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27 11:56최종 업데이트 24.02.27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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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기철 ‘4·3 통일의 길 마중물’ 조사단장 "제주인의 한 사람으로서 제주의 가장 큰 아픔이자 항쟁의 역사인 4·3의 진상을 온전히 밝혀내는 것이 임무라는 생각에서 '마중물' 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 황의봉

 
계곡의 공기가 일변하며 전진의 신호를 보냈다. 일렬로, 우익청년단, 민보단원들의 첨병부대가 차례차례 계곡 바닥을 메우면서, 제1진, 제2진 밑을 통과했다. 다음은 토벌대의 짐을 짊어진 민보단원의 보충부대인가 했더니, 철모를 쓴 무장본대가, 그것임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군화의 묵직한 발소리를 울렸다.

선두가 제1진 밑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고, 제2진 밑으로 접어들었을 때, 골짜기 밑을 겨누고 일제히 사격이 시작되었다. 좁은 계곡에서 폭발, 튀어 오르는 총성이 빗게오름의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좁은 계곡은 아비규환의 도가니로 변했다. 적은 마구 발포했지만, 응전은 되지 않았다. 계곡의 바위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넘어질 듯 비틀거리며 시체를 밟고 넘어 계곡 밖으로 도망치는 군복의 등 쪽에 총탄이 명중해 구멍을 냈다.


와아-, 와아-, 우와-·····. 그때 총성의 틈새를 비집고, 오름 너머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이 들려왔다. 전투를 거의 구경하고 있었다고 해도 좋은 남승지와 천 동무가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많은 사람의 고함이 오름 너머에서 나고 있었다. 세차게 울리며 이어지는 군중의 박수가 멀리서 울리는 천둥소리처럼 메아리를 동반했다.

"피난민이다."
"어, 맞다, 피난민이야."

근처까지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창을 든 게릴라들도 오름 쪽을 돌아보았다. 총성은 계속되고 있었다.
 
제주 출신의 저명한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의 대하소설 〈火山島〉 제12권 32∼33쪽에 나오는 노로오름 산물내 전투장면이다. 이처럼 소설에서 혹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오던 4·3 당시 한라산에서의 전투와 피난민들의 도피, 은신생활은 이제 잊힌 역사가 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히도 그 시절 산에 오른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 기록으로 남기는 사람들이 있다. 70여 년 세월이 묻어버린 흔적들을 현장에서 살리는 이들이다. 바로 '4·3 통일의 길 마중물'(아래 마중물)이다. 마중물은 2022년 노로오름, 2023년에는 한대오름 일대의 4·3 유적지 조사보고서를 세상에 내놨다.

제주4·3 76주년을 한 달가량 앞두고 배기철 마중물 조사단장을 만났다. 배 단장과 마중물 회원들은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한라산 깊은 산속으로 향한다. 그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그들이 기록한 '산에 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그들이 한라산에서 목격한 4·3의 흔적
 

유물 탐지작업 한대오름에서 배기철 조사단장이 금속탐지기로 유물을 찾고 있다. ⓒ 4.3 통일의 길 마중물

 
사실 한라산의 거대한 수림지대를 민간인들이 들어가 조사 활동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엄두를 내기 쉽지 않은 일이다. 마중물 활동을 시작하게 된 사연이 궁금했다.

"제가 시민단체 활동을 쭉 해오면서 보니까 선배들이 자기 역할을 마치고 공식적인 직책을 내려놓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더 이상 보이지 않더라고요. 후배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렇다 할 활동공간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농민회나 노동조합, 시민사회단체 등에서 역할을 하셨던 분들과 만나 '제주지역 운동에 도움이 되는, 혹은 의미 있는 일을 찾아보자'라고 의견을 모은 끝에 2015년 10월에 마중물을 공식 출범하게 된 것이지요.

현재 50여 명의 회원이 4·3 당시 중산간 및 한라산 지역의 유격대와 피난민의 흔적을 조사하는 일을 비롯해, 4·3 관련 자료를 모으고 연구하고 기록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조사 작업은 일단 7∼8년 정도의 기간에 중산간 마을 위쪽 지역을 대상으로 해서 일요일마다 시간이 되는 회원 10명 내외가 모여 진행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총 240여 회, 연인원 1220명이 참여했습니다."


