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20 11:23최종 업데이트 23.12.2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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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사당역사에 붙은 장애인관련 포스터가 찢겼다. ⓒ 구교형

 
지난주 국회 앞 양육비 미지급자 엄중 처벌을 호소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하고 돌아오는 길에 국회의사당역사 내에서 기막힌 광경을 봤다. 붙여놓은 장애인 관련 포스터를 누군가 여러 곳 뜯어버린 것이다. 장애를 가진 사람의 막막한 사정만큼이나 막막한 마음이 되었다.

그들에게 장애인의 상황과 형편이 어떠하며, 무엇을 주장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요즘 장애인의 자기 의사 표현에 대한 사회 여론과 정서가 어떤지를 한눈에 보여주는 장면이다. 물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등의 거듭된 차량 시위에 대한 시민들의 피로감이 쌓인 탓이 클 것이다.


나 역시 지하철을 기다리거나 타고 가다가 '** 파업으로 전동차가 제대로 운행되지 못함을 양해해 달라'는 안내방송을 들을 때 솔직히 짜증 난다. 더구나 정부나 장애인 문제의 주무 행정기관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라, 일반 시민의 불편을 대상으로 한 것 같아 더욱 화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원래 약자의 파업이라는 건 불특정 다수의 불편을 통해 억눌린 의사를 관철하려는 노동자의 권리다. 불법과 합법, 정당성 여부를 판단해야 하지만 일단 파업은 불편함을 수단으로 하는 것이다. 물론 그 파업이 정당한지 아닌지, 지지할 만한지 그렇지 못한지에 대한 국민, 시민 각자의 판단도 다를 것이며, 모든 파업이 다 옳은 게 아닐 수 있다. 

오늘 이 얘기의 요점은 어떤 파업이 주장하는 사회적 요구가 옳은지, 그른지 각각 따지기 이전에, 그런 사회적 요구마저 누구에겐 처음부터 유리하게, 또 누구에겐 처음부터 불리하게 위치 지워 있다는 사실이다.

처음부터 불리하게 위치 지워진 사람들

우리의 사회현실은 혼자만으로도 엄청난 존재감을 발휘하는 사람(기관, 영역)이 있고, 떼로 모여야 겨우 살아 있다는 목소리라도 낼 수 있는 사람(기관, 영역)이 있다.

경제를 두고 말하면 재벌은 그 자체가 집합적 힘이기에 단 한 명의 총수만으로도 엄청난 존재감을 발휘한다. 그래서 재벌총수의 일거수일투족은 항상 언론과 여론의 관심사이고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재벌총수는 사기업(私企業)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대통령을 비롯해 각부 장관들이 수시로 이들을 만나 대화하고, 밥을 먹고,  함께 활동한다. 특히 윤석열 정부에선 그 횟수와 방식이 너무 노골적이다. 잼버리 대회의 부실로 정부가 어려움에 빠지자 삼성, 현대, LG, SK 등 주요 재벌들이 대규모 물품 지원전에 나섰다.

부산 엑스포 유치를 위해서 대통령은 12대 그룹 재벌총수들을 무려 1년 동안이나 유치활동에 동원했다. 물론 그 결과는 압도적인 완패였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갑자기 부산 깡통시장에 총수들을 데리고 가서 함께 떡볶이를 먹었다. 내년 총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일 부산 중구 깡통시장에서 재계 총수들과 분식을 맛보며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에게 빈대떡을 나눠주고 있다. ⓒ 연합뉴스

 
그 바쁘고 만나기 힘들다는 재벌총수들이 대통령과 이렇게나 자주 만나고, 야당 대표조차 만나지 않는 대통령이 대기업 회장들은 동네 친구 불러내듯이 쉽게 어울리는 모습을 어떻게 봐야 할까? 대통령은 물론 경제 관련 주무 장관들조차 노동계 대표들을 만나는 건 그토록 꺼리면서 말이다.

