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9-1856)는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예술가로, 글씨를 잘쓰는 '명필(名筆)의 대명사'로 알려진 인물이다. 일설에 따르면 김정희는 평생에 걸쳐 열 개의 벼루에 구멍을 내고 천 개의 붓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완성된 그만의 글씨체인 '추사체(秋史體)'는 해외에 까지 그 명성이 전해지며, 원조 한류스타이자 조선 최고의 캘리그라피(Calligraphy)로 이름을 떨치기에 이른다.
 
3월 6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한국사> 98회에서는 '조선판 BTS 추사체가 뭐길래, 추사 김정희는 어떻게 원조 한류스타가 됐나'편을 통하여 김정희의 반전 일대기를 조명했다.
 
김정희는 1786년 충청도 예산현 입암면 용궁리(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에서 아버지 김노경과 어머니 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 김씨로 김정희의 증조부인 김한신은 조선 21대 국왕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으며. 영조의 왕비인 정순왕후 역시 경주 김씨로 여러 대에 걸쳐 왕실과 끈끈한 인연을 맺어올만큼 로열패밀리 가문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김정희는 태어난지 얼마되지않을때부터 붓을 가지고 놀았다고 하며, 7살 때 이미 글씨에 재능을 인정받아 체제공 등 당대의 명망있는 인사들로부터 훗날 명필이 될만한 영재라는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금수저로 태어난 김정희는 24세때 청나라행 사행단(사신단)을 이끌게된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子弟軍官, 사신의 개인수행원)으로 발탁되어 연경(지금의 북경)으로 가게 된다.  

학구열이 남달랐던 김정희는 과거에 합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공부보다는, 경전에 대한 다양한 해석 등 학문과 예술에 대한 탐구에 몰두했다. 그는 스스로를 광사(狂士)로 칭하며 '진리를 탐구하는데 미친 선비'를 자처했다고 한다. 당시 김정희는 조선에 비하여 앞서있던 청나라의 신문물을 접하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하며, 청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찻집에서 밤을 새가도록 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김정희는 청나라의 대표적인 서예가이자 원로학자이던 옹방강(翁方綱, 1733-1818년)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두 사람의 나이는 무려 54세였지만 학문에 대한 관심과 깊이에서 마음이 통했다. 옹방강은 김정희의 학자로서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고, 이에 감격한 김정희는 옹방강과 나눈 필담을 평생 소중하게 간직했다고 한다.

옹방강과의 만남은 김정희가 이후 조선을 대표하는 '금석학자'로 성장하는 전환점이 됐다. 금석학(金石學, Epigraphy)은 비석이나 금속 기물에 쓰여진 글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옹방강은 바로 이러한 금석학의 권위자였다. 옹방강은 김정희에게 알아보기 힘든 비석속 한자들을 손수 알려주며 특별 레슨을 해줬다.

김정희는 39일간의 짧은 연경 유학을 마치고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후, 본격적으로 금석학 연구에 나서기 시작했다. 김정희가 주목했던 것은 북한산에 위치한 '진흥왕 순수비(眞興王 巡狩碑)'였다. 신라 24대 국왕인 진흥왕은 국경지대를 순시한 뒤 북한산 비봉을 비롯한 한반도 각지에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는 비석들을 세웠다.
 
하지만 오랜 세월 방치되어 비석이 손상되면서 그안에 담긴 내용의 의미는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다. 조선 시대에 이르러 당대 사람들에게는 어떤 비석인지도 잊혀져있었고, 막연히 진흥왕이 북한산 근처를 수도로 정하려했다는 표지석 정도로 추정될 뿐이었다.
 
김정희는 직접 몇차례나 암벽을 올라 손상된 비석을 닦아내 탁본을 떴고, 복원된 문장들과 역사기록을 대조해가는 수고를 감수하며 비석을 해독하는 작업에 전념했다. 무려 1년여간의 기나긴 노력 끝에 김정희는 마침내 이 비석의 정체가 진흥왕 순수비이고, 진흥왕이 신라의 영토 확장에 대한 치적과 의의를 기록한 내용임을 알게 된다. 김정희의 노력 덕분에 잊혀질뻔했던 우리 조상들의 흔적이 세상에 다시 알려질수 있게 된 것이다.
 
