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 은 신라의 27대 국왕이며 공식적인 기록상 확인되는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기도 하다. 선덕여왕은 보는 시각에 따라 삼국통일의 초석을 닦은 여걸로 해석되는가 하면, 한편으로 여왕이라는 상징성과 프로파간다를를 제외하면 실제 군주로서는 별다른 업적이 없다는 혹평도 공존한다. 과연 그녀는 어떻게 여왕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으며, 그 치세에는 어떤 사건들이 있었을까.
 
2월 21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96회에서는 '선덕여왕은 어떻게 한국사 최초의 여왕이 됐나'편을 통하여 선덕여왕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조명했다.
 
선덕여왕은 신라 26대 진평왕(眞平王)의 둘째 딸로, 즉위 이전의 봉호는 덕만공주(德曼公主)로 불렸다. 그녀가 태어난 6세기는 신라가 한강유역을 장악하며 국력을 서서히 팽창해가는 중흥기였고, 고구려-백제와의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명군으로 꼽히는 진평왕은 내부의 국방을 강화하고 중국(수-당) 왕조와의 외교를 통하여 신라의 평화와 안정을 이끌었다.
 
다만 진평왕에게는 53년이라는 긴 재위에도 불구하고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직계 자손이 없는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진평왕이 선택할 수 있는 후순위는 진골 귀족인 사위인 김용춘(장녀 쳔명공주의 남편) 혹은 외손자인 김춘추(김용춘의 아들, 훗날의 태종무열왕) 정도가 있었다.
 
하지만 진평왕은 놀랍게도 딸이자 차녀인 덕만공주를 후계자로 지목한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남자는 배우자와 상관없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지만, 여성은 배우자가 있으면 왕위계승자격을 박탈당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고대사회에서 어떻게 여성이 왕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신라는 골품제(骨品制)라는 신분제도로 계급을 구분했는데, 초기에는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의 구분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신라에서 성골 개념을 처음 도입한 주인공으로 '진평왕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진평왕에게는 자신과 직계혈족의 권위를 높이고 딸인 덕만공주의 계승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분석한다. 진평왕은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던 아버지 동륜태자(진흥왕의 아들이자, 진지왕의 형)의 직계 핏줄만 성골로 분류했다. 이렇게 되면 폐위된 진지왕의 후손으로 경주 김씨 가문이였던 김용춘과 김춘추는 진골로 분류되며 왕위 계승에서 배제되었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덕만이라는 이름은 불교의 <열반경>에서 등장한 석가모니의 제자인 덕만우바이(德曼優婆夷)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덕만우바이는 중생을 깨우치려 일부러 여자로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불교국가였던 신라는 정치에서도 불교를 적극 활용했고, 특히 불교를 숭상했던 진평왕은 자신과 가족의 이름들을 불경에서 따오며 '왕의 골족은 석가모니의 환생'이라는 신성하고 고귀한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덕만공주의 범상치 않은 자질을 보여주는 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진평왕은 어느날 덕만공주를 불러 당나라에서 선물로 보내온 아름다운 '모란꽃' 그림을 보여줬는데, 의외로 공주는 "벌과 나비가 그려져있지 않은 것을 보니 이 꽃에게는 향기가 없을 것"이라는 독특한 해석을 내린다.

한편으로 당나라에서 굳이 모란꽃 그림을 보낸 것을 두고 "신라공주는 향기가 나지않는 꽃"에 비유하여 매력이 없다고 모욕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음을 덕만공주가 간파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에 놀란 진평왕이 시험삼아 모란꽃을 심어보게 했는데 훗날 만개한 모란꽃에서는 정말 덕만공주의 생각대로 향기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덕만공주의 남다른 눈썰미와 통찰력을 부각시켜 훗날 진평왕의 후계자로서의 정당성을 과시하기 위한 일화로도 보인다.
 
