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31 17:40최종 업데이트 23.12.31 17:40
  • 본문듣기
'올해의 ○○'은 2023년을 마무리 하는 기획입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 도전, 실패, 인물 등 한 해 동안 일어났던 일들 가운데, 꼭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은 이야기를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편집자말]
2023년의 끝자락, 올 한 해를 돌아보며 내가 가장 잘한 것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이것이다. 바로 감사일기 한 줄. 이 한 줄의 시작은 바로 내 일터인 초등학교에 복직하기 전, 어느 도서관에서 우연히 빼든 책에 나온 한 구절 때문이었다. "감사일기를 쓰면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이 한 구절을 가슴에 품고 돌아와 학교 현장에 가서 아이들과 매일 써봐야겠다는 작은 다짐을 했더랬다. 

그렇게 시작된 감사일기는 4학년 우리 반 아이들과 3월 첫만남부터 지금껏 하루도 빼먹지 않고 이어져왔다. 하교 전 알림장 끄트머리에 한 줄씩 써나간 감사일기가 12월의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 시점. 아이들의 알림장엔 무려 200여 개 남짓의 감사일기가 보물처럼 쌓였다.
 

아이들과 알림장으로 쓰기 시작한 하루 감사일기가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 unsplash

 
의기양양하게 해보리라 다짐한 처음과는 달리 속으론 "요즘처럼 알림장 앱도 발달된 시기에, 가뜩이나 글을 쓰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종이 알림장을 매일 쓴다는 것 자체도 인내가 필요한 일인데 감사일기까지... 내가 괜한 일을 하는 게 아닐까?"라는 의심을 품었었다.

예상대로 첫날 아이들에게 감사일기를 써보자 제안했을 때, '그게 뭐냐'는 27개의 뾰족한 눈빛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다음과 같은 말들을 쏘아댔다. 여기저기서 폭죽처럼 볼멘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선생님 전 감사할 게 없는데요?"
"매일이 똑같은 하루라 감사할 일이 하나도 없어요~" 


한 번 다짐했으니 끝을 보자는 심정으로 전의를 불태우며 심호흡을 한 차례 한 뒤, 찬찬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자 얘들아, 오늘 첫 날이라 긴장했겠지만 좋은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나 무사한 하루를 보냈지? 어젯밤 걱정하고 잠든 사실을 떠올리면 이것은 참 감사한 일이야. 그리고 너희 1학년 때 생각해보렴. 코로나가 한창이라 입학식도 온라인으로 하고 친구들도 못보고 얼마나 힘들었니. 이렇게 학교에 올 수 있는 것도 감사할 일이란다."

불만으로 가득했던 아이들의 눈빛이 일순 숙연해졌다. 알림장 맨 끝 "감사한 일: ..." 에서 연필만 굴리던 아이들이 일제히 연필소리를 딱딱 내며 쓰기 시작한다. 그날의 알림장 감사일기는 죄다 "학교에 올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였지만, 새로운 시도에 첫 발을 내딛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기에 검사 맡으러 온 27명 모두에게 '왕별'을 그려주었다. 그 한 줄조차 버거워하는 아이들을 다독여가며 매일 감사일기를 지리멸렬하게 이어갔다. 

한 달 후 눈에 띄는 변화 세 가지

한 달여쯤 지나자 아이들의 감사일기엔 눈에 띄는 변화가 찾아왔다. 늘 "학교에 올 수 있어서 감사"라는 피상적인 내용이 점점 일상적, 구체적으로 변해가는 것이었다. 언젠가 한 아이의 감사일기는 "엄마가 아침에 학교에 늦지 말라고 매일 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였다. 

평소 엄마 아침에 깨우는 것을 짜증으로 일갈하던 OO이는 감사일기를 쓰다보니 그 사실이 참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단다. 그리고 한 아이는 "아침에 비오는 데도 교통봉사를 해주시는 녹색어머니들께 감사합니다"라고 써왔다. 그 전까지는 당연히 보아넘겼던 일인데, 감사일기를 쓰다보니 그 분들이 참 감사하게 느껴졌단다. 