마중물 회원들은 2017년 10월 첫 번째 현장조사에 나섰다. 앞에서 소개한 김석범 선생의 <화산도>에서 묘사된 장소이자, 여러 증언집에서도 언급한 노로오름 일대를 시작으로, 한대오름, 돌오름, 시오름, 산란이오름, 녹하지악, 서중천, 마흐니 등 지역을 조사해나갔다. 마중물 조사팀은 이들 지역에서 무엇을 목격했을까.
 

4·3 유물들 애월읍 소재 노로오름 북쪽의 족은들굽궤에서 출토된 숟가락 철창 항아리조각 등 유물. ⓒ 4.3 통일의 길 마중물

 
"이들 지역에서 피난민들의 은신처와 집터, 솥단지 숟갈 항아리 등 유물, 일제가 판 진지동굴 그리고 유격대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곳과 탄피 총알 철창 등 전투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노로오름의 큰 분화구인 장태코에서는 애월면 유격대의 근거지로 추정할 수 있는 집단 방어시설과 무기류, 전투 흔적 등이 고스란히 발견됐어요. 이곳은 보존 가치가 크다고 봅니다.

장태코에서 발견한 유물 중 특기할 만한 것으로 미 육군의 정복 단추가 있었습니다. 왜 이런 물건이 떨어져 있었는지 의문입니다만, 몇 가지로 유추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시 미군정 시기였기 때문에 미군이 토벌대와 함께 갔거나 아니면 토벌이 끝난 후 미군이 조사하러 현장에 갔다가 떨어뜨렸던 것일 수 있습니다. 혹은 한라산으로 들어간 유격대원이 무기나 옷가지를 탈취해 입산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어쨌든 미군정과 미군이 4·3에 개입하고 있었다는 게 확실하다는 물증인 셈이죠.

4·3이 발발했던 1948년 겨울과 이듬해인 1949년 초에는 눈이 엄청 많이 왔다고 합니다. 피난민들은 동굴이나 궤(바위 밑 사람이 머물만한 공간)를 찾아들거나 땅을 파고 나뭇가지들을 얼키설키 엮어서 추위를 피했던 것 같아요. 당시 피난민의 증언을 들어보면 추운 건 그래도 견딜 수 있었으나 배고픈 건 견딜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 추운 겨울에 살아남기 위해 산으로 들어간 그분들의 마음은 어땠는지 생각하면 절로 찡해집니다."


한라산의 깊숙한 곳부터 가는 마중물 팀
 

미 육군 정복의 단추 노로오름 장태코에서 미군의 단추가 발견돼 그 배경을 두고 여러 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다. ⓒ 4.3 통일의 길 마중물

 
김석범 선생이 소설에서 묘사한 산물내 전투는 4·3 당시 유격대와 토벌대가 벌인 대규모 전투 중 하나로, 유격대가 매복하고 있다가 한라산 깊숙한 곳까지 추적해 온 토벌대를 유인한 뒤 일제히 사격을 가해 승리하는 장면이다. 실제 답사한 현장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장태코 서쪽 능선에는 5∼6개의 보초터 흔적이 있고, 이곳에서 다수의 탄피와 탄두를 발견했어요. 이 일대에 주둔했던 유격대가 토벌대를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장태코 북서쪽 능선 보초터(애월, 한림지역 관망 가능)에서 불발탄과 탄피가 발견됐고, 북동쪽 능선 보초터(제주시, 애월지역 관망 가능)에서도 많은 수의 탄피가 발견됐어요. 이로 미루어 산물내를 따라 오르던 토벌대와 유격대 간의 전투가 서쪽 능선에서 시작됐고, 토벌대의 일부가 북동쪽 능선으로 우회하지 않았나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장태코 안에는 돌을 쌓아 살았던 집터와 우물터 흔적들이 보였고, 현재도 비가 내리면 분화구에 물이 고이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충분히 식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코가 달린 물항아리 모양(장태코)의 지형적 조건과 천연요새로서의 이점을 갖추고 있어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거주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소설에서 유격대가 토벌대를 격퇴하는 장면을 지켜보던 피난민들이 성원의 박수를 보내고 민중의 노래를 합창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실제로 그 지역에 많은 피난민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마중물 팀은 한라산에서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역을 먼저 조사하고 있다. 정상부에 가까운, 고도가 높은 깊숙한 지역이다. 회원들이 대부분 50대 이상이다 보니 나이가 더 들기 전에 힘든 지역부터 조사해 보자는 취지다. 자연히 애로점이 많을 듯하다.

