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08 12:03최종 업데이트 23.08.08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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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과장하면, '내가 산방산을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동안 돌을 만지느라 몸을 너무 많이 썼어요. 산지에서 돌을 가져와 조각하고, 설치하고, 돌집을 짓고, 관람로 바닥에 돌을 깔고... 23년을 작업하면서 엄청난 양의 돌을 들었다 놨다 했는데, 그 양이 아마도 산방산만큼 되지 않았을까 하고 동화적인 상상을 해봅니다."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상곶(마을에서 가까운 곳에 자연상태로 남아 있는 숲 지대) 5천여 평에 자리 잡은 돌하르방 미술관을 일궈낸 김남흥 관장의 말이 조금도 과장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공원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것 같은 넓은 야외 미술관은 곳곳에 그의 땀과 혼이 밴 돌하르방 작품과 돌집들로 이루어졌다. 김 관장 자신도 돌하르방과 닮았다. 검게 탄 피부와 거친 손, 꾸미지 않는 넉넉한 인상이 그랬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제주도미술대전 우수상을 3회나 수상하고, 초대작가로 잘 나가던 그가 어떻게 해서 돌하르방 조각의 길을 걷게 됐을까?
 

돌하르방을 닮은 김남흥 관장 화가에서 조각가로 변신한 후 23년간 조선시대 돌하르방을 재현하고, 다양한 형상의 창작 돌하르방을 만들었다. ⓒ 황의봉

 
현상과 이면, 어느날의 깨달음

"전업 화가의 길로 접어들면서 제주 풍경의 아름다움에 취해 계절 따라 그림을 그리러 다녔습니다. 1997년으로 기억되는데, 애월읍 어음2리에 초가집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집이 있길래 찾아가 3, 4일 정도 그림을 그린 적이 있어요. 그때 그곳에 사시던 할머니와 가까워졌지요. '어디서 옵데가? 무슨 일 햄수가?' 하고 물으시면 제가 이런저런 대답을 하고, 저도 '이 집 언제 지엇수과? 가족은 어떵 되엄수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초가집의 아름다움에 취해 그림을 그리다가 할머니와 대화를 하고 가까워지면서 화폭에 임하는 마음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는 겁니다. 저는 이걸 현상과 이면이라고 비유하고 싶어요. 현상만 보고 그리다가 그 감춰진 이면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제주에서 태어나 자랐으면서도 제주를 너무 몰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이때부터 우당도서관과 제주대학교 향토자료실 등을 드나들고 문화유적지 현장을 답사하면서 인문학 공부를 하던 중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돌하르방을 만나게 됐습니다."


김 관장이 뒤늦은 제주 인문학 공부를 하던 중 옛 돌하르방을 만난 것은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예술가로서의 그의 길이 달라졌다. 조각가로 변신을 했고, 돌하르방미술관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 운명적 만남에서 그는 무엇을 봤을까.

"제주도에 산재한 270여 년 전 돌하르방을 일일이 답사하면서 이 섬에 돌하르방이 만들어진 이래 지금까지 이렇게 편안한 얼굴로 제주 사람의 결과 너무도 닮았음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그전까지 제가 자랐던 서귀포에서 본 관광상품 돌하르방과는 전혀 다른 감동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여지껏 본 돌하르방이 화장을 잘한 얼굴이었다면, 참 얼굴은 바로 이거였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죠. 그래서 그림은 좀 뒤로 하고 돌하르방 조각을 하게 된 겁니다. 이때부터 남아 있는 조선시대 돌하르방 48기(유실된 1기 포함해 제주도에 46기, 국립민속박물관에 2기)를 똑같은 크기, 똑같은 모습으로 재현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 재현 과정에서 '왜 제주 사람들이 이 돌하르방을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 본질을 찾아가다 보니 당시의 불안했던 삶을 위로받고자 돌하르방을 세웠을 거라는 결론을 얻게 되더군요. 그렇다면 내가 창작자로서 오늘날 우리의 삶에 희망을 줄 수 있는 돌하르방을 만들어보자, 돌하르방의 몸짓을 빌려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돌하르방이 불안한 마음을 해소하고자 만들었던 것처럼 오늘의 제주도 역시 평화라는 화두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마침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를 평화의 섬으로 선포하기도 했고요."

