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30 11:21최종 업데이트 23.10.30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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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제국주의가 동아시아로 몰려오던 서세동점 시대를 설명하는 것 중 하나가 '기독교가 제국주의 첨병 역할을 했다'는 명제다. 서양 선교사가 진출해 기독교 교리뿐 아니라 자국의 가치관까지 확산시키고 이들이 현지인들로부터 배척을 당하면 이를 명분으로 서양 함대가 출격해 함포 사격을 가하고 문호를 개방시키는 현상이 19세기 제국주의의 역사에서 자주 나타났다.

위 명제는 19세기 조선을 설명할 때도 어느 정도 타당하다. 한국을 방문한 서양 선교사들이 자기 종교뿐 아니라 국가의 이익까지 고려한 사례가 많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한국 역사에서 이 명제의 힘은 제한적이다. 프랑스와 미국 같은 서양 국가들이 1870년대 초반까지 조선왕조를 압박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나라들은 1866년에 프랑스가 일으킨 병인양요, 같은 해에 미국이 일으킨 제너럴셔먼호사건, 1871년에 미국이 일으킨 신미양요가 실패로 끝난 뒤에는 조선에 대한 태도를 달리했다.

청나라나 일본과 달리 흥선대원군이 이끄는 조선왕조는 군사력을 사용해 서양열강을 막아낸 이례적인 나라다. 이로 인해 서양열강이 조선 문 앞에서 움츠러들게 되면서, 적어도 조선의 경우에는 서세동점의 위력이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서양열강의 조선 진출이 벽에 부딪힌 뒤인 1875년부터 조선의 문호를 두드린 나라는 같은 동양권 국가인 일본이다. 프랑스·미국과 달리 이 나라는 조선 침략에서 성공을 거뒀고, 그래서 조선의 경우에는 서세동점보다는 '일세서점'이란 말이 훨씬 더 현실적이다.

서세동점의 점(漸)은 서양 세력이 동쪽으로 점점 다가오는 상황을 묘사하지만, 일본이 서쪽 조선에 대해 한 것은 그런 점(漸)이 아니라 점령할 때의 점(占)이었다. 그래서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를 생각할 때는 세계사 교과서에 나오는 일반적 의미의 제국주의 역사에 매몰돼서는 안 된다. 그런 틀에 얽매이지 않고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침략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했다는 명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조선을 주로 침략한 것은 서양이 아니라 일본이므로 이 명제 역시 한국 상황에 맞게 수정돼야 한다. 일본의 조선 침략이 경제적·군사적 측면에서만 전개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 역시 종교적 측면을 띠었다. 이때 두각을 보인 종교는 일본불교와 신도다.
 

ⓒ 김태훈


2020년 <공존의 인간학> 제4집에 실린 김태훈 시코쿠학원대학 교수의 논문 '조선총독부 관보로 보는 일본계 종교 유입의 전체도'는 "각 종파별로 확인되는 포교 거점의 총수는 1453개소"라고 한 뒤, 그런 포교 거점의 66%는 일본불교, 26%는 신도, 8%는 일본 기독교였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서양제국주의의 침략과 달리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서는 일본불교와 신도가 두각을 나타냈다.

일본제국주의가 한국 침략을 어느 정도 달성한 뒤에 일본 종교들이 뒤따라 들어온 게 아니다. 이들 역시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수행했다. 위 논문에 설명된 일본불교 분파들의 한국 진출 시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일본불교의 일파인 대곡파가 조선에서 포교를 개시한 시점은 강화도사건 2년 뒤인 1877년이고, 일련종이 포교를 시작한 때는 1879년이다. 일본 국가권력이 강화도사건과 이듬해 강화도조약(1876)을 통해 문호를 개방시킨 직후에 일본 종교의 한국 진출이 본격화됐던 것이다. 대곡파와 일련종에 뒤이어 1892년에는 조동종, 1895년에는 본원사파, 1897년에는 정토종, 1905년에는 진언종이 포교를 시작했다.

일본이 군사적으로 조선을 제압한 시점은 강화도사건 19년 뒤인 1894년 청일전쟁 때다. 1875년 이후부터 1894년 이전에도 일본의 영향력이 상당했지만, 이 시절 일본은 아직은 청나라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 시기에도 일본 종교는 조선에 진출했다. 서양제국주의의 침략에서 나타난 기독교의 첨병 역할이 일본제국주의의 한국 침략에서는 일본불교와 신도를 통해 나타났던 것이다. 

일본 종교가 그런 선봉장 역할을 했다는 점은 한양 도성의 남산 풍경에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났다. 조선 정치의 중심인 경복궁 앞에서 훤히 보이는 서울 남산에 일본 종교를 비롯한 제국주의 시설들이 일렬종대로 배치됐던 사실에서도 그것이 확연하게 표출됐다.

