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21 07:06최종 업데이트 23.11.21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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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0월 9일 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최능진 선생의 모습.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지난 9월 11일부터 모금 중인 이승만기념관 후원금이 11월 중순 들어 60억 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이승만이 저지른 악행의 높이만큼이나 모금액도 올라가고 있다. 꼭 선행을 해야 후원금이 모이는 것은 아니다. 악행의 덕을 입은 세력과 그 계승자들이 많을 경우에도 악인에 대한 후원금이 많아질 수 있다.

이승만의 악행은 아직 덜 알려져 있다. 그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헌정질서를 유린하며 장기독재를 하고, 선거 부정을 저지르고, 민간인을 학살하고, 친일 청산을 방해한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3·1운동 6년 뒤인 1925년에 독립운동 방해 등의 죄목으로 임시정부에서 탄핵을 당한 것도 꽤 알려져 있다.

이런 것 말고, 여전히 덜 알려진 것 중 하나는 그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한 일이다. 일제 경찰이 하던 일을, 일제가 물러간 뒤 이승만이 했던 것이다. 독립운동가 최능진의 비극적 최후는 그것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독립운동가 최능진 선생 ⓒ 자료사진

 

동지들 변절에도 꼿꼿... 해방 후엔 친일경찰 청산 나서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성명(4.26)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망명(5.29)한 뒤인 1960년 6월 4일이었다. 이날 국회 조사반이 대구시 파동 서남골에서 무덤 하나를 발견했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 처형당한 최능진의 묘지였다.


1960년 6월 5일 자 <경향신문> '학살 장소를 확인'은 처형 당시를 목격한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 기사다. "헌병들에 의하여 집단 총살을 당하는 한쪽에 최씨만 혼자서 흰두루마기를 입고 눈을 가리워 말뚝에 매인 채 총살되었다"며 "최씨의 시체는 그후 동리 사람들에 의해 매장되었는데, 시체 매장 후에도 수차(數次) 헌병들이 와서 그의 총살 사실을 누설치 말라고 다짐했다"고 기사는 알려준다.

이승만 정권은 최능진에 대한 사형집행을 총살 방식으로 했다는 점을 은폐했다. 공개하지도 못할 그런 방식을 동원해야 할 만큼 최능진에 대한 이승만의 감정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최능진의 프로필은 경찰청 홈페이지 '기관 소개' 밑의 '경찰 역사' 코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력이 여기에 실린 것은 그가 미군정 시절에 경무부 수사국장을 지냈기 때문이다.

이 코너에 따르면, 최능진은 대한제국 선포 2년 뒤인 1899년에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에서 출생했다. 일제 강점 5년 뒤인 1915년에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했고, 중국 난징(남경) 진링대학(금릉대학)을 거쳐 1917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듀크대학과 스프링필드대학이 그의 학교가 됐다. 전공은 체육학이다.

그는 미국에서 안창호의 흥사단 활동에도 참여하고 워싱턴 YMCA의 체육 간사로도 활동했다. 경찰청 사이트는 "1919년 5월 재미 청년들과 청년혈성단을 조직하여 미주 한인사회에 독립운동의 열기를 고조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기술한다.

최능진이 귀국한 것은 31세 때인 1929년이다. 그의 사진과 함께 실린 1929년 10월 9일자 <동아일보> 7면 기사는 "조선 톄육계를 지도할 한 개의 별을 나타낫다"라는 말로 그를 칭송했다. 그 시절에 미국까지 유학 가서 문학이나 경영학도 아니고 체육학을 배워 왔으니 '톄육계의 별'이라 부를 만도 했던 것이다. 이 신문은 "얼마 전에 귀국하야 방금 숭실전문학교 톄육부 주임의 직에 잇서 다수한 청년 학생들의 톄육을 지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의 민족주의 활동은 귀국 뒤에도 계속됐다. 흥사단 자매단체인 수양동우회에서도 활동하고, 서울과 평양의 경평축구 정례화에도 기여했다. 경찰청 사이트는 "수양동우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청년들의 실력 배양에 힘을 쏟았다"고 말한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이런 활동은 시련이 됐다. 일제가 벌인 공안사건에 최능진도 휘말려 들었다.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중국 침략을 확대하고자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을 도발했다. 이로부터 1개월 전인 그해 6월 8일, 일제는 이광수·주요한 등을 전격 연행하는 수양동우회 사건을 일으켰다. 지식인 181명을 민족주의 활동을 이유로 검거하는 대형 공안 사건이 시작됐던 것이다.

