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14 13:44최종 업데이트 23.11.14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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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23 KBO 한국시리즈 5차전 kt wiz와 LG 트윈스의 경기에서 kt에 6-2로 승리하며 29년 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한 LG 선수들이 염경엽 감독을 헹가래 치고 있다 ⓒ 연합뉴스

 
입버릇처럼, "내 인생엔 그런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또는 나쁜 일이든. 나는 삶을 무덤덤하게 살아가고 있는 척, 무척이나 쿨한 척, 마치 삶에 달관한 사람인 양. 그것을 나쁜 일이 닥쳐왔을 때 과하게 슬퍼하며 일상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 또는 좋은 일을 마주했을 때 과하게 몰입해 평정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엘지(LG) 트윈스는 올 시즌 내내 야구를 잘했다. 오래된 '엘지팬'인 나에게 친구들은 "올해는 엘지가 우승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그럴 때도 나는 일부러라도 아닐 거라고 했다. "그런 특별한 일은 내가 좋아하는 팀엔 일어나지 않는다"면서. 선발투수진에 약점이 있다느니, 감독이 작전을 남발한다느니 하면서 냉정하고 객관적인 젠체를 하거나, 성적이 좋았을 때마다 선수들을 함부로 대해 악덕이 쌓였다며 사뭇 낭만적인 젠체를 했다.


사실 소위 말하는 '엘지 트윈스의 암흑기'를 고스란히 지켜보면서 내가 좋아하는 이 팀은 우승이나 강팀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팀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기대하다가 실망하느니, '올해는 다르다'고 봄이면 설레발을(엘지팬들의 봄철 설레발은 야구 팬덤에서 유명한 놀림감이다. 엘지팬들의 설레발을 '엘레발'이라고 부른다) 치다가, 여지없이 고꾸라진 가을에는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DTD, Down Team is Down)며 놀림을 당하느니, 그냥 처음부터 쿨한 척 무던한 척하는 것이 더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희망을 품지 않으면 절망도 하지 않는 법이고, 기대를 품지 않으면 실망도 하지 않는 법이니까.

'포기하면 편해'
 

2002 한국시리즈에서의 LG 트윈스 마무리 투수 이상훈 2022.11.4 ⓒ 연합뉴스

 
2002년 11월 10일의 오후, 대구시민운동장 외야에 나도 있었다. 일요일에도 강제되던 자율학습을 땡땡이 치고 고속버스를 타고 대구에 갔다. 그 해의 엘지 트윈스는 참 대단했다. 시즌 전 약체라고 평가를 받았고 시즌 초반엔 꼴찌 다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끝끝내 '기어올라'(정말 시즌 내내 기어오른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악바리 같은 순위 싸움을 했다) 4위로 가을야구에 합류했다.

그 해엔 선수들이 다치기도 많이 다치고 부진도 많이 겪었다. 원바운드로 오는 공도 안타를 만들던 '적토마' 이병규는 커리어 최악의 부진을 겪었고, '캐논히터' 김재현은 고관절 부상으로 그 호쾌한 스윙의 장타를 치고도 1루까지 절뚝거리며 걸어야 했다. 후일 엘지 트윈스의 영구결번이 되는 박용택은 데뷔 첫해의 신인이었고 '로켓' 이동현은 그 시즌 이후 지금까지도 혹사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선수 생활 동안 3번의 수술과 재활을 거쳐야 했다.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팀으로 업셋(Upset, 정규리그 하위순위팀이 상위순위 팀을 이기는 것)과 업셋을 해내며 마침내 도착한 한국시리즈 6차전. 3점 차로 이기고 있던 8회 말, 마운드엔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든든한 남자인 이상훈이 갈기머리를 휘날리며 올라왔다. 옆에 앉아있던 아저씨들은 '이상훈이 많이 지쳐있을 것'이라며 걱정했지만 난 정말이지 단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이상훈이 마운드를 지키는데 3점차가 역전을 당해'라면서.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일어났다. 이제는 엘지 트윈스의 넘버 원 투수인(실제로 등번호가 1번이다) 임찬규는 어린이 시절이던 그때 티비를 보면서 펑펑 울었다고 했다. 난 그래도 2차성징이 지난 청소년이어서 펑펑 울지는 않았다. 그냥 눈물이 찔끔 났지.

그때부터였을 것 같다. 야구뿐 아니라 삶의 대부분의 일에서 너무 큰 기대와 희망이 무너졌을 땐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하게 큰 실망이 찾아온다고 여기게 된 것. 그러니 시대와 희망을 조금 작게 품으면 실망과 절망도 예상 가능한 범위에서만 찾아온다고 생각하게 된 것. 고작 야구 때문에 인생관이 생겼냐고 비웃을 수 있지만 정말로 그랬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이나 어린이라면 그럴 수 있지. 그러니까 애들 앞에선 찬물도 함부로 마시면 안 될 일이다.  

