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물방울'이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와인(Wine)의 어원은 '술'이란 뜻의 라틴어 '비눔(Vinum)'에서 유래했으며 흔히 포도주 혹은 과일주를 칭한다. 와인은 역사에서 단지 주류를 넘어서 하나의 '문화'로 소비되어 왔으며, 인류의 역사적 순간들, 위대한 인물들의 일화와도 밀접히 관련되어 발전해왔다. 오늘날 고급 와인 1병의 가격은 한화로 수억원 이상에 이르기도 한다. 수많은 나라들이 와인을 생산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는 프랑스는 남다른 역사와 전통을 자부하는 와인 종주국으로 꼽힌다.
 
10월 17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21회에서는 '신의 물방울, 와인은 어떻게 프랑스의 자존심이 되었나'편을 통하여 와인의 역사를 조명했다. 국내 최고의 와인전문가인 고재윤 경희대 호텔관광학과 명예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와인의 역사는 인류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8천 년 전 조지아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유물을 통하여 당시 신석기인들이 토기를 땅에 묻고 와인을 발효하여 마셨을 것으로 추측되는 흔적을 찾아냈다. 이는 한국인들의 전통적으로 김치를 발효시키는 김장 방법과도 유사하는 점에서 친숙하게 느껴진다.
 
기원전 3천년경에 이르면 와인은 무역을 통하여 더 넓은 지역으로 수출되기에 이른다. 이집트는 세계 최초로 와인 양조를 시작한 곳으로 꼽힌다. 고대 이집트의 와인 양조 레시피는 현대의 제조법과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다. 고대 이집트에서 와인은 제사에 쓰이거나 파라오같은 소수의 상류층만 먹을수 있는 초고급 제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집트 18왕조의 파라오인 투탕카멘, 여성 파라오로 추정되는 메르네이트의 무덤에서 와인 항아리가 발굴되기도 했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 tvN

 
이는 종교적인 이유와도 관련이 있다. 와인의 재료가 되는 포도나무는 겨울에 생명력을 잃은 듯 보이다가 봄이 되면 다시 탐스러운 포도가 열렸기 때문에 와인이 부활을 상징하는 성스러운 음료로 해석된 것이다. 이집트에서 오시리스는 나일강을 범람시켜 포도나무 재배에 필요한 물을 공급해준다는 믿음으로 부활과 와인을 상징하는 신으로 불렸다.

소수 지배층의 전유물이던 와인이 점차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였다. 그리스의 신 디오니소스 역시 오시리스와 마찬가지로 부활과 와인의 신으로 유명하다.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 역시 와인 애호가로 유명했는데, "와인은 사람의 영혼을 상쾌하게 적셔주며 우리의 고통을 잠재운다"라는 찬사를 남기기도 했다.
 
로마 제국 초기에는 귀한 고가품인 와인을 여성과 30대 미만 남성에게는 금지하는 법안이 나오기도 했다. 법을 어기고 와인을 마신 여성은 이혼을 당하거나 심지어 사형까지 당한 경우도 있었다. 아내가 와인을 마셨는지 확인할수 있도록 남편에게 기습키스를 허용하는 황당한 법도 존재했다.
 
하지만 포에니 전쟁(1-3차, BC 264-146) 이후 승전국이 된 로마는 카르타고부터 포도재배부터 와인 양조 기술을 모조리 흡수하면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게 된다. 식문화의 변화로 외인이 필수품이 되면서 이제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많은 대중들이 함께 와인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고대인들은 와인을 더 맛있게 즐기기 위하여 다양한 첨가물을 넣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소금과 물을 비롯하여 심지어 납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의학적 지식이 부족했던 과거에는 와인의 아세트산과 납이 만나면 더 달달한 맛을 이끌어낼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고대 로마의 폭군으로 유명한 네로 황제의 폭력성이 와인을 즐기면서 생긴 납 중독 때문이라는 속설이 나오기도 했다.
 
대제국을 건설한 로마 제국의 번영은 와인을 전 유럽에 전파하는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와인은 로마군 병사들의 필수품이기도 했는데, 석회질 성분 때문에 마음놓고 마실 수 없었던 물보다 와인이 더 위생적이고 안전한 음료수라고 생각했다. 또한 로마인들은 보급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현지에 포도밭을 건설하고 현지인들에게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 방법을 전수하면서 자연스럽게 와인이 유럽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와인이 숙성될수록 품질이 더 향상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로마의 와인이 인류사에 미친 또 하나의 영향이 있다. 와인을 기독교의 사징으로 만드는 계기가 된 것인데 로마는 초기에 기독교를 탄압했으나 콘스탄티누스-테오도시우스 황제를 거치며 기독교를 공인하고 심지어 국교로 선정하기에 이른다. 와인은 예수와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을 묘사한 <마태복음>등 성경에서도 비중있게 등장한다. 이후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성찬식마다 예수의 피와 살을 상징하는 포도주와 빵을 먹게 되었다. 와인은 기독교에서 인정받으며 특별한 지위를 인정받은 존재가 되었다.