덕만공주는 632년 1월, 마침내 아버지 진평왕의 뒤를 이어 신라의 왕위에 오르니 그녀가 바로 한국사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이다. 그녀의 정확한 생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학계에서는 왕위에 오를 무렵 40대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선덕여왕의 치세는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아버지 진평왕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핸디캡상, 여왕의 정치적 위상은 아직 불안정했다.

신라의 많은 귀족세력과 백성들은 이웃인 고구려나 백제, 중국에서도 전례가 없는 여성의 왕위 등극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기 불과 8개월전인 631년 5월에는 중앙귀족이던 칠숙과 석품이 반란을 모의하다가 적발되어 처형당한 사건도 있었다.
 
이에 선덕여왕은 즉위 초기에는 원로귀족인 을제에게 국정을 위임하고 전면에 나서지않으며 몸을 낮추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선덕여왕은 한편으로는 김춘추와 김유신같은 젊은 인재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육성하며 친위 세력을 모으고 있었다. 김춘추는 폐위된 왕의 후손, 김유신은 정통 신라계가 아닌 신라에 병합된 가야계 핏줄이라는 아킬레스건으로 인하여 신라 조정에서는 비주류에 속해있었다. 이들은 선덕여왕 치세에 구 귀족세력에 대항하는 신 귀족세력으로 성장한다.
 
선덕여왕은 재위 3년만인 634년부터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바꾸며 군주로서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어질고 바른 정치'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다. 또한 선덕여왕은 분황사(芬皇寺)를 창건하며 불교의 힘을 빌려 여왕의 권위를 높이려고 했다. '향기나는 황제의 사찰'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여성적인 색채가 강조된 분황사라는 이름에는, 과거 공주시절 자신을 조롱했던 '모란꽃 그림' 일화에 응수하여 여왕의 위엄과 신라의 국력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瞻星臺)를 지은 것도 선덕여왕 치세의 일이다. 학계에서는 선덕여왕이 첨성대를 지은 이유를 두고, 천문관측으로 날씨나 운세를 예측하고 여왕의 권위를 높여 신라의 중흥을 도모하려는 의도로 해석되고 있다. 선덕여왕 시기에 건립된 분황사와 첨성대 등은 이후 신라의 천년 역사를 함께하며 오늘날까지도 한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남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덕여왕 5년에 궁궐 서쪽의 옥문지(玉門池)라는 곳에서 대규모의 두꺼비들이 몰려서 울어대는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이에 여왕이 심상치않은 징조를 느끼고 옥문지와 이름이 비슷한 국경지대인 '옥문곡'에 병사들을 파견하여 확인하게하니, 과연 백제군이 숨어서 침공을 기회를 엿보고 있어서 선제공격하여 섬멸시켰다고 한다.
 
옥문곡 전투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선덕여왕이 두꺼비를 보고 백제의 침공을 예언했다는 내용은 후대에 여왕의 비범한 통찰력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각색된 설화로 보인다. 혹은 선덕여왕이 기묘한 자연현상과 첩보를 활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후, 여왕의 능력을 의심하는 기득권 세력과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선전술이었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이처럼 즉위 초기부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해야했던 선덕여왕은 642년 8월, 재위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다. 백제가 장군 윤충을 보내 신라의 주요 거점인 대야성(합천)을 함락했다는 충격적인 보고가 전해진 것. 신라에게 대야성을 빼앗겼다는 것은 바로 수도 금성(경주)까지 침공할수 있는 루트가 백제에 넘어갔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선덕여왕은 김유신을 파견하여 압량주 방어선에서 백제군의 공격을 간신히 저지해낸다. 그러나 이번에는 북쪽의 고구려가 백제와 동맹을 맺고 신라의 대중국 외교 거점인 당항성을 노리는 또다른 위기가 찾아온다. 이에 다급해진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지만, 정작 당 태종은 "여인을 임금으로 삼아 생긴 문제이니, 짐의 종친을 신라의 왕으로 삼겠다"는 모욕적인 제안을 선덕여왕에게 전했다고 한다.