 

원조 돌하르방 재현작품 조선시대 김몽규 목사 주도로 건립한 돌하르방 48기를 김 관장이 똑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재현해 전시하고 있다. ⓒ 황의봉

 
원조 돌하르방

김남흥 관장은 돌하르방 조각가이기 전에 많은 문헌과 현장답사를 통해 관련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전문가다. 그에게 감동을 안겨줬다는 원조 돌하르방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탐라기년'이란 문헌에 의하면 1754년에 김몽규 제주 목사가 옹중석(翁仲石)을 창건했다고 기록된 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중국 진시황 때 흉노족 등 북방 이민족을 물리쳤다는 거인 완옹중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죽은 후 진시황이 그의 동상을 아방궁 앞에 세웠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고요.

제가 상상을 해보면, 김몽규 목사는 본토 사람으로 제주에 부임해왔을 겁니다. 막상 제주에 와보니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고, 또 당시에 전염병이 돌아 800여 명이 죽어 나갔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흩어진 민심을 모을 작업이 필요했겠지요. 김몽규 목사는 아마도 완옹중이란 사람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주 사람들의 삶이 든든해질 것을 기대하면서 관 주도 사업으로 옹중석을 만들어 동·서·남 성문 앞에 문지기 역할로 세우게 된 것이지요. 우석목 무석목 등으로 불리다가 1971년 제주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돌하르방이라는 명칭이 붙여졌습니다."


돌하르방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운반수단이나 장비 인력 등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을 것이다. 그리고 돌하르방의 모습도 지역에 따라 다르다.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을까?

"제가 보기에 이 사업은 제주도 역사상 가장 큰 국책사업이었습니다. 당시 제주도 인구를 3만 5천 정도로 추산하거든요. 활동 인구와 남녀 비율을 감안하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1만5천 이내였을 텐데, 동시다발적으로 동원하는 작업이 있었다면 정말 많은 사람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했을 겁니다. 지금 보면 제주시 산지천 지류의 절개지에 조각 재료로 쓸 수 있는 형태의 돌들이 있습니다. 이걸 지렛대로 밀어 떨어뜨리고, 돌하르방 형태로 조각을 한 뒤 성문까지 끌고 와서 다시 일으켜 세웠을 겁니다.

제주목성을 지키던 돌하르방은 우락부락하고 무장을 한 모습으로 키가 큽니다. 반면 정의현성(서귀포 동쪽, 오늘날 성읍리)이나 대정현성(서귀포 서쪽, 대정읍)의 돌하르방은 각각 12기로 제주목의 절반에 불과하고 키도 작아요. 제주 목사가 주도했고 정의현과 대정현에서 따라갔으니 관등의 차이에 의한 위계질서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당시 지역마다 부근에서 활용할 수 있는 돌들도 달랐기 때문에 석수들의 표현도 다르게 나타난 것이고요. 그러나 돌을 가장 적게 깎아내면서 형태를 끌어낸 기법은 공통적이었습니다."


과거 제주목 성문을 지키던 돌하르방은 현재 제주대박물관 제주KBS 제주시청 삼성혈 제주공항 관덕정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돌문화공원 등에 산재해 있다. 원래의 자리에서 벗어나 있는 셈이다. 김 관장은 "1971년 민속자료로 지정되기 전에 제주지역의 힘 있는 데서 이걸 가져다가 조경적 장치로 쓴 것인데, 제주시의 도시화 과정에서 원래의 흐름이 다 무너져버렸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돌하르방, 메시지를 품다

화가에서 조각가로 변신한 김남흥 관장은 옛 돌하르방 48기를 그대로 재현해낸 데 이어 다음 작업으로 자신의 철학을 반영한 돌하르방 창작에 나섰다. 그가 의도한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대표적인 작품들은 어떤 것일까?
 