이렇게 일 년간 감사일기를 이어오며 내가 느낀 효과는 세 가지 정도였다. 먼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당연하게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갑작스레 간암 4기 판정을 받고 돌아가신 친한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이 있었다. 문상을 다녀와서 아이들과 나눈 말. "얘들아, 오늘 아침에 우리가 눈을 뜨고 숨을 쉬며 이렇게 학교에 무사히 온 것은 참 감사할 일이야, 어제 돌아가신 선생님 친구 아버지는 오늘 아침 얼마나 눈을 뜨고 싶으셨을까?"

그 말이 끝나자 천진난만한 27개의 눈빛이 애처롭게 변해갔다. 그날 우리 반 감사일기는 대부분 "오늘 하루 눈을 뜰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아프지 않고 학교에 와서 공부해서 감사합니다", "부모님이 건강히 살아계셔서 감사합니다"였다.

그 시점으로부터 아이들은 숨을 쉬는 것, 두 발로 안전히 걸어다니는 것, 아프지 않고 학교에 온 것, 부모님이 내 곁에 살아계신 것 등 그 전까지는 당연하게 느껴지는 일들에 대해서도 감사하기 시작했다.
  

감사일기를 쓰기 시작하고 달라진 아이들(자료사진) ⓒ 픽사베이

 
두 번째는 바로 삶에서 긍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게 해당되는 일이기도 하다. 한 달 전쯤 급식시간, 두 친구가 장난을 치며 올라오다 한 친구가 중심을 잃고 넘어져 계단에 머리를 부딪힌 사건이 있었다. 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사색이 된 채 보건실로 뛰어내려갔다. 떨리는 손으로 보건실 문을 열었다. 다행히 아이는 외관 상으론 크게 다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보건선생님 말씀으론 이 정도면 괜찮은 거라고, 다만 아이가 좀 놀랐을 뿐이라고 했다. 혹시 모르니 부모님께 연락해서 상황 설명 후 지켜보라고 말씀드리라 당부하셨다. 그 말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친 아이의 손을 잡고 교실로 올라왔다.

아이의 상태를 보고 마음이 놓이자, 갑자기 속에서 화가 들끓기 시작했다. 계단 안전지도를 늘상 해왔는데도 가뿐히 그 말을 무시한 채 장난을 쳐 크게 다칠 뻔한 아이들이 솔직히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다친 아이의 학부모님께 고개를 조아리며 연락할 생각에 온 신경이 곤두서있기도 했다. 그런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혀 그날은 감사한 일을 쉽사리 쓰지 못했다. 몇 분째 애꿎은 커서만 깜빡거렸고, 아이들은 평소와는 다른 묘한 내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일순 분위기가 차분해졌다. 

잠시 뒤 아이들이 하나 둘 알림장 검사를 맡으러 나왔다. 그런데 우리 반 회장 아이를 비롯 너댓명 아이들이 써온 감사일기에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오늘 사고가 있었는데, OO이가 크게 다치지 않아서 감사하다." 

많이 다치지 않아서 감사하다니. 나는 그저 그런 장난을 쳐서 사고까지 일어난 사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으로만 마음을 가득 채웠는데 아이들은 긍정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 한 줄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봤던 때를 지금껏 또렷이 기억한다. 또 하나 다행인 건 전화를 받으신 학부모님께서도 내 지도 탓으로 넘기지 않으시고 가정에서도 주의를 주겠다고 하셨고, 그 사건을 교훈삼아 아이들은 더 이상 계단에서 장난치지 않게 되었다는 것. 

세 번째는 바로 다른 사람의 입장도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학기 말, 갑작스러운 체육 선생님의 병가로 내가 감당해야 할 수업시간이 늘어났고, 출근하면 빼곡히 쏟아지는 업무량에 허덕이며 힘겨운 하루를 보냈다. 

결국 목감기를 동반한 몸살이 나를 덮쳐왔다. 몸이 천근만근이었지만 대체 인력이 부족한 학기 말, 병가를 내기도 눈치 보이는 상황이라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출근했다. 핑그르르 도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고 5교시 풀수업을 겨우 마쳐냈다. 숨을 고르고 알림장 검사를 하는데 조용히 알림장을 내민 OO이가 쓴 감사일기에 눈 앞이 뿌얘졌다. 