그 시절 기억을 지우지 못한 일본
 

남산 북쪽에 배치된 일본 시설물들 ⓒ 김종성

  
위 사진은 지난 29일 경기도 하남시 초이화평교회에 열린 일제청산연구소 제5차 월례포럼 때 사용했던 것이다. 서울 남산 북쪽에 배치된 일제 시설물의 위치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은 지도상의 2지점에 군대 주둔지를 만들었다. 그런 인연 때문에 강화도조약 이후인 구한말에 일본인들은 서울 남산에 몰려들었다. 그때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일본인들이 남산에 세운 시설물들은 마치 대포처럼 일렬횡대로 나란히 서 서울을 내려다보는 형세를 띠었다.

주로 종교 및 행정시설로 이뤄진 이 일렬횡대의 맨 왼쪽과 맨 오른쪽을 차지한 것은 일본의 신들이다. 조선신궁·경성신사·노기신사가 왼쪽 끝에,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을 추모하는 박문사가 오른쪽 끝에 있었다.

통감부 및 총독부 건물은 일렬횡대 라인에 있다가 나중에 경복궁 쪽으로 이전됐다. 통감관저 및 정무총감 관저와 헌병대사령도 같은 라인에 있었다. 일본 신들과 식민지배자들이 나란히 서서 서울을 내려다보는 형태로 시설물들이 들어섰던 것이다.

일렬횡대 라인에서 서울을 내려다보며 차를 마신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 한국통감이다. 그가 경성신사를 방문할 때마다 자주 찾은 찻집 터가 지금의 숭의여대 강의C동에 있다. 이곳에서는 경복궁과 그 주변의 관청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여기서 이토가 차를 마시며 어떤 구상을 했을지는 역사가 잘 증명한다.
 

이토 히로부미가 자주 찾은 찻집의 위치 ⓒ 김종성

 
일본 신들과 식민지배자들이 나란히 있었던 일렬횡대 남쪽에 용산이 있고, 그 용산에 일본군이 배치됐다.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군이 그곳에 주둔했다. 당시의 일본은 대한제국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압박하기 위해서 그곳에 기지를 설치했다. 이는 용산 일본군의 총부리가 남쪽인 한강이 아니라 북쪽인 경복궁을 향했음을 의미한다.

그런 총부리의 앞부분에 남산 일렬횡대가 있었고 그 일렬횡대는 경복궁 쪽을 향해 나란히 있었다. 일본 종교와 식민지배자들이 병렬해서 서 있고 일본 군대가 그 후미에 서는 구도가 남산 일대에서 펼쳐졌던 것이다.

이 구도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시각적으로 선명하게 인식됐다. 일렬횡대에서 가장 신성시된 조선신궁의 입구 및 계단과 신전이 남산 기슭에 생채기를 내는 방식으로 설계됐기 때문에, 고층빌딩이 없었던 20세기 초반에는 그 광경이 서울과 인근에서 한눈에 띄었다.
 

조선신궁 ⓒ 자료사진

 
그래서 일제강점기 사람들은 남산의 일본 신들과 식민지배자들이 서울 쪽을 압박하고 그 남쪽에 군사시설이 배치된 구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일본 종교가 앞장서서 한국인들의 정신에 영향을 주고 일제 군대가 물리력을 가하는 구도로부터 심리적 압박을 얼마든지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인연 때문에 서울 남산에 대한 일본인들의 애착은 상당하다. 1945년 일제 패망 20년 뒤에 한·일 국교가 재개돼 왕래가 자유롭게 된 직후부터 일본인들이 북적이기 시작한 곳이 바로 남산과 그 밑 명동이다. 1972년 12월 12일 자 <경향신문>은 1965년에 5110명이었던 일본인 관광객이 해마다 급증해 1971년에는 9만 명이 된 일을 보도하면서 일본인들의 필수 방문 코스가 "서울 일원의 고궁·남산·북악스카이웨이"라고 전했다.

윤석열 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일본이 원하는 한일관계가 열리게 되자, 지난 2월 16일에 일본 정부는 서울 남산의 호텔에서 기미가요가 연주되는 일왕 생일 파티를 열었다. 그달 16일 자 <산케이뉴스>는 이를 한일관계를 바로잡기 위한 일로 평가했다. "작년에 발족한 윤석열 정권이 대일관계의 개선을 목표로 하는 가운데 일본 정부도 비뚤어진 양국관계를 탈각할 호기로 판단했다"며 이런 판단하에 기미가요가 연주되는 일왕 생일연을 남산에서 열게 됐다고 신문은 전했다.

일본 신들과 식민지배자들이 남산 서북쪽에서 동북쪽까지 일렬횡대로 서고 그 뒤를 용산 군대기지가 떠받치는 구도는 일본의 한국 지배가 얼마나 '과학적'이고 '철학적'이었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중요한 것은 지금도 일본이 그 시절 기억을 지우지 못하고 지난 2월 16일 사례에서 나타나듯 틈만 나면 서울 남산에서 뭔가 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런 일본의 특성을 외면한 채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만날 때마다 환하게 웃는 윤석열 대통령의 대일외교가 한국을 얼마나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다시금 절감하게 된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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