허그 하는 돌하르방 돌하르방미술관 초입에서 만날 수 있다. ⓒ 황의봉


"'허그 하는 돌하르방'이 대표적인데, 미술관 초입에 서 있습니다. 또 '다리를 꺼낸' 돌하르방도 있습니다. 기존의 돌하르방을 보면 다리가 없습니다. 몸통만 보이는 정적인 자세로 한 자리를 수백 년을 지키고 있었다면, 이 작품은 동적인 돌하르방, 그러니까 '평화의 전도사'로 움직인다는 의미를 담은 것입니다. 손가락 하트를 한 돌하르방, 꽃을 든 돌하르방, 카메라를 들고 사진 찍는 돌하르방 등 다양한 형태로 창작을 했어요."
 

사진 찍는 돌하르방과 손가락 하트 날리는 돌하르방 사진 찍는 돌하르방(좌)는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는 모습이 웃음을 준다. 손가락 하트 날리는 돌하르방(우)는 돌하르방미술관의 인기 전시물이다. ⓒ 황의봉

 
김 관장의 돌하르방 작품은 제주도 여러 곳에서도 만날 수 있다. 카카오 제주 본사에 설치된 인터넷 하는 돌하르방은 카카오의 사회공헌 프로그램 상징물로 유명하고, 난타호텔 정문에는 칼춤을 추는 돌하르방이 눈길을 끈다. 함덕해수욕장에 가면 선탠 하는 돌하르방, 튜브 타는 돌하르방을 볼 수 있고, 선흘리 동백동산 습지센터에서는 기타 치는 돌하르방, 책 읽는 돌하르방도 만날 수 있다.

그의 창작 돌하르방을 보면 하나같이 개성이 뚜렷하다. 무엇보다 따뜻한 인간미를 느끼게 한다. 굳이 평화라는 지향점을 애써 읽지 않더라도 저절로 무언의 메시지가 전해오는 듯하다. 묵직한 돌이 만들어내는 묘한 감동이다. 돌하르방의 이런 묘한 매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돌하르방의 재료는 구멍이 많은 돌, 그러니까 다공 현무암인데요. 이 재료의 가장 큰 매력은 일단 편안하게 해준다는 점입니다. 화강암은 면이 치밀해 단단하다는 느낌을 주는 데 비해 현무암의 표면에는 구멍들이 많다 보니 화강암과는 전혀 다른, 경계심 없이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느낌을 줍니다. 화강암이 순백의 도화지라면 현무암은 누런 종이라고나 할까요. 하얀 도화지 위에 드로잉을 하려면 선을 하나 옮기려 해도 어렵게 느껴지지만, 채도가 깔린 누런 종이 위에서는 드로잉 선이 나가는 게 편하거든요. 조각도 마찬가지로 현무암이 편안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이 다공질의 현무암은 반짝거리지는 않지만 오래 봐도 지겹지 않은 매력을 준다는 게 조각가로서 느끼는 감정입니다. 거기다가 현무암 원석을 조각하다 보면 생채기가 나고 회색 조로 변하다가 한 10여 년 정도가 지나면 본래 자연의 깊이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이에요. 표면의 구멍을 통해 외부의 기후조건, 예컨대 습도라든가 먼지 이끼 부유물 등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돌이 익어가는 겁니다. 세월과 더불어 자연과 한 몸이 되어가면서 편안함으로 다가오는 게 현무암 돌하르방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팔짱 내주는 '평화의 전도사' 다리를 땅속에서 꺼낸 동적인 형상으로 제작해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대표적인 돌하르방. ⓒ 황의봉