"오늘 선생님이 아프신데도 5교시 수업을 열정적으로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한 줄을 말없이 한참을 응시하고선 빨간색 펜으로 크게 별을 그려주었다. 퇴근 후에도 내 뇌리에 선명히 그어진 그 한 줄은 감기약보다 더 큰 치유효과가 있었다. 

다음 날, 그 감사일기 한 줄 덕분인지 전날 푹 잔 탓인지 평소보다 가뿐한 몸으로 출근해 아이들에게 전날 OO이가 쓴 감사일기를 들려주며 "선생님 어제 OO이의 한줄 덕분에 오늘 무사히 출근을 했어. 너무 감사해"라는 말로 아침을 열었다. 그랬더니 우리 반 학생들의 그 날 감사일기는 복사-붙여넣기 한 듯 선생님에 대한 감사였고, 그날 하루 넘치는 사랑을 받았더랬다. 그렇게 아이들은 일상 속 감사함을 찾기 달인이 되어갔고 서로에 대한 감사도 잘 표현하기 시작했다. 

'감사일기'에 감사하다

이렇게 일 년간 감사일기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결과 내게도 아이들에게도 크고 작은 변화가 찾아왔다. 갈수록 힘이 드는 학교 현장에서 억지로라도 감사한 일을 한 가지씩 찾아내어 알림장에 쓰며 하루를 긍정적으로 마무리했고, 또 반 아이들이 가끔 알림장에 꾹꾹 눌러쓴 나에 대한 감사 한 줄은 다음 날 학교를 향한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었으니까.

반 분위기도 전에 없이 밝아졌다. 학기 초 소위 서로 안 맞는 두 아이들이 있어 크고 작은 다툼으로 늘 소란이 끊이지 않던 교실이, 2학기 들어서는 서로에게 감사표현을 서슴없이 하다보니 그 아이들도 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노는 장면이 자주 포착되었다. 그로 인해 교실 안을 흐르던 차가웠던 공기가 어느새 따뜻하게 바뀌어갔다.

아이들이 성장한 이유도 있겠지만, 27명이 한 명도 빠짐없이 매일 한 줄 꾸준히 써온 이 감사일기 덕분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감사일기 한 줄을 쓰며 당연한 것에도 감사하고, 긍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고, 다른 사람의 입장도 헤아려보게 된 아이들. 그 어떤 것보다 아이들을 변하게 하는 정말 '가성비 좋은 한 줄'이 아닐까? 
     
한 해가 마무리 되는 시점에서 감사일기를 쓰겠노라 작은 결심을 해준 3월의 내게, 여태껏 잘 따라와준 아이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마구 일었다. 우리는 다가오는 방학에도 앱을 통해 감사일기를 이어가보기로 했다.
 

방학 중에도 알림장 앱을 통해 이어나가는 감사일기 ⓒ 이유미

 

지난 22일, 설레는 방학을 앞둔 2023년 마지막 알림장 쓰는 시간. 어떤 근사한 감사한 말을 아이들에게 남길까 머리싸매고 수차례 고민하던 차, 벌써 알림장을 다 써서 들고 온 우리반 수학왕 OO이의 감사일기에 가슴에 무언가 뜨끈한 것이 차올랐다. 

"선생님과 함께 한 매일매일이 감사했어요, 방학 잘 보내세요." 

그 문장을 보는데 갑자기 지난 일년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반짝이는 그 문장을 한동안 응시한 뒤 빨간색 연필로 왕별을 여러 개 그려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려 주었다. 그 한 줄에 영감을 받은 나는 깜빡이는 커서에 누구보다도 빠른 손놀림으로 그날의 감사함을 쓴 뒤 아이들과 환호성을 지르며 겨울방학을 맞이했다. 

"늘 감사함을 꾸준히 표현해준 예쁜 1반과 함께 한 매일매일이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 속 감사일기장에도 한 줄이 덧붙여졌다.

"늘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을 감사로 가득차게 만들어준 이 감사일기에도 참 감사합니다."
 
덧붙이는 글 기사는 제 개인 브런치 계정에도 실립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