그래서 사실 엘지 트윈스의 우승을 제일 믿지 않은 건, DTD 같은 놀림에 오히려 더 동참한 것은 30년 차 엘지팬인 나였다. 어쩌면 이 지긋지긋하게 우승을 못하던 팀의 많은 팬들이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안될 거라고. 포기하면 편하다고.

작년 시즌, 엘지 트윈스 창단 이후 가장 높은 승률로 정규시즌을 마무리 했으면서도 플레이오프에서 업셋을 당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을 때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말했다.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니까. 언제 내려가느냐의 차이지".

29년 전 영광이 아닌, 21년 전 회한도 아닌... 바로 지금의 기쁨
 

13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23 KBO 한국시리즈 5차전 kt wiz와 LG 트윈스의 경기에서 6-2로 LG가 승리해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자 LG 팬들이 기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각은 13일 밤이다. 엘지 트윈스가 한국시리즈에서 29년만에 우승을 한 날 밤이다. 경기에서도 8회 말이 되기 전까지, 그러니까 벌써 시리즈에서 세 번의 승리를 따내고 오늘 경기도 큰 점수차로 이기고 있으면서도 선뜻 '이긴다'거나 '우승을 한다'는 생각을 하진 못했다.

그보다는 그런 생각을 애써 지우려고 노력했다. 우승을 누구보다 바라지만, 누구보다 우승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라니. 그건 마치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제대로 고백도 하지 못한 채 끙끙 속앓이만 하던 어느 어린 날 같은 마음이었다. 결국 '아무런 것도 하지 못한 채' 끝나버린 어느 시절의 어떤 일들. 비단 연애만 그랬을까. 어쩌면 나는 살아오며 대부분의 일에서 실망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내 인생에 그렇게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아"라고 말하면서.

오늘 29년 만에 특별한 일이 일어났고, 나는 지금 무덤덤하지 않다. 대단한 흥분상태다. 실은 며칠 전, 이 원고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엘지팬의 입장에서 29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오른 엘지 트윈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고. 처음엔 원고에 엘지 트윈스의 못났던 날들을 자조하거나, 결국 우승하지 못하고 팀을 떠난 선수들을 그리워하거나, 또는 오랜 세월 우승도 못 하는 팀의 팬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 그리고 경기가 끝나고선 써놨던 초안을 모두 지웠다. 나에게도 특별한 일이 일어났으니까.

이미 지나가 버린 29년 전의 지난 영광이나, 21년 전의 안타까움 말고, 지금의 기쁨과 내년의 기대, 이뤄지기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이뤄질 것을 의심하지 않는 희망 같은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비단 이번 원고뿐이 아니라 앞으로 내가 쓰고, 말하고, 살아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다짐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난 지금 <지속가능한 엘레발 선언문> 같은 걸 쓰고 있는 셈이다.

살면서 필요한 것들을 가르쳐주는 건 많은 경우 '매우 무용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프로야구 같은 것. 우리는 오늘도 야구에서 배웠다. 내 인생엔 어쩌면 종종 특별한 일이 일어날 수 있고, 오래 걸리더라도 바라던 것들은 이뤄질 수 있다는 것. 용기 내 고백하지 않으면 연애는 시작되지 않고, 나아가지 않으면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 공은 둥글고 야구는 모른다는 것. 고작 공놀이일 뿐이지만, 그 공놀이 따위에 기뻐하고 슬퍼하던 사람들의 시간이 실은 그토록 거창하게 말하던 '세계'일 수 있다는 것.

조치훈 9단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난 좋아하는 야구만화인 <H2>의 주인공 히로가 한 말을 한두 개 빌려야겠다. "타임아웃이 없는 경기의 즐거움을 가르쳐 드리죠". 그리고 "역시, 야구밖에 없어"

엘지 트윈스의 우승을 온 마음을 다해 축하한다. 엘지 트윈스를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나를 비롯한 수많은 팬들을 더욱 축하한다. 끝끝내 우승 반지를 갖지 못했지만 오늘 분명히 어딘가에서 눈물을 찔끔 흘렸을 그 선수들을 또 축하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삼십 년 전의 영광 따위나 주억거리고, 이십 년 전의 안타까움 따위나 매만지지 않을, 실망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쿨한 척하지 않고 또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있을 기쁨을 위해 희망 갖기를 포기하지 않을 모든 야구팬들을 축하한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밤입니다.
 

13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23 KBO 한국시리즈 5차전 kt wiz와 LG 트윈스의 경기에서 kt를 6-2로 꺾고 우승을 차지한 LG 선수들이 시상식에 참석한 가운데 경기장 위로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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