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12 10:46최종 업데이트 23.08.12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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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회흐(독일 오스부르크 출판사에서 나온 한나 회흐 전기의 표지)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시대(1918-1933) 베를린에서 활동한 예술가 한나 회흐(Hannah Höch, 1889-1978)는 우리나라의 나혜석과 유사한 인물이다. 그는 급진적 아방가르드 예술가 그룹 '다다'의 유일한 여성 멤버로서 남성 중심 사회가 배타시하던 문제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작품들을 선보였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오랜 시간 '맨즈 클럽(Men's club)의 단발머리 뮤즈'에 머물러 왔다. 역사상 가장 선진적인 헌법 위에 세워진 독일 최초의 공화국에서 '신여성' 미술가로 살고자 했던 그의 바람은 비교적 최근에서야 활발하게 재평가받고 있다.

회흐의 예술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아름다운 여인(Beautiful Girl)>(1920)은 시대의 여성상을 구체화한 작품이다. 그는 신문과 잡지 광고 등에서 얻은 사진 이미지를 재조합해 형체가 불분명한 여성의 초상을 만들었다. 잔뜩 부풀린 헤어에 수영복 차림을 한 여성은 바다를 연상시키는 푸른색의 BMW 자동차 로고, 거대한 크기의 차량 부품들, 스톱워치 등과 뒤엉켜 있다. 얼굴마저 전구로 대체된 이 여성의 신체는 자본주의 산업화 시대의 상품과 다름없이 취급된다. 이 작품은 독일 최초의 민주정부가 보장한 근대적 여성의 삶이 현실과 커다란 괴리를 두고 있음을 지적한다.
 

한나 회흐의 <아름다운 여인(Beautiful Girl)>(1920)

 
바이마르공화국 시대의 베를린

회흐가 활동한 바이마르공화국 시대의 베를린은 기성 가치에 대한 회의감과 새로운 사회 건설에 대한 기대감이 공존하는 도시였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제국을 붕괴시키고 주권 재민의 공화국으로 새롭게 출발하였으나, 패전국으로서 떠안게 된 막대한 배상금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갈등으로 사회는 불안했다. 특히 오랜시간 독일의 수도였던 베를린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여전한 열망과 새 시대에 대한 의구심이 좀처럼 사그라들 줄 몰랐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불안하고 불확실한 현실은 다다, 표현주의, 신즉물주의, 바우하우스 등 그 어느때보다 다양한 유파의 미술 운동을 잉태하며 베를린을 국제적인 미술 도시로 성장시켰다. 여기서 회흐가 속했던 예술가 그룹 '다다'는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하면서 공격적인 정치적 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에게 예술은 사회 비판을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본래 '다다'는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중립국인 스위스에서 결성된 국제적인 운동이다. 다다이스트들은 뉴욕, 베를린, 파리 등지로 뻗어나가며 전쟁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로 반전통, 반체제, 반예술 등 일체의 기성가치를 거부하는 저항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과학기술의 진보가 약속했던 미래가 유토피아 대신 일류 최초의 대량 살육전으로 비화되자 서구 문명사회를 지탱해 온 인간 이성과 합리주의 정신을 철저히 부정했다. 그중에서도 베를린에 도착한 다다는 가장 정치적 색채가 강한 분파로 변모했다.

포토몽타주 기법의 창시자
 

한나 회흐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배불뚝이를 다다 식칼로 베어내자>(1919-20) ⓒ Staatliche Museen

 
회흐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배불뚝이를 다다 식칼로 베어내자>(1919)는 베를린 다다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그는 역시나 시대의 주요 매체인 신문과 잡지가 '사실'로 전달하는 사진 이미지들을 재조합해 새로운 화면을 만들었다. '포토몽타주(photomontage)'라고 일컫는 이 미술기법은 회흐가 통렬한 사회비판의 도구로 고안한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화면은 정치인, 미술가, 문화계 인사들이 기계, 건물, 지도, 군중 이미지 등과 혼잡스럽게 뒤섞여 있고, 그 사이사이 텍스트가 중첩된다. 복잡하고 무질서해 보이지만 크게 보면 '다다'와 '반 다다(anti-Dada)'의 세계가 대치하는 구조다.

