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17 10:11최종 업데이트 23.12.17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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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가 넘쳐 나는 시대, 당신에게 딱 맞는 책이나 영화, 노래를 배달해 드립니다. 좋은 콘텐츠를 소개하면서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편집자말]
*연극 <메모리 인 드림> 및 <행복을 찾아서>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질문을 하나 하고 싶다. 혹시 당신이 알고 있는 영화, 드라마, 공연 중에 여주인공이 다음의 2가지 조건에 부합하는 작품이 있는가?


1.  사회에서 고립된 은둔형 외톨이일 것
2.  범죄와 무관한 소시민일 것


연극 <메모리 인 드림> 속 여자 주인공 앨리스는 이 2가지 조건에 모두 부합한다. 주인공의 이름은 앨리스. 토끼를 쫓던 어린 아이가 이상한 나라에 떨어지듯 촉망받던 도슨트에서 하루아침에 은둔형 외톨이로 전락한 인물이다. 앨리스의 은둔은 '살아갈 용기를 잃고', '인생의 항해를 멈추고 슬픔 속에 지쳐 잠든' 일상을 보내게 만들 정도의 상실을 경험하면서 시작된다.
 

연극 [메모리 인 드림] 포스터 ⓒ (주) 스탠바이컴퍼니


무너진 앨리스의 일상, 은둔형 외톨이가 되다

앨리스가 겪은 상실은 남편 이든의 죽음이다. 결혼 3년 차, 서로 사랑하며 함께 가꾸고 싶은 미래가 있으나 미래 지향적인 앨리스와 현재에 집중하는 이든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차이가 있다. 이 차이로 인해 둘은 자주 싸우고 화해했으나, 마지막 다툼 이후 교통사고로 인해 이든이 사망한다. 그렇게 둘은 화해하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관계의 끝을 맞이한다.

이후 앨리스의 일상은 완전히 무너진다. 이든과 함께 지내던 집에 스스로를 고립하고 타인과 완전히 단절된다.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않고 씻지도 않으며 자신을 전혀 돌보지 않는다. 앨리스는 잠으로 도피하고, 꿈속에서 죽은 이든을 만나 둘의 관계를 첫 만남부터 다시 한번 반복하는 일에 몰두한다.

앨리스의 이런 모습은 최근 사회면에서 자주 언급되는 '은둔형 외톨이'의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떠올리는 '잠재적 범죄자'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다. 최근 묻지마 범죄가 잇따라 발생하고, 많은 언론에서 가해자들이 공통적으로 사회에서 고립된 이들이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은둔형 외톨이를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시각 또한 많아졌다.

하지만 배우자를 잃고 무력하게 잠으로 도피하는 앨리스의 모습 어디에도 사회를 향해 칼을 휘두를만한 공격성도, 에너지도 찾을 수 없다. 창작물 속 인물과 실제 사람 사이에는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당연한 점을 지적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지적이야말로 우리가 은둔형 외톨이에 대해 잘 모른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우리나라는 은둔형 외톨이에 대한 정확한 통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지난해 서울시에서 19~34세 청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고립·은둔 청년 실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전국 기준)청년층에서만 61만여 명이 은둔하며 지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거기에 팬데믹으로 인해 증가한 중장년층 은둔형 외톨이들을 더하면 그 수는 더욱 많아진다. 즉, 가까운 나의 이웃이나, 알고 지내던 사람이 삶을 살아갈 힘을 잃고 은둔하고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은둔형 외톨이는 '자신을 탓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타인에게 실망과 분노를 돌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분노하고 자책하며 우울과 무기력에 빠진다는 것이다.

혹자는 "그 사람들이 나약해서 그래"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판단 역시 옳지 않다. 서울시 고립·은둔 청년 실태조사에 따르면 은둔형 외톨이의 절반 가까이는 직장 생활을 비롯한 사회적/경제적 활동에 참여할 의사가 있으며, 실제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다만 일상을 이어갈 에너지가 부족해지면 안전한 곳을 찾아 반복적으로 은둔하는 특성을 보일 뿐이다. 무기력과 좌절에 맞서 반복적으로 사회로 나서는 이들의 노력은 나약하다고 평가받을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다. 학습된 실패와 두려움을 이겨내고 반복적으로 도전하는 모습은 끈기 있고 강인하다고 칭할만하다.