길고 광범위한 와인의 역사
 
이처럼 와인의 역사는 길고 광범위하게 이어져왔는데, 현대에 유독 프랑스가 와인 종주국이라는 타이틀로 이름이 알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 역시 종교적인 이유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오늘날의 프랑스 일대에서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들어선 프랑크 왕국은 기독교를 국교로 지정했다. 왕국 곳곳에서는 교회와 수도원이 건설되었고, 이들은 살림을 위하여 와인을 만들어 팔았다. 자연히 중세의 수도사들은 종교인인 동시에 곧 최고의 양조 전문가이기도 했으며 훗날까지 프랑스에 와인 양조 산업이 번창하는 기반이 되었다.
 
또한 14세기 교황청이 프랑스 국왕에 의하여 유폐당했던 '아비뇽 유수'(1309-1378년) 사건을 거치며 '부르고뉴' 지방은 교황과 시토 수도회의 선택을 받아 훗날까지 이어지는 최고의 와인도시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부르고뉴 와인은 현재에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중 하나로 꼽힌다.
 
떼루아(terroir)는 프랑스어로 토양 혹은 풍토를 뜻하며 와인이 만들어지기 위한 자연 환경과 배경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시토 수도사들은 와인 제조에 최적화된 땅을 구분하여 등급을 나누고 철저하게 관리했다. 인접한 구역에 같은 품종을 심어도 각각 다른 맛과 향을 내는 와인의 특성을 활용하여 구역에 따라 맞춤형 양조방식을 도입했다. 이렇게 탄생한 부르고뉴 와인은 신선하고 상큼한 과일맛이 특징으로 꼽힌다.
 
프랑스 샹파뉴 지방에서는 기후 차이로 포도를 늦게 수확했다. 겨울에 중단됐던 발효가 봄에 다시 일어나면서 탄산의 압력으로 병이 폭발하는 사례가 속출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투입된 수도사 돔 페리뇽은 포도 품종을 혼합하여 와인을 만드는 블렌딩 기법을 창안해냈다. 문제점으로 여겨지던 탄산은 오히려 상파뉴 와인만의 특색이 되었고 이것이 바로 '샴페인'의 기원이다.
 
부르고뉴-샹파뉴와 함께 프랑스의 대표적인 와인 명산지로 이름이 알려진 곳은 보르도였다. 보르도는 프랑스와 영국이 패권을 놓고 한때 백년전쟁까지 벌였던 곳이다. 보르도 와인은 영국에서 특히 우수한 고급 제품으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프랑스 와인 산업은 몇차례 큰 위기를 겪기도 했다. 19세기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창궐한 필록세라(Phylloxera, 포도뿌리흑벌레) 해충은 한때 프랑스 포도원의 40% 일대를 파괴하고 수많은 품종을 절멸시킬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훗날 미국 포도나무 뿌리에 프랑스산 포도나무 가지를 접목하는 접붙이기 방식이 도입되며 필록세라를 완전히 해결했지만 무려 1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 사건은 훗날까지 와인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고, 필록세라 창궐 이전에 제조되었던 제품의 희소성이 더욱 높아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현재 유럽에서 제배되는 포도나무는 모두 필록세라 사건 이후 도입된 신품종에 해당한다.
 
또 하나의 위기는 히틀러의 등장과 2차세계대전이었다. 히틀러와 나치세력은 프랑스 와인에 심취해 있었고, 프랑스 침공시 조직적으로 와인을 수탈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병력을 파병하기도 했다. 히틀러의 개인 저장고에 쌓인 와인만 50만 병에 이르렀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은 동굴이나 논밭에 귀중한 와인을 감추는 등 수탈을 피하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앞선 두 사건이 불가피한 재난에 가까웠다면, 1976년에 '파리의 심판(Judgment of Paris)'은 이른바 와인종주국을 자부하던 프랑스인의 자존심을 무너뜨린 희대의 굴욕으로 회자된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 한 장면. ⓒ tvN

 

철저히 블라인드 테스트로 열린 와인 시음회에서 전문가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이 프랑스 와인보다 미국 와인의 손을 들어준 것. 시음에 참여한 심사위원과 전문가들도 모두 당황했고 어떻게든 이를 은폐하려고 했으나 미국 타임스에서 기사화하면서 전세계에 알려지게 됐다. 
 
그로부터 30년 뒤인 2006년 파리의 심판 30주년을 기념하여 다시 한번 전문가들을 모아놓고 열린 2번째 시음회가 열렸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다시 미국 와인의 완승으로 끝나며 오히려 1차때보다 더 압도적으로 격차가 벌어졌다. 이후 '와인은 무조건 프랑스가 최고'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게 됐다.
 
최근 와인 산업을 위협하고 있는 또다른 난제는 바로 기후 위기다. 와인 생산자들은 기후 위기에 맞춰 새로운 품종을 고민하고 더 좋은 품질과 신선한 포도로 와인을 만들기 위하여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프랑스와 미국 등 세계 각자에서 양질의 와인을 만들기 위한 선의의 경쟁도 계속되는 중이다.
 
'와인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며, 그 즐거움은 모든 미덕의 어머니다.'

대문호 괴테가 와인의 매력을 칭송하며 남긴 어록이다. 오랜 세월 숙성될수록 더 깊은 맛을 내는 와인처럼, 오늘날 그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단순히 술의 역사를 논하는 것에서 나아가 세계사 흐름을 바꾼 하나의 '문화적 유산'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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