최능진은 이로 인해 옥고를 치르게 됐다. "1937년과 1938년 동우회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두 차례 투옥되고 징역 2년을 언도받았으나, 결국 1941년 11월 17일 최종 무죄로 풀려나게 된다"라고 경찰청 사이트는 설명한다.

이 사건은 국내 민족주의자들이 친일로 대거 전향하는 계기가 됐다. 이광수·주요한·홍난파 등의 전향 성명이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일제는 전향을 석방 조건으로 내밀었다. 이 조건을 받아들인 친일파들이 일제강점기 막판의 친일 활동에서 두각을 보였다. 온건 반일에서 친일 보수로 돌아선 이 사람들을 '일제강점기판 뉴라이트'로 부를 수 있겠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동지들의 변절 속에서도 최능진은 끝끝내 버텼다. 그러다 결국 무죄를 받고 풀려났다. 그런 뒤 1945년 해방을 맞아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가담했다. 8월 17일, 조만식이 이끄는 건준 평남지부의 치안부장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그달 24일 소련군이 평양에 입성하면서 전세가 뒤집혔다. 우파 조직인 평남지부는 해체됐고, 최능진은 다음 달에 38선을 넘게 됐다. 1991년 1월 25일자 <한겨레> '발굴 한국 현대사 인물' 제56회 최능진 편은 "9월 15일 소련군을 속여 2대의 트럭을 빌려 40여 명의 청년들과 함께 새로운 운명이 펼쳐질 서울로 향한다"라고 서술했다.

이북에서 잠시 역임한 건준 평남지부 치안부장 직함은 서울에서 펼쳐질 "새로운 운명"의 단서가 됐다. 위 기사는 "서울에 도착한 최능진은 경찰관 강습소장을 거쳐 1945년 10월 경무국이 창설되자 수사과장으로 자리를 옮긴다"라며 "경무국은 1946년 봄 경무부로 승격되고 최능진은 수사국장을 맡는다"라고 설명한다. 경찰청 사이트에 그가 소개된 것은 바로 이 이력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근무 환경이 불량하게 바뀌었다. 소련군만큼이나 싫은 세력이 그의 근무지에 속속 들어왔다. 친일 경찰들이 중용되어 이들을 동료로 대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 불만을 품고 친일 경찰의 퇴진을 요구하던 그는 1946년 10월 1일 미군정에 맞선 대구항쟁이 발생하자, 문제의 본질은 친일 경찰들에게 있다며 이들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이 사건을 불순세력의 준동으로 몰아가는 경찰의 공식 발표를 반박하며 '문제는 친일파'라는 메시지를 강조했다.

위 <한겨레>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때의 고등계 형사들이 광복 후에도 버젓이 경찰에 몸담고 있어 일반 양민의 원성을" 산 것이 대구항쟁의 원인이라고 그는 공개 석상에서 지적했다. 이는 조병옥 경무부장이 경찰의 사기 진작을 저해한다는 등의 이유로 사표를 요구해 그해 12월 9일 그가 경찰복을 벗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승만의 무투표 당선 막으려 했던 최능진... 그의 비극적 최후
 

경찰청 홈페이지에 있는 최능진 선생에 대한 소개 ⓒ 경찰청 홈페이지

 
그렇게 쫓겨난 최능진은 이승만 정권에 적극 대항했다. 이승만의 분단정책에 맞서고자, 김구와 함께 남북협상을 추구하는 김규식을 자주 접촉했다. 1948년 5·10 총선 때는 이승만의 당선을 막고자 저격수를 자처하며 선거판에 뛰어들었다.

