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06 18:09최종 업데이트 23.11.06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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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주판)의 마지막 세대이자 컴맹 제1세대, 부모에게 복종한 마지막 세대이자 아이에게 순종한 첫 세대, 부모를 부양했지만 부모로서 부양 못 받는 첫 세대, 뼈 빠지게 일하고 구조조정 된 세대인 베이비부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기자말]

채용공고 안내문 보는 참가자들 ⓒ 연합뉴스

 
어느 날 갑자기 아침이 사라졌다.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간단히 밥을 먹고 몸단장을 끝낸 후 문밖을 나서는데 '아뿔싸' 갈 곳이 없다. 백수란 걸 깜빡 잊었다. 습관처럼 출근하려 했던 이 무의식의 의식이 서글프다. '당신, 퇴직한 지 오래됐어. 일을 쉰 지도 꽤 됐고'라는 환청이 들린다. 다시 문안으로 몸을 들이대는데 가슴이 먹먹하다.


나이테의 등속처럼 건망증의 크기가 커지니 자꾸 잊는다. 나이 들면 딱딱해야 할 건 부드럽고, 부드러워져야 할 건 딱딱해지며, 옛날 일은 또렷이 기억하고 어제 일은 까맣게 잊는다. 사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다 배운다. 어떻게 살고, 어떤 사람이 돼야 하고,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일곱 살만 되면 눈치가 멀쩡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철드는 것은 나이와 무관하다.

'철들자 망령'이란 말처럼 60세가 돼도 삿된 짓을 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무릇 '군대를 갔다 와야 철든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도 틀렸다. 군대에서 주야장천 맞아보니 철이 든 것처럼 행동하지만 유효기간은 채 일 년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꼴통은 꼴통 짓을 한다. 군대 갔다 와서 사람 됐다는 건 군대가 사람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 나이쯤이면 누구나 철이 드는 것이다. 마음 속에 불필요한 갑옷은 걸치지 않았는지 고민하며 사는 게 철드는 것이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것이다. 나이 들면서 익어간다는 것은 철이 드는 것이다. 결론이 그러하니 나잇살 붙었다고 기죽지는 않을 작정이다. 사람은 늙어가면서 한 편의 초상화를 얼굴에 새긴다. 자신을 담은 초상(肖像)이다. 마치 증명사진을 확대해 놓은 듯한 영정(影幀)이 아니라 살면서 자연스럽게 그린 소묘다.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만난 초상화엔 삶의 이력이 그대로 녹아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진영(眞影)은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과연 잘살아왔나. 못살아왔나'

헛된 생각으로, 헛된 삶을 살았다면 얼굴에 심술보가 덕지덕지 붙어있을 것이다. 사람의 첫인상은 말 그대로 깜박하는 사이, 0.1초에 결정된다고 한다. 길어봤자 7초다. 타인의 얼굴을 보고 그의 매력이나 호감도·신뢰도 등에 대한 판단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고작 7초라는 것이다. 그래서 첫인상이 마지막 인상이다. 잘 살아야, 아니 똑바로 살아야 초상이 아름답다.

얼굴엔 80여 개의 근육이 있어 7000가지 이상의 표정을 만들어 낸다. 인생을 뼈 빠지게 살았다면 고단한 흔적이 얼굴에 또렷하다. 모나리자처럼 평온한 미소로 살았다면 웃자란 수염이 올올이 성기더라도 멋질 것이다. 하지만 모나리자의 미소가 '크나큰 슬픔'을 참고 있는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혹자는 오랜 시간 일한 탓에 팔다리가 저려 쉬고 싶은 표정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하나의 모나리자를 보면서도 각기 관점이 다르다. 사람은 늙어가되,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별 수 없다. 웃을 수밖에.

어느덧 아침이 다시 깨어났다
 

플라톤은 5대 행복론에서 '행복이란 만족이 아니라 부족에서 찾아야 한다'고 설파한다. 부족한 재산, 부족한 용모, 부족한 명예, 부족한 체력, 부족한 말솜씨 등이다. 이는 결핍에서 찾는 충만이다. 고민 걱정거리가 없어야 행복이란 거다.

이 모든 것에는 '소유'의 욕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아프고 시린 것이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는 말이 있다. 내가 못사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남이 잘사는 것은 차마 두 눈 뜨고 못 보는 게 사람이다. 그래서 가난한 자가 갈구하는 '희망'은 가난하다. 가난과 고난이 병립(竝立)하기 때문이다.

