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26 17:25최종 업데이트 23.11.26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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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살 1년 전에 김규식과 함께 평양에 가서 김일성·김두봉과 4자 협상을 한 백범 김구는 분단세력뿐 아니라 친일세력의 미움도 받았다. 분단세력이 곧 친일세력이고 이것이 당시의 보수세력이었다. 김구 암살범 안두희에게 최종 지시를 내린 쪽이 이승만이든 미국이든, 김구가 분단과 친일이 특징인 당시 보수세력의 미움을 산 것은 사실이다.

친일파들은 김구 암살에도 개입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안두희가 소속된 미군방첩대(CIC)나 극우단체 백의사뿐 아니라, 거물급 친일파들이 포진한 '88그룹' 혹은 '88구락부'도 백범 암살의 배후로 거론됐다.


일본 헌병대 출신인 김창룡과 더불어 이 그룹의 핵심 인물로 거론된 친일파는 김구 암살 당시의 육군총참모장인 채병덕이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채병덕 편은 중일전쟁 초기인 1937년 12월에 일본 육사를 49기로 졸업한 그의 친일 이력을 이렇게 소개한다.

"견습사관을 거쳐 일본군 소위로 임관해 사세보의 군항을 지키는 중포(中砲) 장교로 복무했다. 1940년 육군포병학교를 수료했다. 일본 육군병기학교 교관, 오사카 육군 조병창 공장장 겸 병기행정부 부원을 거쳐 일제 패망 당시 육군 포병 소좌로서 경기도 부평에 있는 육군 조병창 공장장으로 근무했다."

부산 남쪽인 규슈현 서북부 군항인 사세보에서 야포를 다루며 항구를 지키는 장교였다. 침략전쟁기의 일본군에서 소령 계급까지 달았다. 무기 공장인 조병창의 공장장을 오사카에서도 지내고 경기도 부평에서도 지냈다. 항구든 무기든 일본을 위해 무언가를 지켜주는 파수꾼 역할을 했다.
 

김구 암살 당시에 육군총참모장이었던 채병덕 ⓒ 위키미디어 공용

 
백범 김구 암살에 연루된 친일파 군인

1915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22세 때인 1933년부터 제국주의의 밥을 먹었다. "1933년 4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예과에 입학"했다고 위 사전은 말한다.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제의 해외 침략이 고조되던 시기에 그 밥과 녹봉을 받으며 군국주의 침략전쟁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88그룹 일원으로 공개적으로 거론된 것은 1960년 5월 24일이다. 4·19혁명에 눌려 하야성명(4.26)을 발표한 이승만이 하와이로 도주하기 닷새 전에 이 같은 공공연한 폭로가 있었다.

폭로의 주인공은 미군 정보기관 요원 출신인 고정훈이다. 고정훈에 대한 조태영 서울지검 부장검사의 조사 결과를 소개한 그해 6월 18일 자 <동아일보> 3면 좌상단은 "고(高)는 1947년 월남하기까지는 이북에서 쏘련군 통역으로 있었는데, 월남 후에는 미군 정보기관에 들어가 활동"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말한다.

1960년 5월 24일자 <조선일보> 3면 중간에 따르면, 이날 내외신 기자회견 때 고정훈은 비밀결사 88그룹을 암살 배후로 지목하면서 이들의 지시하에 "장은산 중령은 문봉제의 부하이던 안두희로 하여금 살해케 했다"라고 증언했다.

안두희가 43년 만에 '살짝' 입을 연 지 이틀 뒤인 1992년 4월 14일 발행된 <한겨레> 3면 좌상단은 "고씨는 '당시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 정부가 암살 뒤 미국 정부에 보낸 관련 정보보고를 통해 관동군 친일 정보원 출신들로 구성됐던 비밀결사 88그룹이 백범에 대한 테러 기회를 계속 엿보아왔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라는 내용을 보도했다. 고정훈이 88그룹의 개입을 알게 된 것은 한국이 미국에 보낸 정보 보고서를 확인한 결과라는 기사다.

위 기사는 신성모 국방부 장관이 이끈 88그룹과 관련해 "서울 종로구 팔판동 8 허아무개 집에 유력 인사들이 자주 모여들어 8·8구락부라 불린 이 모임에는 신 장관 이외에도 채병덕 육군총참모장, 김창룡, 서울시경국장 김태선, 경찰과 군 수사기관을 오가며 정보 브로커 노릇을 한 김지웅 등이 끼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설명했다.

팔판동은 청와대 동남편이다. 삼청동 주민센터가 부근에 있다. 당시의 대통령 관저 바로 옆인 팔판동 8번지에 자주 모인 88그룹이 안두희에게 직접 지시했다는 것이 고정훈의 증언이다.

동일한 이야기가 김원봉·김구 등과 협력한 독립운동가이자 백범 암살 당시의 헌병대사령관인 장흥의 회고에도 나온다. 위 <한겨레>는 "장씨는 회고록에서 '백범 선생은 남한에 국한하여 단일정부를 세우는 것을 극력 반대했고 정부수립 뒤에는 남한 일대를 돌면서 군정반대 운동을 맹렬히 벌인 관계로 정부 쪽의 반감을 사게 됐다"며 장흥 회고록의 일부를 이렇게 인용한다. 

