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피니틀리 폴라 베어> 포스터 이미지

영화 <인피니틀리 폴라 베어> 포스터 이미지 ⓒ 배드 로봇 프로덕션스

 
"엄마 말 잘 들어. 선생님이나 친구들한테는 이런 얘기 하지 마. 우린 아빠가 좋은 분이고, 우릴 해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걸 이해 못하거든."

양극성 장애를 가진 아빠와 두 딸의 이야기다. 엄마가 가난의 굴레에 빠지지 않기 위해 뉴욕으로 공부하러 가면서, 아빠가 1년 반 동안 열 살 전후 딸들의 주양육자가 된다. 조울증 증상이 심해져 해고 당하고 요양원에 있다가 나온 지 얼마 안 된 아빠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난장판일지 상상이 가지 않는가?

보면서 웃고 울었다. 다 보고 세 문장이 떠오른다. 유쾌해. 따스해. 마크 러팔로, 최고야!

그렇게 괜찮은 영화로 마음에 남기고, '나중에 아이들과 같이 볼 영화'로 적어두고는, 어쩐지 아쉬워 곱씹는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유쾌했던가, 어떤 부분에서 따스함을 느꼈던가.

첫 장면에서 카메론(아빠)과 매기(엄마)가 어떻게 만나 결혼하여 두 딸을 낳았는지 빠르게 보여준다(결혼 전 카메론은 매기에게 말했었다. 자기는 조울증이 있다고. 하지만, 매기는 그 병에 대해 몰랐고, 1970년 무렵엔 다들 '미쳐' 있었으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조증으로 이상하고 위협적인 행동을 하는 카메론의 모습이다. 매기는 차 안에 갇혀 어린 두 딸을 꼭 안은 채 두려움과 원망과 슬픔이 뒤섞인 얼굴로 카메론을 본다.

매기의 결혼은, 아무래도 망한 게 아닐까? 다음 장면. 카메론은 요양원에 들어간다. 매기는 두 딸과 함께 카메론을 면회한다. 약의 부작용으로 생기와 지성을 잃은 카메론. 그들에겐 확실한 불행거리가 생긴 게 아닐까?

매기는 혼자서 딸을 돌보며 돈을 버느라 애쓰지만, 점점 더 가난해지고 아이들은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한다. 뻔한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기는 MBA 과정을 밟기 위해 뉴욕으로 떠난다. (요양원에서 나왔지만) 혼자 살기도 벅찬 듯한 카메론이 18개월 동안만 아이들을 맡기로 한다. 아이들이 때때로 엄마에게 전화해서 빨리 와달라고 할 정도로 많은 게 엉망이다. 한숨이 나오고 기가 막힌 상황들.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불안한 어른으로 자라고, 유년시절의 트라우마로 오래 고생하지 않을까? 카메론 같은 사람과 결혼하지 말아야 하고, 카메론 같은 사람에게 양육을 맡겨선 안 되고, 카메론 같은 사람과 함께 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을 것 같다. 당연하지 않나?

그런데 꼭 그렇지가 않았다. 예를 들면 카메론은 바닥이 뻥 뚫린 중고 자동차를 사는데, 그걸 타면서 두 아이들은 기막혀하고 싫어하지만, 뚫린 구멍으로 보이는 움직이는 땅바닥은 이상하게 웃기고 신기하다. 별별 짐들과 알 수 없는 작업들로 집 안은 엉망이라, 아이들은 친구들 앞에서 숨기려 하지만, 그 안에서 자유롭고 신나게 논다. 이 영화의 감독 마야 포브스가 자신(극중 첫째 딸)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실제로 딸들이 지난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받아들이는지 알 것 같다.

어처구니없고 동시에 아찔한 모든 순간에, 나는 아이들이 걱정되거나 '이상한' 아빠에 대해 화가 나기보다, 응원하는 마음이 솟았다.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이 모자람과 부족함을 너끈하게 채우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정상'의 기준에서 카메론은 많이 모자라고 부족하지만, 카메론의 진심과 최선이 그것들을 덮을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실제로, 아이들은 슬퍼하거나 두려워하거나 원망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딸들은 아빠가 이상하다는 걸 알고 때로 부끄러워한다. 그럼에도 자신들을 사랑하는 걸 알고, 그들도 아빠를 사랑한다. 그래서 아빠의 보호를 기대하기보다, 서로 돕고 발 벗고 나선다. 

'이상'하지 않은 '정상적'인 어른들은 절대 보여주지 않을 모습을 아이들은 보았다. 그들이라면 분명히 허락하지 않을 일들을 시도했다. 그들과는 결코 할 수 없는 경험을 했다. 이것이 꼭 '좋았다'는 것도, '좋게 보였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기 표현을 더 확실히 하고, 스스로를 더 잘 돌보고, 서로 더 아끼고, 주체적이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며, 그렇게 키우려고 온갖 '일반적'이고 '교육적'인 방식을 써도 그만한 효과가 없던 사례들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세상의 어떤 이치들, 'A를 하면 B가 된다', 'C를 얻기 위해선 D를 해야 한다' 그런 가르침이나 명제들이 다 맞지 않다는 걸 알아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귀 기울이고 따른다. 내 삶도, 자식도 소중하니까. 소중한 것을 쥐고 도박을 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전제를 제대로 만족시키는 것은 언제나 어렵고, 대개는 불가능하다. 그럴 때, 아니 그러기도 전에, 그럴 것 같으면 벌써, 불안해지고 틀렸다고 생각하게 된다. 전전긍긍하면서 어떻게든 아등바등한다.

이 영화는 그 고리를 끊어주어서 유쾌하다. 우리, 사실 잘 모르잖아요? A를 해도 B가 되진 않고, D를 못해서 C를 얻지 못했지만 E가 있기도 하잖아요? 영화 속(그리고 아마도 실제인) 그런 인과관계의 틀어짐을 보면서, 내가 겪은 크고 작은 일들도 떠오른다. 맞아, 정말 그렇기도 해.

나아가, 이 모든 사건과 결과가 불완전하기 그지없는 한 인간을 믿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부수적인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이상한 용기가 생긴다. 그러니까 영화에선 대표적으로 카메론이 불완전했지만... 나도, 내가 사랑해야 하는 사람도,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도, 모두 얼마간 이상하고 불완전하니까 말이다. 조금은, 잠깐은, 불안해서 포기하기보다 불안하지만 사랑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된달까.

마크 러팔로는 인터뷰에서, "양극성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을 몇몇 아는데, 그동안 영화에서 그들을 다루는 방식이 마음에 걸렸다. 심각한 조울증 영화에선 찾아볼 수 없는 캐릭터가 바로 카메론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보여준 연기 이상의 무언가에 매료됐다. 이 배우가 가진 힘 때문에 이야기에 대해, 영화에 대해 좋은 쪽으로 착각을 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느 정도 착각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인간은 타인에 대해 언제나 착각하니까) 잘 모르는 타인에 대해 무조건 피하기보다 알고 싶어지게 한다는 점에서, 정말 잘한 캐스팅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나 바라는 바가 있고, 그에 대해 나름의 노력을 하고, 어쩌다 계획대로 이룬 것에 대해 크고 작은 만족을 얻고 산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마음대로 안 되고 틀어지고 엉망인 상황에 놓인다. 그럴 때 다 틀려버렸다는 결론으로 곧장 나아가려 할 때, 기억하고 싶은 영화다. 붙들고 싶은 사람들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정유진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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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구석 일진. 세 아이를 키웁니다. 육아 집중기 12년이 전생 같아서, 자아의 재구성을 위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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