 
제주사름으로서

화가이자 조각가로서 김남흥 관장은 제주가 당면한 이슈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소신껏 의사를 표현하고 연대하는 '제주 사름'이다. 2021년 1월 문화예술계 인사 116인이 발표한 '제주 제2공항 건설 반대 제주예술인 선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제주 사회 최대의 이슈에 대해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저는 보다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새 공항을 만들어야 한다는 건 정말 아니라고 봅니다. 양을 쫓아갈 게 아니라 질이 중요한 사회로 가야 근사한 삶이 가능한 것 아니겠어요. 수용능력 넓히기 위해 손쉬운 방식을 쓰겠다는 것인데, 제가 보기엔 지속가능성도 커 보이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는 3개 마을에 피해를 주고, 이 좁은 섬에 더욱 많은 사람이 밀집하게 되면 상·하수도 오·폐수 등 지금도 문제가 되는 환경문제가 더 악화할 게 분명하잖아요. 기대할 수 있는 좋은 결과보다는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는 요인들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 2공항 이슈에는 토지문제와 같은 많은 사람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 해결책을 찾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환경문제 등으로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반면 건설을 원하는 사람도 있고 행정책임자는 눈치를 보고 있어요. 과거 광우병 사태 때는 국민이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돼 있었기 때문에 유모차 부대가 나오면서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지만, 이 문제는 간단치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제 생각엔 객관적 지표를 통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제3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현실 파악 능력이 높아져야 한다고 봅니다. 객관적 지표를 많은 사람에게 설파하고 알리는 게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합니다."
 

거대한 돌하르방 땅속에 묻혀진 가상의 몸통까지 합치면 키가 15미터에 달한다. ⓒ 황의봉

 
말이 나온 김에 빠르게 변화 중인 제주의 어제와 오늘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돌하르방을 통해 평화의 메시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작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난 제주민의 역사를 보면 거친 자연환경에서 생존을 이어가기 위해서 개척정신이 필요했고, 또 힘들어서 서로 협력하는 구조의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개척'과 '협력' 두 가지 축을 저는 제주 정신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해방 이후 자본주의 사회로 들어오면서 제주도가 관광거점이 되고, 개발 논리에 따라 지역주민들의 이해관계가 달라지면서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는 겁니다. 제주도가 돈이 되는 섬이 되면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제주에는 마을 공동목장이 많은데, 여기에 골프장이니 뭐니 해서 개발사업들이 들어오게 되면 이해관계에 따라 주민들 사이가 갈라지게 됩니다. 강정해군기지 문제도 당시 지역주민들 사이에 이 사안을 들여다보는 시선들이 달랐기 때문에 공동체가 깨져버린 것이에요. 제2공항 건설이나 한라산 케이블카 설치 문제도 마찬가지이고요.

저는 원인을 알았으니 갈등을 치유하고 제주 공동체 정신을 회복할 방법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닫혀 있는 인간의 마음을 다시 열어 회복하는 게 어려운 일이지만,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상대를 편안하게 대할 수 있게 하는 구조를 자꾸 만들어야 합니다. 체육대회나 경로잔치 같은 마을 행사라든가 혹은 제주도정이 어떤 전담기구를 통해 상처의 흔적들을 제거할 수 있는 기발한 관계들을 만들어나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김 관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예술작업을 통해 제주 사회에 도움이 될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제주 6월 항쟁 30주년을 맞아 중앙성당에 세워진 민주항쟁 기념 표석을 제작했는가 하면, 제69주년 4·3프롤로그전 <바람 잔 날, 그때 제주>에 작품을 전시하기도 했다. 북촌초등학교의 정문 형상을 새롭게 바꾼다든가 북촌리사무소의 표지석을 새로 만드는 일도 그런 사례의 하나다.

제주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는 돌하르방미술관 운영방침에도 그대로 묻어난다. 올해로 4회째 열리는 꿈다락문화예술학교가 좋은 예다. 5월부터 10월까지 매주 일요일 진행하는 발달장애 가족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곶자왈 맨발 걷기, 숲 놀이, 미술놀이, 요리활동, 전래놀이 등을 통해 문화 여가생활을 지원하자는 취지다.
 

돌하르방미술관 입구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5천여 평의 숲속에 조성한 이 야외미술관은 영국 BBC와 일본 NHK 등 세계 유수의 방송매체가 현지 촬영해 소개한 명소다. ⓒ 황의봉

 
북촌 돌하르방미술관은 2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숲속 부지에 김남흥 관장의 현무암 작품들이 계속 들어설 예정이다. 김 관장은 돌하르방 외에 동자석(무덤 앞에 세워진 사내아이 형상의 작은 석물)도 만들어 더욱 풍부한 볼거리를 갖춘 '자연 문화 예술 평화'의 공간으로 만든다는 구상이다. 그림으로, 조각으로 제주를 표현하고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그의 의미있는 작업이 어디까지 뻗어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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