"가장 큰 어려움은 현장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유격대나 피난민들이 머물렀던 곳에 대한 구체적인 증언이 많지 않기 때문이죠. 지금 살아계신 분들은 당시 10대 정도의 나이에 불과해 정확한 지명이나 장소를 특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까지는 중산간 마을이나 해안지대에서 어떤 피해를 보았는지 그 진상을 밝히는 데 주력한 반면, 한라산에서 벌어진 전투나 은신생활과 관련해서는 구체적인 장소나 지명에 대한 사실확인이 미흡했던 것 같아요.

또 옛길이 사라지고 조릿대와 가시덤불, 울창한 밀림지대를 헤치고 나가는 일도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요. 한번은 눈 덮인 겨울 밀림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동료 한 분이 발목을 삐어 낭패를 본 적도 있었습니다. 처음 조사를 시작했을 때는 별다른 탐사 장비도 없이 옛날 어른들이 소나 말을 방목하거나 벌목하기 위해 산으로 올랐던 길을 더듬고, 한라산 물줄기를 따라 오르는 식이었지요.

요즘은 증언자료도 많이 확보해 참고하고 옛날 지도와 미군정의 항공사진을 대조해 보며 체계적으로 조사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리고 탐사 장비도 갖추고 있습니다. 금속탐지기와 핀포인트 탐지기를 활용해 넓은 범위부터 세부적인 범위까지 탐사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4.3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과정"
 

들굽궤 앞에 모인 조사단 노로오름 북쪽 들굽궤 앞에서 조사단이 기념촬영을 했다. 상부에 보초터의 모습이 남아 있고, 입구에는 비바람을 막기 위해 돌을 쌓았다. ⓒ 4.3 통일의 길 마중물


노로오름과 한대오름 일대에 대한 조사 결과를 책자로 펴낸 마중물은 올해 4·3 당시 유격대 사령관이었던 이덕구의 최후 전투현장 조사를 하고 있다. 이덕구는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체육교사로 재직했던 인물로 김달삼의 뒤를 이어 제주도 인민유격대 사령관직을 맡았다. 그동안 이덕구가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진 이덕구 산전(山田) 정도만 알려졌을 뿐 그가 사망한 현장은 확실치 않다. 배기철 조사단장은 어떤 구상을 하고 있을까.

"올해 인민유격대 이덕구 사령관 전사 75주기를 맞습니다. 경찰과의 교전 중 사망한 곳으로 알려진 개월이오름(견월악)과 주요 주둔지 중 하나였던 북받친밭(이덕구 산전) 등 이덕구 부대의 흔적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당시 작전에 참여한 토벌대원은 개월이오름 북쪽이라는 증언도 있습니다만, 이덕구 사령관이 최후를 맞은 곳은 아직 정확히는 모르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유격대와 토벌대 간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알려진 어승생악과 영실 지역, 성판악 속밭, 물장오리 등 한라산 국립공원 지역을 중심으로 조사할 생각입니다. 이를 통해 해안지역에서부터 마을 인근 피신처, 중산간 오름, 한라산 깊숙한 곳까지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고, 유격대의 근거지와 전투지역 등을 확인하게 되면 총체적으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배기철 조사단장에 따르면 마중물은 단지 현장조사뿐 아니라 4·3 관련 증언과 자료를 수집, 연구하고, 기록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작업은 4·3 76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1948년 10월 하순부터 이듬해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전개된 이른바 초토화 작전으로 4·3 희생자의 80% 이상이 이 기간에 발생했습니다. 이때 무자비한 폭력과 학살을 피해 많은 이들은 한라산으로 숨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대부분 중산간 마을의 주민이었습니다.