다만 나이만 들었다고 존경받는 건 아니다. 자칫하면 노욕(老慾)이나 노탐(老貪), 노추(老醜)에 빠질 수도 있다. '노인의 지혜'만큼이나 '지혜로운 노인'이 되려는 노력이 그래서 중요하다.

이제 무조건 집 밖으로 나서라. 집안에는 은퇴 이후의 침묵과 어둠과 번민이 쌓여있다. '무슨 일이 생기겠지' 무작정 기다리면 어떤 일도 오지 않는다. 움직여야 보이고, 보여야 잡을 수 있다.

폭염특보가 발효된 날,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잽싸게 채비한다. 사람 만나기도 두려운 찜통이지만 내 처지와 고뇌를 나보다 더 잘 아는 벗이기에 망설임이 없다. 친구가 물었다.

"컨디션 어때?"
"좋아." 
"일자리는 찾았어?"
"아직까진 없네. 그래도 자신은 있어."
 

수다쟁이가 되어 어쩌고저쩌고 자격증 취득부터, 실업급여, 고용지원 상황들을 브리핑했다. 중간중간 추임새를 넣고 고개를 끄덕이던 친구가 한마디로 용기와 응원, 믿음의 메시지를 날렸다.

"넌 거시기해서 머시기 할 거야. 앞으로 거시기만 하면 돼. 걱정할 거 없어."

짧은 위로에도 천군만마를 얻은 듯 용기를 얻는다.

'가난'은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 때 더 큰 '고난'으로 다가온다. 힘들어도 내일의 시간을 끌어다 쓰면 안 된다. '시간의 사용'은 철저히 인간의 몫이다. 지금 이 순간도 1초 후면 과거가 된다.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원하던 '내일'이다. 시간은 쓰면 닳아 없어지는 진귀한 소모품이다.

죽음은 할부가 아닌 일시불로 찾아온다. 예고편 없이 갑자기 들이닥치기 때문에 죽음을 예비할 시간조차 없다. 시한부 삶을 선고하면 환자들은 5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1단계는 '그럴 리가 없어'라며 부정한다. 2단계는 '왜 하필 나냐'며 분노하고 3단계는 '조금만 더 살게 해 달라'고 애원한다. 4단계는 '우울증' 단계고 마지막 5단계가 '수용'의 단계로 이때부터 자기 죽음을 받아들인다.

우리는 흔히 코마(coma·혼수상태)나 식물인간 환자에겐 의식 자체가 없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2009년 벨기에 사람 롬 하우번의 사례가 우리를 놀라게 한다. 하우번은 1983년 교통사고 후 식물인간으로 23년간 누워 있었는데 의사 표시를 못했을 뿐 주위 이야기를 다 듣고 있었다고 한다. 뇌사상태여도 정신은 살아있다는 묵계다.

어느 순간 아침이 다시 좋아졌다
 

베이비부머의 아침은 또 찾아온다. ⓒ 픽사베이

 
씩씩하게 밥을 먹고 넥타이를 질끈 매고 집 밖을 나섰다. 고용센터에 들러 기업체 취업공고를 확인하고 창구에서 상담도 받았다. 중장년내일센터에서도 같은 과정을 거쳤다. 내게 맞는 일자리는 당장 없었지만 직접 발로 뛴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요즘 들어 친구들이 자주 찾는다. 안부를 물어오고 만나자고 기별도 한다. 친구들이 그리워질 나이가 됐다는 건 늙어간다는 징조다. 늙음은 외로움이다. 그 외로움은 불량하게 시들고 싶지 않다는 반항이다. 나이 먹었다고 기죽지 않겠다는 항거이기도 하다.

"친구들아, 이제 혼자 먹고, 혼자 마시고, 혼자 걷는 일을 멈추자. 사소한 일에 '욱'하지 말고, '욱'할 일이 있어도 '욱'하지 말자. 우리 다시 시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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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60년대생, 베이비붐(boom) 베이비붐(bomb) 세대의 애환' 시리즈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변의 은퇴한 베이비부머들은 가난과 고난을 이겨내며 대한민국의 현재를 만들어 낸 영웅이자 우리들의 아버지입니다. 은퇴한 이후 일을 찾아, 희망을 찾아, 행복을 찾아 떠나는 제2의 삶은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인생2모작을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 모든 베이비붐세대를 응원합니다.

나재필의 '나의 막노동일지'와 '60년대생, 베이비붐 세대의 애환' 시리즈가 한 권의 책으로 11월 중에 출간(아를 출판사)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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