분단을 반대했으면, 분단을 전제로 하는 단독 총선에 출마하지 않아야 논리적이다. 그런데도 논리적 모순을 무릅쓰고 선거 출마를 단행했다. 겉으로는 당선을 목표로 했지만, 꼭 당선돼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랬던 것은 아닌 듯하다.

이승만에 맞서 '수도권 험지 출마'를 자임한 것은, 자신의 당선 여하를 떠나, 선거판을 무대로 이승만에게 정치적 상처를 주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위 기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최능진은 이승만의 국회 진출을 막으려고 서울 동대문 갑구에 입후보하기로 결심한다. 동대문 갑구는 경선자 없이 무투표 당선을 노리는 이승만이 입후보한 곳이었다."

이 일은 그가 극우세력의 공격을 받는 결과로 이어졌다. 위 기사는 "최능진은 이승만 추종세력의 집요한 등록 방해 공작에 시달렸다"고 말한다. 그가 서류 제출을 위해 선거위원회를 방문하면 그때 마침 담당자가 부재하는 일도 있었다. 골목길을 지나다가 서북청년단 단원들에게 서류를 빼앗기는 일도 있었다. 결국 그는 마감일인 4월 16일까지 등록을 마치지 못했다.

이 일은 그가 이승만의 미움을 사는 계기가 됐다. 이승만 정권은 반년 뒤 그에게 역모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경찰에서 쫓겨난 그가 경찰 조직도 아닌 군대 조직을 동원해 정권을 전복하려 했다는, 쉽게 납득되지 않는 혐의가 적용됐다.

1948년 10월 5일 자 <경향신문> '정부 파괴 혐의'는 서울 후암동에 사는 최능진이 1일 오후 3시 수도경찰청 형사대에 체포된 소식을 전하면서 "체포 이유는 작년 11월경부터 국군 소령 오동기 등과 공모하여 국방군 속에 혁명의용군을 조직하고 현 정부를 붕궤시키려고 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총독부 정권에 이어 이승만 정권에서도 체포된 그는 2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50년 한국전쟁을 맞이했다. 이때 풀려난 그는 이번에는 북한을 상대로 반전평화운동을 벌였다. 북에서 내려온 동기를 감안하면, 이같은 반북 활동은 그에게 자연스러웠다. 그는 자신을 북에 데려가려는 인민군을 피해 지금의 서울 대학로 인근인 혜화동에 은신하기도 했다.

그런 그를 이승만 정권은 전쟁 중에 또다시 잡아들여 군사법정에 넘긴 뒤 사형을 받게 만들었다. 반전평화운동을 이적행위로 간주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그를 대구까지 끌고 가서 비밀리에 총살하고 시신을 유기했다. 사형집행의 절차도 갖추지 못한, 사실상의 사적 살해였던 셈이다.

이 같은 살해 방식은 그가 이승만의 미움을 얼마나 많이 받았으며, 그가 이승만을 심리적으로 얼마나 괴롭혔는지를 보여준다. 서울 송현동에 이승만기념관이 세워지면 그 입구 앞에 동상으로라도 서서 이승만을 호통치고 싶은 게 저세상에 있는 그의 심정일지도 모르겠다. 

1987년에 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3권과 제4권은 최능진의 형인 최능찬과 최능현이 3·1운동 때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헌병분견소를 방화"하는 등의 일로 인해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최능현은 탈옥해 중국으로 망명한 일을 서술한다. 최능찬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고, 최능현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최능진도 형들처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미군정하에서는 친일 경찰 숙청을 시도해 미군정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성과도 거뒀다. 해방 이후에도 계속 항일운동을 벌인 셈이다. 그런 그가 아직도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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