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08 11:05최종 업데이트 23.07.08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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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정상, 오름, 파란 바다, 검은 돌 해변, 어선들의 불빛, 돌고래와 가마우지... 제주는 여행천국이지만 제주의 아름다움을 아무리 상찬한다고 해도 깊고 넓게 깔린 제주4.3을 암막처럼 가리진 못한다. 지난밤의 역사이고 오늘 아침의 상처다.

그리하여 제주는 우리나라 다크 투어리즘의 대표 격이다. 4.3의 수많은 흔적에서 전쟁과 평화, 학살과 생존, 민초와 권력, 우리 역사와 세계사의 연결 등등을 걷고 보고 더듬어볼 수 있다. 제주를 시계방향으로 일주해보자.
 

제주4.3평화공원 비설 ⓒ 윤태옥

 
제주4.3 역사기행의 출발은 4.3평화공원이다. 기념관과 야외 두 부분으로 돼 있다. 기념관의 전시실은 4.3의 역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보여준다. 야외에는 위패봉안실, 위령탑과 각명비, 행방불명인 표석, 발굴유해 봉안관, 조형물 비설이 있다. 

평화공원 아래쪽 주차장에서 들어서면 좌측에 둥근 돌담이 먼저 보인다. 비설(飛雪)이다. 담을 따라 돌아 들어가면 스물다섯 살의 엄마가 눈밭에서 갓난이를 끌어안은 채 고꾸라질 듯 버티고 있다. 엄마의 표정이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표정만으로도 전율이 인다. 


조금 올라가면 우측에 봉안관이 있다. 발굴을 통해 수습된 4.3희생자들의 유해 380기가 안치돼 있다. 사람의 뼈가 뒤엉킨 발굴현장(재현)에서도 눈을 질끈 감게 된다. 봉안관을 나와 더 올라가면 행방불명 희생자들을 만나게 된다. 4.3에서 끌려가고 사라졌으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확인을 하지 못하고 있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다. 3976기의 표석마다 이름이 하나씩 새겨져 있다.

그 옆의 위령제단에는 1만4412명의 위패가 있다. 위령탑을 둘러싸고 있는 각명비는 마을별로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상과 함께 사망일시 장소와 나이가 기록돼 있다. 마을마다 깨알같이, 집집마다 디테일하게 한 사함 한 사람 차곡차곡 죽인 것이다. 전체 희생자는 2만5천 명에서 3만 명으로 추정하지만 평화공원에 기록된 이름은 반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기념관으로 들어서면 전시실에서 가장 먼저 백비를 만난다.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은 비가 눕혀 있다. 제주4.3은 사건 반란 항쟁 등등 여러 가지 명칭이 불리곤 하지만 공식명칭은 제주4.3사건이다. 정명이 되지 않은 것에 서운한 사람이 많지만 각자의 상상력을 끄집어내는 효과도 있다. 백비를 지나면 제주4.3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이후의 강요된 침묵과 진상규명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역사를 잘 보여준다. 찬찬히 보자면 한 시간도 부족하다. 
 

제주4.3평화공원 야외 각명비 ⓒ 윤태옥

 

제주4.3평화공원 위폐봉안실 ⓒ 윤태옥

 

제주4.3평화공원 유해발굴 현장(재현) ⓒ 윤태옥

 
4.3기념공원에서 바닷가로 내려가면 조천, 물빛이 아름다운 함덕해수욕장이 나온다. 그 동쪽에 서우봉이 있고, 서우봉 바닷가로 몬주기알(북촌리 2683)이 있다. 선흘리 사람들이 집단으로 총살(1948.11.26)을 당했다. 학살은 정부수립 이후의 초토화 작전(1948.11~1949.3)과 한국전쟁 직후의 예비검속(1950.8)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로 발생했다. 

몬주기알에서 큰길로 나오면 너븐숭이4.3기념관(북촌리 1599)이 있다. 기념관 앞에 애기무덤이 있다. 그 안쪽으로는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을 기리는 문학비가 있다. 열두 개의 석물이 널브러진 시신들처럼 바닥에 이리저리 쓰러져 있다. 현기영은 1979년 11월 소설에 4.3의 신음소리를 담아 세상에 던졌다. 아파서 앓는 소리를 했으나 시끄럽다고 잡혀갔다. 글쟁이의 손가락은 고문에 짓이겨졌다.

문학비에서 더 걸어가면 북촌초등학교에 이른다. 1949년 1월 17일, 4·3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북촌리 학살사건이 그곳에서 벌어졌다. 북촌리 주민 500여 명이 한 날 한 시에 불귀의 객이 됐고 마을은 다섯 채만 남기고 모두 불탔다.