여기서 보이는 무언의 메시지가 있다. 재벌총수는 국민이 함께 지켜야 할 사회의 공적 재산이고, 반면 노동자와 노조는 국민이 함께 막아야 할 공공의 적이라는 인식이다. 그래서 대통령과 정부는 노동자, 노조를 언급할 때면 항상 '불법, 과격, 엄단'이라는 수식어를 함께 꺼낸다. 그래서 상당수 우리 국민 자신도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누구나 비슷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보다는 오히려 어울리지도 않는 재벌 총수에게 심리적 친근감을 더 느끼나 보다. 하긴 삼성가의 딸들은 거의 인기 연예인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 그 바쁜 재벌총수들이 시간 쪼개가며 대통령과 떡볶이까지 먹으러 다니는 진심은 과연 무엇일까? 세상에 공짜는 없다. 더구나 평생 검찰에 몸담아 왔던 현직 대통령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상당수의 총수는 중요한 재판을 앞두고 있다. 이재용 삼성 회장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재판, 최태원 SK 회장은 기업 지분에 영향 줄 수도 있는 이혼 재판이 있다. 더구나 모든 대기업 총수들은 이런, 저런 법적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당장 돈을 주고받지 않았다고 해도 대통령이 총수와 자주 만나고, 술을 마시며, 떡볶이 먹으며 관계를 과시하고, 정당한 법 집행 중인 총수를 경제 살리기 위해서라며 거듭 사면, 복권하고, 재판에 영향을 주는 발언도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도 노동자, 노조에만은 거듭 '불법, 과격, 엄단'을 되새긴다.

이것이 정경유착의 사실로 번번이 파문을 일으키고 처벌되는 일이 반복됨에도 여전히 정권도, 재벌도 서로를 필요로 하는 이유다. 재벌총수와 노동자에 대해 다른 느낌을 갖게 하는 편향된 시선과 여론은 가뜩이나 기울어진 운동장을 더 기울게 하는 슬픈 일이다.

무언의 메시지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대표가 지난 11월 30일 오후 서울 시청역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박 대표는 이날 시청역 승강장에서 '서울시 권리중심일자리 연계사업 폐지 규탄 전국결의대회'를 열 예정이었으나 퇴거 요청을 받고 빠져나갔다. ⓒ 연합뉴스

 
경찰은 전장연 활동가 4명을 체포했다. 더구나 이제 그들은 지하철 통행에 불편을 주지 않고 다만 역사 안에서 침묵시위를 했는데도 말이다. 이들을 향한 따가운 시선은 예나 지금이나 '몸이 불편하면 자꾸 밖으로 나와 떠들지 말고 주는 혜택과 도움이나 받으며 집에 있으라'는 메시지가 아닌가?

도대체 장애인이 무슨 그리 죽을죄를 지었나? 장애인은 언제부터 공공의 적이 되었나? 민주노총에 대한 적대감이 이제는 장애인으로 바뀐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장애인으로 태어나거나 장애인으로 사는 죄인 것 같다. 안타까운 것은 지하철 직원들도 장애인 시위에 대해서는 '불법'을 외친다는 것이다.

노동자는 파업 한번 했다고 그것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불법 파업' 혐의로 끝까지 쫓아다니며 노동자 개인과 가정까지 추적해 천문학적 벌금으로 파탄에 이르게도 한다. 불법에 책임을 지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한계가 있어야 하고, 정도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발의된 '노란 봉투법'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다시 내던져졌다.

사실 노동자와 노조의 파업은 우리를 불편하고 짜증스럽게 한다. 불법도 끼어든다. 때로 동의하기 어려운 명분도 있다. 심지어 요즘에는 간호사의 열악한 처지를 개선하기 위한 간호법에 반대하는 고액의 의사마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삭발하고 파업을 벌인다. 분명히 옥석을 가려야 한다. 그러나 극단적 표현까지 가지 않으면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는 기득권의 불통 문화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재벌들은 교통이나 통행을 방해하며 절대 국민을 불편하고 짜증나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점잖고 품위 있게, 그러나 은밀하게 고액의 변호사를 통해, 또는 정부 고위층이나 국회의원과 은근한 압력과 당근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이익을 성사시킨다. 추운 날씨에 굳이 삭발하고, 거리에 나올 이유가 없다.

마침 유럽에서는 플랫폼 노동자 550만 명이 노동자로 분류되면서 최저임금이 보장되도록 하는 '플랫폼 노동조건 개선 지침' 제정안이 통과됐다고 한다. 기왕이면 '아저씨, 아줌마'보다 '사장님'이라고 불러 주면 좋기야 좋다. 그러나 자신이 진짜 자영업 사장도 아닌 사람에게 '사장님'이라고 불러 주는 '사장님 값'이 너무 비싸다. 택배하는 우리는 '기사님'이 딱 좋다.

사장님 아닌 사람이 없는 시대에 굳이 노동자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심정을 정부와 사회는 좀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사장님이 아니라 노동자로 살아도 충분히 인정받고 살 만큼 주어지는 세상은 아직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요즘에는 사장님들이 너무 힘들다. 추운 겨울에 한파를 견디는 사장님들도 진심으로 응원한다.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의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15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 진 후까지 끌지 말라 이는 그가 빈궁하므로 마음에 품삯을 사모함이라 두렵건대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신명기 24장 14~15절)
 

택배 분류 작업 (자료 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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