점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으며 '불멸의 거장'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는 평생 병마와 외로움, 낡은 관습에 저항하면서 치열한 삶을 통하여 음악인이자 예술가로서의 정신을 지켰다. 그리고 그의 삶은 곧 작품에 녹아들어 인류에 길이 남을 명곡들도 탄생했다. 베토벤은 떠났지만, 그의 인생과 철학이 남긴 위대한 음악들은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 곁에서 변함없이 사랑을 받는 진정한 '불멸의 연인'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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