"그때 마침 국방장관이었던 신성모 군이 이른바 8.8구락부라는 친일파의 몇 장관 및 한민당과 결탁하여 백범 선생 저격 음모를 계획하고 안두희를 매수, 한독당에 입당하도록 교사하여 거사하게 됐다."

이처럼 김구 암살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는 채병덕은 일제가 패망했을 때에 매우 신속히 움직이는 기민함을 보였다. 한민족 및 중국 항일군뿐 아니라 미국·영국과도 대결하는 일본군의 영관급 장교였던 그는 어제의 적이었던 미국의 품을 향해 신속히 달려갔다.

그는 일제 패망 4개월도 안 된 1945년 12월 5일에 설립된 군사영어학교의 제1기로 입학했다. <친일인명사전>은 "1946년 1월에 군사영어학교를 제1기로 마치고"라고 설명한다. 일본군 영관급 장교가 미군정 사관학교의 교문이 열리자마자 뛰어들어간 것이다.

육군 정위(대위)로 임관한 그는 남조선국방경비대 제1연대 중대장, 통위부(미군정 국방부) 병기부장·특별부대장·총참모장, 대한민국 국방부참모총장을 거쳐 백범 암살 직전인 1949년 5월에 육군총참모장으로 옮겨갔다. 88그룹 개입설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시기의 채병덕이 국군 군복을 입고 대한민국보다는 친일세력을 수호하는 일에 열심을 보였다는 점이다.

해방 이후 '제2의 친일' 인생
 

앞줄 왼쪽부터 황헌친, 정일권, 채병덕, 김백일 장군 ⓒ 위키미디어 공용

 
해방 이후의 친일청산 열기로 인해 정부수립 익월인 1948년 9월 29일에 친일청산 기구인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됐다. 그러자 채병덕은 반민특위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2020년에 <사총> 제100권에 실린 노영기 조선대 교수의 논문 '여순사건 이후 한국군의 변화와 정치'는 이렇게 설명한다.

"반민특위의 활동이 성과를 올리며 그 예봉이 자신들에게 향하게 되자, 국방부와 육군의 최고 수뇌부에는 그에 따른 위기감이 높아졌다. 일본 육사 출신의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대령은 원용덕·정일권 등과 의논해 자신이 육군참모총장을 그만두면 원용덕·정일권 등 군 수뇌부가 모두 물러나겠다는 뜻을 정부에 전달했다. 결국 이들은 군을 정치에서 독립시키는 데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며 친일파 숙청을 무력화시켰다."

채병덕은 남조선노동당(남로당) 활동이 발각된 친일파 박정희를 구명하는 데도 가담했다. 정치학자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은 친일군인 김정렬 등이 가세한 이 구명운동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김정렬의 구명 운동에 의해 채병덕 국방부 참모총장이 움직였고, 수사팀장인 김창룡이 여기에 동조하여 구명 방법을 생각해냈다고 한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친일청산 저지와 친일파 구명에 열심을 보인 것은 그가 입은 국군 군복 속에 일본군 군복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구의 남북통합 운동은 친일세력을 불리하게 만들었다. 이남보다 이북의 독립운동가 출신들이 해방 뒤에 훨씬 강한 정치적 무기를 갖고 있었다. 흔히 좌파 빨갱이로 불린 남한 항일·진보 진영은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분단이 무산돼 남북의 항일세력이 하나로 통합되면, 친일파들의 존립 기반은 당연히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88그룹 개입설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 그룹의 일원인 채병덕이 김구의 움직임을 두렵게 지켜보는 것은 당연했다.

김구 암살 직후에 채병덕은 이 사건을 안두희의 단독 범행으로 몰아갔다. 육군 소위가 상부의 지시를 받고 그런 일을 했을 리 없다고 선을 그었다. 1949년 6월 29일자 <경향신문> 우단에 따르면, 그는 암살 이틀 뒤인 6월 28일에 발표한 담화에서 "이번 범행이 하등 군내에는 관련성이 없는 것이 판명되었다"라며 국군은 국가에 충성하는 조직이므로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못받았다. 그런 뒤 "이번 범행의 동기가 확실히 개인적 행동"이었다며 이목을 안두희에게 집중시켰다.

그러나 그는 이 담화와 모순된 행동을 저질렀다. 1960년 8월 19일자 <조선일보> 3면 우하단에는 안두희가 1950년에 석방된 것이 채병덕의 명령 때문이었다는 서울지검의 수사결과가 보도됐다. 같은 신문의 8월 11일자 3면 중간에는 채병덕이 안두희 수사를 훼방하며 배후가 드러나지 않게 했다는 서울지검의 또 다른 수사 결과가 보도됐다.

채병덕은 1933년부터 12년간 친일재산으로 생활했다. 그는 이 경력로 인해 자신의 인생이 부정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해방 뒤에 열심히 제2의 친일을 벌였다. 그는 사세보 군항은 열심히 지킬지언정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열심히 지키지 않은 군인이다. 그가 해방 뒤에 국군 군복을 입고 열심히 지킨 것은 친일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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