하지만 아무리 끈기 있고, 치열하게 노력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무너진 일상을 완전히 회복하는 건 쉽지 않다. 곁에서 이해하고 지지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타인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방으로 숨어들었다 하더라도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그들은 '잠재적 범죄자'가 아니다
 

은둔형 외톨이에겐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위의 격려와 믿음이 필요하다. ⓒ pexels

 
연극에서도 앨리스가 무너진 일상을 추스를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가 등장한다. 대표적으로 꿈에서 만나는 죽은 연인 이든이 그렇다.

자신의 죽음과 함께 예정된 이별을 바꿀 수 없을지라도, 이든은 꿈속에서 자신과의 추억만 곱씹는 앨리스에게 "좋은 일만 가득하진 않겠지만, 여기 있어요. 나는!"이라는 외침을 시작으로 "그렇게 될 일은 그렇게 되는 거니까"라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남긴다. 그러면서 앨리스가 자책을 멈추고 자신의 삶을 다시 가꿔가도록 격려한다.

이런 이든의 개입은 전체 줄거리가 단순히 상실의 경험을 반추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을 살아가도록 응원하는 희망의 메시지로 변하도록 돕는다. 그렇게 관객들에게 무너진 일상을 내버려 두지 말고 위생에 신경 쓰며, 끼니를 제대로 챙길 것을 권한다.

이든의 격려는 앨리스의 고립에 틈을 만든다. 이후 그 틈을 열고 들어온 친구들이 앨리스를 이해해 주고 안아주며 슬픔을 딛고 일어설 용기를 불어넣어 준다. 주변의 지지에 힘입어 마침내 앨리스는 무너진 일상을 바로잡고 다시 한번 촉망받던 도슨트의 삶으로 복귀한다.

이 역시 현실의 은둔형 외톨이들이 다시 사회로 나서기 위해 필요한 지지의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8/31)에 출연한 김재열 한국은둔형외톨이지원연대 대표에 따르면 경기도에서 진행한 청년 은둔형 외톨이 지원 사업 중 그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항목이 '사회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해 주는 일이었다고 한다. 나의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하며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존재를 얻는 것만으로도, 이들의 삶은 조금씩 변화를 보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결국 일상을 영위할 힘이 없어 무너진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해와 공감, 지지의 언어다. 잠재적 범죄자로 바라보며 기피하거나, 나약함을 탓하기 보단 앞으로 더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격려와 믿음이 더 중요하다.

일상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안전한 곳을 찾아 방으로 숨어드는 경험도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므로 단언할 수 없으나, 일상을 지탱할 수 없을 만큼 에너지를 빼앗는 자책과 분노의 대부분은 상실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평생 수많은 상실을 경험한다. 소소하게는 지우개, 머리끈처럼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부터 삶의 방향성이나 목표 같은 거창한 언어로 표현되는 것들, 그리고 가족, 친구, 지인 등 나와 일상을 나누던 사람들까지. 삶의 끝이 죽음으로 귀결되는 이상 결국 모든 건 상실로 이어진다. 이중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난 상실을 경험하면 일상을 무너뜨릴 정도의 큰 슬픔과 무기력으로 이어지는 것뿐이다.

만약 원치 않던 상실과 그로 인해 일상이 무너져본 사람이라면, 사라진 시간 감각 속에서 무기력하게 반복되는 매일을 지겹게 여겨본 사람이라면, 비단 연인과의 이별뿐 아니라 삶의 중요한 어떤 것을 상실하여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는 하루가 버겁게 느껴진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 공연을 관람하길 권하고 싶다.

참고로 이야기의 흐름에 큰 반전이 없고, 전체 대사가 밀도 높은 일상의 언어로 적혀 있다. 게다가 극에서 건네는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에는 지나간 일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까지 냉정하게 담겨 있다. 때문에 극을 처음 본 사람은 언뜻 지루하거나, 피곤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고, 위안과 냉정함 사이에서 혼란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연인으로 표현된 앨리스와 이든의 관계를 자신과 본인이 상실한 관계와 대입하여 관람한다면, 분명 무너진 일상에도 다시 볕 들 날이 있을 것이라는 위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뉴욕을 배경으로 했던 '메모리 인 드림'은 현재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행복을 찾아서'로 각색하여 새롭게 막을 올린 상태다. 

   

연극 <행복을 찾아서>포스터 ⓒ (주) 콘텐츠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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