하지만 선덕여왕은 굴욕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감정으로 자존심을 세우지는 않았다. 여왕은 철저하게 국익을 위하여 당 태종의 비위를 맞춰가면서 외교 협상을 지속했다. 이에 당나라는 직접적으로 지원군을 파견하지는 않았지만, 고구려를 외교적으로 압박하며 신라에 대한 공세를 늦추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한숨을 돌린 선덕여왕은 백제에 대하여 반격에 나섰다. 선덕여왕은 백제와의 여러 전투마다 신뢰하던 김유신을 중용했다고 하며, 숱한 전공을 세운 김유신은 이후 신라를 대표하는 명장이자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또한 선덕여왕은 훗날 신라삼보의 하나가 되는 황룡사 9층목탑을 건립하며 종교의 힘을 빌려 신라의 중흥을 기원하기도 했다. 9층목탑은 매 층마다 백제, 고구려, 일본, 중국 등 신라를 둘러싼 주변국들을 상징하며, 이들을 복속시키고 신라를 강대국으로 만들겠다는 선덕여왕의 포부를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선덕여왕 16년에 접어든 647년 1월, '비담의 난(毗曇—亂)'이 일어난다. 구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비담과 염종 등은 후사가 없던 선덕여왕이 유일하게 남은 성골인 사촌동생 승만공주(훗날의 진덕여왕)를 후계자로 낙점하여 차기 왕도 또다시 여왕이 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비담은 반란을 일으킨 이유로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 즉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한편으로 이는 치세의 말년까지도 선덕여왕의 왕권과 정통성이 불안정했다는 증거로도 해석된다.

이번에도 김유신이 출정하여 고전 끝에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비담의 난을 계기로 구 귀족세력은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하지만 선덕여왕은 난이 최종적으로 진압되는 모습을 다 보지 못하고 병으로 승하하고 만다. 학계에서는 반란의 충격으로 선덕여왕이 병을 얻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당시 여왕의 나이가 이미 60대를 넘긴 고령으로 추정되고 있기에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로 보는 시각도 있다. 
 
선덕여왕에 이어 진덕여왕이 왕위를 계승하지만 그 역시 후계자를 보지 못하고 승하한다. 자연히 성골의 혈통이 단절되면서 후순위로 진골인 김춘추가 왕위를 잇게 되니, 그가 곧 태종무열왕이다. 신라는 무열왕과 그 아들인 문무왕 시대로 이어지며 고구려와 백제를 잇달아 병합하고 삼국통일을 이루게 된다.
 
선덕여왕의 실제 역사적인 업적과 역할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매우 엇갈리는 편이다. 선덕여왕 치세기간의 신라는, 내내 안으로는 귀족세력과의 갈등, 밖으로는 백제-고구려와의 거듭된 전쟁에서 번번이 수세에 몰리며 내우외환의 국가적 위기에 놓여있던 시기였다.

선덕여왕은 여왕이라는 한계로 인하여 적극적으로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재위 기간동안에는 불교 문화를 융성시켰다는 것 정도 외에는 뚜렷하게 내세울만한 구체적인 업적은 확인하기 힘들다.
 
하지만 선덕여왕이 처했던 엄혹한 시대적 상황과 환경을 감안할 때, 여왕으로서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생존'했다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선덕여왕은 숱한 위기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왕위도 신라도 모두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또한 선덕여왕의 치세 기간동안 구 귀족세력이 몰락하면서, 여왕이 중용한 인재였던 무열왕과 김유신 등은 이후 신라의 새로운 주류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들이 훗날 '통일신라'시대로 이어지는 전성기를 여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선덕여왕의 역사적 역할은 결코 가볍지 않다.
 
여성이 왕이 되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었던 시대, 선덕여왕은 '최초의 여왕'으로서 누구도 걸어보지 않았던 길을 걸어가며 외로움과 세상의 편견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낸 인물로 기억되어야하지 않을까.
벌거벗은한국사 선덕여왕 신라 골품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