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02 12:40최종 업데이트 23.10.02 19:57
  • 본문듣기
주산(주판)의 마지막 세대이자 컴맹 제1세대, 부모에게 복종한 마지막 세대이자 아이에게 순종한 첫 세대, 부모를 부양했지만 부모로서 부양 못 받는 첫 세대, 뼈 빠지게 일하고 구조조정 된 세대인 베이비부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기자말]

자격증은 희망 단서 붙은 증명서다. ⓒ 픽사베이

 
1년여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공사가 마무리되자 또다시 일을 구해야 할 처지가 됐다. 새로운 일이 생기면 연락한다고 호언장담하던 팀장도 감감무소식이다. 일반현장에서 다시 막일을 시작할까도 생각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자격증을 따기로 마음먹었다.

제일 먼저 경비원 자격증에 도전했다. 지방대 평생교육원에서 3일간 민간경비교육을 받고 시험에 합격하면 이수증이 나왔다. 스쳐 지나가듯 '경비아저씨' 정도로 알고 지냈던 내가 '경비아저씨'가 된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36년 만에 캠퍼스 강의실에서 수업받는 것은 색다른 설렘을 줬다. 수강생들의 연령대는 다양했다. 특히 어르신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경비 일에 젊은이가 섞여있어 놀랐다. 수업은 수·목·금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뤄지는데 점심시간과 휴식시간 10분을 빼고 꽉꽉 채워져 진행됐다. 경비교육이라 대충대충 할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점심은 자비로 사 먹어야 했고 수강료는 13만 원이다.)

강사들은 모두 퇴직 경찰들인데 청와대 경호원 출신도 있었다. 몸으로 직접 실전을 겪어온 사람들이라 예시를 들 땐 박진감이 넘쳤다. 머리가 약간 벗겨지고 백발이 성성한 강사가 경비의 임무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을 시작했다.

"경비는 세 가지 조건이 중요합니다. 성실해야하고, 부지런해야 하고, 건강해야 합니다. 이 조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경비 일이 쉽지 않아요. 3개월을 못 버티고 그만두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수강생이 심각한 표정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 많고 자괴감이 들어 오래 못한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보통의 경우 아파트 1000세대 당 6~8명의 경비원이 배치됩니다. 그런데 주민들과의 민원도 많이 발생하고, 경비원들끼리의 다툼도 적잖게 발생합니다. 이유는 서열이 없고 보수가 똑같기 때문입니다. 어제 들어왔든 1년 전에 들어왔든 박씨, 이씨, 나씨라고 부릅니다. 체계가 없으니 구역다툼을 종종 하는 거죠. 당신네 구역 일인데 왜 우리가 해야 하냐. 나이도 어린놈이 얻다 대고 반말이냐는 등 사소한 것들로 충돌하는 겁니다."

강사는 자신이 순회교육하며 들었던 내용들을 자신이 겪었던 얘기처럼 길게 장광설을 폈다. 그는 '주민은 나의 고객'이라는 생각으로 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비는 몸으로 하는 일입니다. 친절과 서비스정신으로 무장해야 해요. 어차피 주민들이 월급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주민과의 갈등이나 마찰을 최소화해야죠. 물론 한없이 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없이 참을 필요도 없어요. 다만 고객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십시오."

삼십육계 줄행랑이 필요한 순간

강의를 들으면서 경비원의 업무영역에 대해서도 확실히 알게 됐다. 흔히들 경비원 하면 별의별 잡무들을 모두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경비업법에 따르면 경비원의 주요 임무는 화재예방, 도난방지다. 부수적 업무로는 휴지 줍기(청소가 아님), 재활용 분리배출, 안내문 게시 및 우편 수취함 투입, 위험·도난발생 방지 목적의 주차관리, (모든 택배가 아닌) 중요 택배물품 보관 업무만 가능하다. 풀 뽑고, 술 취한 놈 차 빼주고, 남의 집 싸움에 끼어들어 중재하고, 나무들 머리 깎는 일 등은 업무영역 밖이다.

"경비원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의무가 없습니다. 경비원이 직무를 수행할 때 타인에게 위력을 과시하거나 물리력을 행사하는 등 경비업무의 범위를 벗어난 행위를 하여서는 안 된다(경비업법제15조의2항1)고 명시돼 있죠. 이를 위반한 경비원은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됩니다."

강사는 되도록 경비원의 입장에 서서 그들을 옹호하려 애썼다. 그러면서 아파트 부부싸움과 우범지역 순찰의 예를 들어 대응방법을 설명했다.