비자림을 지나 다랑쉬굴(세화리 2605)로 갈 수 있다. 다랑쉬굴은 주민들이 피신해 살던 동굴이었다. 토벌대가 수류탄을 던져 넣고 불을 질러 11명이 굴속에서 죽었다. 1991년 제주4.3연구소에서 시신을 발견했고 다음해 4월 세상에 공개하면서 큰 충격을 주었다.

경찰과 행정당국은 유족들을 강박해 45일 만에 화장한 뒤 바다에 뿌리게 했다. 학살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살아남은 자들과 이별하는 절차도 억누르고, 기억하고 발언하는 것 자체를 핍박한 것이다. 다랑쉬굴입구를 콘크리트로 봉해버렸으나 공기가 통하는 숨골을 더듬어 볼 수는 있다. 
 

현기영 순이삼촌 문학비 ⓒ 윤태옥

     

다랑쉬굴 입구에서 보는 다랑쉬오름(좌)와 아끈다랑쉬(우) ⓒ 윤태옥

      
다랑쉬굴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성산 일출봉이다. 일출봉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광치기해변의 북쪽 끝에 터진목이 있다. 성산읍 사람들이 학살당한 곳이고 지금은 위령탑이 세워져 있다.

아름다운 풍경에 슬픈 역사가 손깍지를 끼고 있다. 당시에 서북청년단원만으로 조직된 서청특별부대는 성산동국민학교에 3개월 정도 주둔했다. 고문과 처형이 매일매일 자행되던 곳이다. 지금은 일부 폐허(성산리 179-4)가 남아 있고 그 앞에 표지가 설치돼 참혹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표선해수욕장의 모래 해변을 한모살이라고 하는데 이곳 역시 학살지다. 중산간 마을 사람들이 피신해 있다가 잡히면 이곳에 끌려왔다. 157명이 한꺼번에 학살당하기도 했다. 한모살의 학살터 표지는 표선도서관 입구(표선리 40-96)에 있다.

남원교차로에서 북쪽으로 1118번 도로를 가다가 소로로 들어가면 현의합장묘(수망리 893)를 찾을 수 있다. 큼지막한 봉분 세 개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널찍하고 말끔해서 안도의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1949년 1월 주민 80여 명이 의귀국민학교에 집단으로 수용됐다가 학살당했다. 유족들이 모여 봉분을 단장하고 산담을 쌓은 것이 1964년이었다. 2003년 지금의 묘역으로 이장됐다. 현의합장묘 원래의 자리(의귀리 765-7)에도 표지가 있다. 
 

성산동국민학교 서북청년단 특별부대 주둔지 ⓒ 윤태옥

 

표선 한모살 ⓒ 윤태옥

 

현의합장묘 ⓒ 윤태옥

 
서귀포 중문성당은 4.3기념성당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신사가 있었고 4.3에서는 학살터였다. 종교는 죽은 사람과 살아남은 사람을 위로할 때 종교답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송악산으로 가다보면 산방산 직전에 안덕면 위령비(사계리 3630)가 있다. 

산방산을 지나서 백조일손묘역(상모리 586-4)을 찾아갈 수 있다. 조상은 서로 다르지만 한곳에서 뒤엉켜 죽임을 당해 하나의 자손이 됐다는 뜻이다. 1950년 전쟁이 터지자 대한민국 정부는 소위 사상이 불온한 자들을 예비검속으로 잡아들였다. 모슬포에서는 8월 20일 새벽에 200여 명을 총살했다. 유족들이 시신을 겨우 수습한 것은 1956년 5월.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죽임을 당한 모슬포 사람들을 같은 곳에 안장한 것이다.

그러나 당국은 유족들을 불러 파묘하라는 회유와 협박을 계속하다가 5·16군사쿠데타 직후에는 위령비를 깨버리기까지. 깨진 조각들은 지금 위령비 옆에 전시돼 있다. 죽은 자의 집조차 이렇게 해야 했을까. 이들이 학살당한 곳은 섯알오름이다. 그곳에도 추모비(상모리 1590-3)가 있다. 

모슬포에는 문형순·조남수·김남원 세 사람의 공덕비(동일리 2995-1)가 있다. 문형순은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 경찰에 투신해 제주도에 부임했다. 1948년 12월 군경은 대정읍 하모리의 좌익 총책을 검거해 관련자 백여 명의 명단을 압수했다. 이들 모두 처형위기에 놓이자 조남수 목사가 자수와 선처를 건의하고 김남원 민보단장도 설득에 나섰다.

이들이 자수하자 모슬포 경찰서장 문형순은 이들을 전원 훈방했다. 자신의 목숨을 건 일이었다. 문형순은 1950년 8월 성산포 경찰서장일 때에 예비검속자들을 총살하라는 군당국의 명령을 거부했다. 문형순의 흉상은 제주경찰청 본관 앞에도 있다.