우선 '다다'의 세계는 베를린 다다의 주요 멤버들과 그들의 사상적 뿌리가 되는 인물들로 채워진다. 조지 그로스와 존 하트필드 형제, 라울 하우스만, 요하네스 바더 등이 마르크스와 레닌, 그리고 코민테른 독일 대표였던 카를 라데크와 같은 극좌파와 함께 어우러지는 풍경이다. 여기에 독일공산당(KPD)을 창안한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다다를 선전하는 모습으로 더해져 있다. 아인슈타인은 뜻밖의 인물로 보이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전쟁과 억압을 맹렬히 비판했던 평화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였다. 

한편 '반 다다'의 세계는 위의 인물들을 탄압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을 만든 주요 인사들로 가득하다. 프로이센 제국의 마지막 군주 카이저 빌헬름 2세를 중심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핵심 인사들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초대 대통령, 파울 폰 힌덴부르크 총사령관, 구스타프 노스케 내무장관 등이 줄지어 세워져 있다.

이렇게 보면 베를린 다다는 전쟁에 책임이 있는 지배권력과 싸우는 혁명 세력이다. 그런데 회흐에게 혁명의 대상은 정치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사회 전복을 꾀하고 혁명을 부르짖는 주체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러한 그의 비판적 입장은 그가 활용한 여성 이미지에서 잘 드러난다.
 

폴라 네그리 ⓒ 자료사진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다다의 세계를 차지하는 케테 콜비츠와 반 다다의 세계에 등장하는 폴라 네그리, 그리고 회흐 자신이다. 폴라 네그리는 독일에서 활동하다 미국 할리우드에서 일약 스타가 된 무성영화 시대의 섹스 심벌이자 팜므 파탈의 대명사다. 회흐는 그를 반다다의 세계에서 환영받는 존재로 제시했다. 즉, 남성 중심적 사회가 규정하는 여성성이란 결국 남성의 성적 환상이 만들어낸 볼거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화면 정중앙에서 다다의 세계를 총괄하는 인물은 케테 콜비츠다. 콜비츠는 평생 반전과 평화를 주제로 작업한 20세기 초 독일을 대표하는 판화가다.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판화를 주력 매체로 선택한 그는 1919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에 교수로 임용되었을 정도로 보수적인 미술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진보적인 여성이었다.
 

케테 콜비츠의 <죽은 아이를 안은 여인> ⓒ Kathe Kollwitz

 


동료들도 인정하지 않은 '여성' 예술가
 
따지고 보면, 폴라 네그리와 케테 콜비츠 둘 다 바이마르공화국 시대의 '신여성'에 해당했다. 이들은 젊고, 독립적이고, 가정보다 자신의 일을 선택한, 전통적인 성역할에서 벗어나는 여성들이었다. 바이마르공화국은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선진화된 헌법을 만들어 여성에게 투표권과 참정권을 부여하는 등 보다 폭 넓은 사회적 활동을 보장하는 듯 했다. 회흐는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듯 화면 오른쪽 하단부에 유럽에서 여성에게 투표권과 참정권을 부여한 국가들을 표시한 지도를 두고 그 곁에 자신의 초상사진을 서명 대신 넣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여성은 여전히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지 못했다.  
 
회흐가 베를린 다다의 첫 번째 전시인 <제 1회 국제 다다 페어>(1920)에서 위의 작품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그의 파트너였던 하우스만이 목소리를 내준 덕분이었다. 베를린 다다이스트들은 오랜 시간 회흐를 예술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남성 멤버들은 회흐의 작업을 예술이 아니라 '가내수공업'으로 낮잡아 보았다. 그 어떤 전통적 개념도 거부하는 것이 다다정신의 핵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심지어 회흐가 고안한 '포토몽타주' 기법이 다다의 특징적인 미술기법으로 자리잡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여도 또한 인정하려하지 않았다.

분명 다다는 작품을 선보이는 방식에서부터 전시와 세일즈를 합한 '페어(fair)'의 포맷을 선택하며 혁신을 추구했다. 이는 전통적인 부르주아 미학에 대한 반발의 표현이었다. 내용적으로도 아카데믹한 트레이닝이 필요 없는 포토몽타주를 사용해 바이마르 사회를 풍자하고 조롱하는 작품들이 절대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혁명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았다. 회흐가 굳이 "부엌칼"을 들고, 남성 다다이스트들을 전통적인 남성성과는 거리가 먼 댄서나 발레리나 또는 엄마가 어르고 달래주는 아기처럼 묘사한 까닭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겠다.  
 

제 1회 다다 전시회 오프닝 풍경 속 한나 회흐(착석 좌측), 베를린, 1920년 6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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