"경비원은 권한은 없고 책임만 있습니다. 가령 주민이 인터컴으로 부부싸움 흉기난동을 신고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집으로 출동하지 말고 112에 신고한 후 예의주시하십시오. 괜히 신고 된 집으로 덥석 찾아갔다간 싸움에 휘말리게 됩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주거침입죄도 되죠.

그냥 경찰이 오기까지 기다리는 게 상책입니다. 청소년들이나 범죄자들이 외진 곳에서 나쁜 짓을 하고 있을 때는 혼자서 대처하지 말고 경비 밖 구역은 112신고, 경비구역 내는 옆 초소 경비원과 함께 움직이세요. 욕하지 말고 설득하고 몸을 부딪치지 말아야 합니다. 위험할 때는 삼십육계 줄행랑이 가장 좋습니다. 목숨까지 바칠 필요는 없으니까요."


강사는 경비원들의 에티켓에 대해서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마치 항공승무원 고객 응대방법을 듣는 듯했다.

"일을 잘하면 소문이 안 나는데 잘못하면 소문이 확 퍼집니다. 전화를 받을 때도 3.3.3법칙을 활용하세요. 전화벨 3번 울리기 전에 받기, 전화통화후 3초간 기다렸다가 끊기, 신속·정확·정중 3가지 기억하기 등입니다. 민원인과의 대면도 중요합니다. 첫인상은 7초 이내에 결정됩니다. 음성은 중저음, 눈은 되도록 위아래로 훑어보지 않아야 합니다. 또 부드러운 고갯짓으로 고객의 말에 반응하는 것도 잊지 마세요."

3일째 되던 날, 체포·호신술을 동영상으로 배웠다. 굳이 호신술까지 사용할 일은 없겠지만 자신의 안전을 위해선 꼭 필요한 교육이었다. 그리고 시험평가를 통해 합격증을 받았다.

경비원은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도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근무하는 '남자들의 마지막 직업'으로 불린다. 그렇다고 노고를 제대로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임계장(임시 계약직 노인장)'이란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늘 신분의 위협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자격증까지 딴 마당에 경비원 취업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언젠가는 명찰을 패용하고 어느 모처의 아파트단지에서 경비 설 날이 반드시 찾아오리라.

자격증이라는 나만의 무기
 

경비원 자격증 취득 이후 비계 자격증과 고용노동부 중장년내일센터 '전직스쿨 프로그램', 생애경력설계 프로그램도 이수했다. ⓒ 픽사베이

 
현재 대한민국 중장년, 특히 60년대생들의 재취업 과정은 바늘구멍보다도 좁다. 대부분의 일은 자격증이라도 있어야 지원 가능하다. 일자리가 당장 급한데 때가 닥쳐 자격증시험에 도전하면 그땐 늦다. 때문에 여유가 있을 때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 여러 자격증을 따 놓으면 1차 준비는 끝난 것이다.

경비원 자격증 취득 이후 비계 자격증과 고용노동부 중장년내일센터 '전직스쿨 프로그램', 생애경력설계 프로그램도 이수했다.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라는 희망 단서가 붙은 증명서다.

비계업체 취업을 위해선 자격증은 필수다. 경기도 안성에 있는 한국비계기술원에서 교육 후 기능습득 이수증을 획득하면 된다. 하루 8시간 수강이고 비용은 7만 원이다. 관계법령과 안전관리에 관한 사항, 비계의 조립·결속·해체, 추락 및 낙하물 방지 등을 배우는데 수업만 잘 들으면 시험평가 시 무난하게 통과할 수 있다.

하지만 자격증이 '입사증'은 아니다. 또 다른 관문이 있다. 시간 싸움이다. 해당 업체에 열심히 노크하면 재취업의 기회가 오겠지만 일자리가 기다리고 있진 않다. 지루하고 답답한 시계 초침만 귓전에서 무의미하게 울린다.

그래서 요즘 흔들린다. 자꾸 흔들린다. 주변에 널려있는 상황들이 목울대의 벌레처럼 불편하다. '세상의 쓰디쓴 맛을 알아야 인생의 달콤한 맛도 느낄 수 있다'는 보편타당한 명제가 몹시 불편하다. 언제쯤 다시 일할 수 있을까. 어떤 '희망'을 얘기하다가도 이내 '어둠'이 깔리는 건 지금 사는 형편이 그렇게 희망적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지 않겠다 다짐한다. 오늘도 뚜벅뚜벅 내 일을 찾으려 나선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