1949년 초의 토벌대 쪽의 기록을 보면 2만여 명의 사람들이 한라산록에 있었다고 합니다. 증언자에 따르면 수십 명씩 마을 단위로 나무가 우거진 숲속이나 궤에서 생활했다는 겁니다. 또 '탄압이면 항쟁이다'를 외치며 '단독선거 반대, 조국통일과 민족해방'을 위해 봉화를 올리고 궐기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4·3 당시 행방불명자 4천여 명 중 많은 분이 한라산 지역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모든 분의 행적에 대해 파악하고 알아가는 과정이 바로 4·3의 진정한 의미를 찾고, 제 이름을 찾아가는 중요한 과정일 것입니다."


배기철 조사단장은 도배일을 직업으로 삼으며 오랫동안 제주 시민사회 운동에 참여해 오고 있다. 마중물 활동을 하기까지 걸어온 과정을 들어보았다.

"1987년 민주화 투쟁의 열기가 제주에도 미쳐 이때부터 4·3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시민단체의 운동도 활성화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1988년부터 제주 민주청년회라는 단체가 결성됐고, 제가 1992년부터 부회장을 했습니다. 그 후에는 지방자치를 새롭게 모색하고 이를 통해 지역의 민주주의를 추구해 보자는 취지에서 제주 주민자치연대라는 조직을 만들고 이에 참여해 2011∼15년에는 대표를 맡기도 했습니다. 강정 해군기지 건설 반대운동에도 함께 했고요.

4·3 관련해서는 제 고향이 애월읍 봉성리입니다. 작은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행방불명된 유가족이기도 합니다만, 그런 개인적인 사연보다는 제주인의 한 사람으로서 제주의 가장 큰 아픔이자 항쟁의 역사인 4·3의 진상을 온전히 밝혀내는 것이 임무라는 생각에서 마중물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기록되지 못하고, 기억되지 못한 죽음
 

‘마중물’ 조사보고서 2022년 펴낸 노로오름 일대 조사보고서(왼쪽)와 2023년 펴낸 한대오름 일대 보고서. ⓒ 황의봉


마중물 회원들은 조사 작업을 할 때마다 4·3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막걸리를 한 잔 올린다고 한다. 또 새해를 맞으면 산으로 피신했던 사람들이 살았던 곳을 찾아가 간단한 제를 지낸다. 전투 현장과 은신처를 찾아다니며 조사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상념이 스쳐 지나갈 것 같다. 배기철 조사단장은 어땠을까.

"이덕구 산전에 가면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 아무런/ 이유가 없어져 버린 것이/ 억울한 것이다'. 저는 한라산 깊은 곳에 은신했던 흔적들을 보면서, 아,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그 마음이 어땠을까, 4·3 진상규명 작업은 이런 분들의 억울한 사연까지 모두 밝혀져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아직 시신도 못 찾은 행불자만도 4천여 명이 되지 않습니까. 이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어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4·3 76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4·3에 대한 진상이 어느 정도 드러나면서 국민의 인식도 많이 달라진 것 같다. 향후 4·3의 남은 과제는 무엇일까. 배기철 조사단장의 소회를 들어봤다.

"제주 4·3의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 배상 등 많은 영역에서 진전들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제주 4·3은 여전히 '사건'으로 규정되고, 굳어져 가고 있는 현실에서 '정명(正名)'의 과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이 정명의 과정에서 놓치지 말고 짚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잊힌 이들'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아직도 한라산록으로 올라야만 했던 이들의 삶은, 그 속에서 죽어가야 했던 이들의 죽음은, 온전히 기록되지 못하고 또 기억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4·3의 운동 주체와 배제자의 문제이자, 이들에 대한 기억 투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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