영모원(하귀1리 1134-1)은 중산간 지역에 있다. 하귀리 주민들이 독립운동가와 군경과 4.3희생자를 한 곳에서 추모할 수 있도록 세운 합동 위령단이다. 애국절사영현비 호국영령충의비 4.3희생자위령비가 나란히 서있다. 4.3에서 사후의 화해 사례로 종종 거론된다. 죽은 자들에게도 화해가 성립하는 것인지, 소심한 나로서는 짐작하기 어렵다.
     
다시 해안도로를 따라 가면 제주비행장 바로 바깥에 있는 도두봉을 만난다. 이곳에서는 공항에서 뜨고 내리는 비행기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제주공항 자리에서 가장 많은 학살이 벌어졌다. 발굴된 것만 382구, 아직도 활주로 밑에 유해가 깔려 있을 것이다. 제주공항 북쪽 경계 바로 바깥에도 예비검속자 위령비(용담삼동 1199)가 있다. 
 

섯알오름 추모비 ⓒ 윤태옥

 

 

영모원 ⓒ 윤태옥

 

도두봉에서 바라본 제주공항 활주로 ⓒ 윤태옥

 
제주항 여객터미널 건너편에는 주정공장 옛터가 있다. 학살 전에 집단으로 수용하던 시설이었다. 제주항국제여객터미널 동쪽의 별도봉 바닷가에는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이 있다. 1949년 1월 젊은이 수십 명을 학살하고 마을을 전부 불태웠다. 나머지 주민들은 주변마을로 이주해야 했다. 곤을동은 사람과 집 모두가 사라져버렸다. 지금 그곳을 걸어보면 얕은 담장들이 집터였던 것을 말해주고 있다. 역사를 모르고 가면 걷기에 참 좋은 꽤나 고즈넉한 바닷가이거늘...

제주농업학교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일제가 패망한 그해 9월 10일 제주도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오대진) 결성식이 이곳에서 열렸다. 미군이 9월 28일 제주의 일본군으로부터 항복을 접수한 것도, 미59군정중대 본부도 이곳이었다. 4.3이 발발하면서 9연대, 11연대, 2연대가 교대로 주둔했다. 도내 유지들과 지식인, 자수자와 체포자들이 잡혀와 고문과 취조를 당한 후 처형되거나 이곳을 거쳐 육지의 형무소로 끌려가기도 했다. 제주농업학교는 도남오거리 일대에 있었다. 

제주 시내에는 서문사거리와 동문시장을 잇는 대로변에 관덕정이 있고, 그 안쪽으로 제주북초등학교가 있다. 4.3의 시발점이라고 하는 1947년 3.1절 기념식은 북국민학교에 열렸다. 

제주4.3에서 군인과 경찰, 서북청년단 등에서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가 있었다. 4.3특별법에 의해 확정된 희생자는 2020년 현재 총 1만4532명, 이 가운데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는 1500여 명, 16%다.

국가 현충시설로 관리되는 제주의 십여 곳의 충혼묘에서 이들을 만날 수 있다. 제주시충혼묘(노형동 산19-2)는 입구에 박진경 추도비가 세워져 있다. 1948년 5월 부임한 그는 6주 동안 4천여 명을 체포할 정도로 강경 일변도였다. 박진경은 무자비한 토벌에 불만을 가진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남원 서귀포 조천의 충혼묘에서 서북청년단 애국단 민보단의 묘나 추모비를 볼 수 있다.

무장대 자체의 흔적은 거의 없다. 마지막까지 무장대를 이끌던 이덕구는 1949년 6월 경찰과 교전 중에 사망했다. 그는 가족묘(제주시 회천동 672)에 묻혀 있다. 현의합장묘에서 멀지 않은 송령이골에도 무장대의 무덤(의귀리 1974-3)도 있다. 
     

남원 충혼묘 ⓒ 윤태옥

 

서귀포 충혼묘 경찰 충혼비 ⓒ 윤태옥

 
이렇게 제주도를 일주했다. 이것 이외에도 많은 흔적이 있다. 더 자세한 것은 제주4.3연구소 등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제주를 떠나 여수로 건너갈 시점이다. 

착잡한 마음으로 되새겨 본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그때는 그랬으나 앞으로는 절대로 그러지 않아야 할 것"을 이야기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 그리고 생각이 다른 사람을 죽여 없애면 그 생각 전체가 없어질 것이라는 대단한 착각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제주4.3은 그 시작이다. 4.3은 여수와 순천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한 전체로, 북진하면서는 수복지까지 확산돼 갔다.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아야 할 역사다.

[필자 알림] 
2020년 이후 계속해온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답사여행 – 휴전선(강화·교동~강원·고성)>을 오마이뉴스 독자들과 함께 하고자 합니다. 휴전선 답사여행 9차(10.20~25)에 동반하고자 하는 독자는 다음 링크의 공지를 찬찬히 읽어본 뒤에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https://blog.naver.com/kimyto/223104159541 
   

제주4.3투어리즘 ⓒ 봉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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