진흥왕 순수비의 내용과 역사적 의미를 연구한 것은 김정희가 최초였다. 또한 김정희의 연구로 인하여 당시 조선의 전통문화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잘못 기재되어있던 순수왕비에 대한 오류도 바로 잡았다. 현대 학계에도 고대 한국사에 대한 사료가 매우 부족한 상황에서, 김정희의 연구 덕분에 삼국시대를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를 되찾은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한국 금석학의 시대를 연 효시로까지 평가받는다.
 
기쁨을 이기지 못한 김정희는 순수비 측면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며 비문의 판독사실을 기념하기도 했다. 당연히 요즘 시대에 이런 짓을 했다가는 문화재 훼손으로 실형감이다. 진흥황 순수비의 원본 비석은 현재 국립박물관으로 이전되었으며 북한산에는 원본을 그대로 재현한 모작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한편으로 김정희는 서예가나 금석학자로서의 업적 못지 않게 초기에는 관료로서도 승승장구했다. 김정희는 순조와 효명세자를 보필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했고 정 3품 당상관까지 올랐다.
 
하지만 순조 말기부터 경주 김씨 가문이 안동 김씨와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면서 김정희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1830년 경주 김씨를 후원하던 효명세자가 요절하고 안동 김씨에게 정치적 숙청을 당하며 아버지 김노경에 이어 김정희 역시 모든 관직을 빼앗기고 쓸쓸한 유배길에 오르게 된다.
 
1840년 제주도로 유배를 온 김정희는 자신의 거처에 귤중옥(橘中屋, 지금의 서귀포시 대정읍)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평생 로열패밀리로만 살아왔던 김정희에게 유배지의 열악한 환경과 사람들과 떨어져 고립되었다는 괴로움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당시 김정희가 아내 예안 이씨에게 보낸 편지들에는, 세상물정 모르는 명문가 도련님 출신다운 철부지같은 면모도 드러난다. 취향이 까다로웠던 김정희는 유배지에서도 아내에게 섬에서는 구하기 힘든 고급음식이나 간식류, 비싼 생필품을 보내달라고 떼를 썼다고 한다.
 
아내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김정희가 요구한 물품들을 배송했지만 저장보관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조선 시대의 사정상, 김정희에게 도착했을때는 음식과 물건이 대부분 상하거나 파손되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김정희는 아내와 꼬박꼬박 편지를 주고 받았다. 유배지에 갇혀 지내야했던 김정희에게 편지는 세상과의 유일한 소통창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1842년 11월, 아내는 김정희가 유배에서 돌아오는 모습을 끝내 보지 못하고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다. 누구보다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던 김정희는 두달이나 지나서야 뒤늦게 아내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었다고 한다. 장례식에도 갈 수 없었던 김정희는 비통한 심경을 감추지 못하여 추모의 글에서 "푸른 바다만큼 긴 하늘만큼 나의 한은 끝이 없을 뿐입니다"라며 아내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을 전했다. 
 
아내를 잃은 아픔을 잊기 위하여 김정희는 글씨를 쓰는 일에 몰두했다. 김정희의 제자 이상적은 스승을 위하여 청나라에서 들여온 최고급 문방사우와 서적들을 아낌없이 선물했다고 한다. 김정희는 이상적을 위하여 보답으로 세한도(歲寒圖)라는 작품을 선물한다. 세한도는 측백나무와 소나무를 통하여 의로운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며 유배지에서 외로운 생활을 버텨내고 있는 김정희 자신과,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상적은 청나라를 방문했을 때 세한도를 지인들의 모임에서 선보였다. 수많은 중국의 문인들이 세한도에 감탄하여 여러 가지 감상평을 첨부했는데, 이로 인하여 작품의 규모는 본래 1m 정도였던 원본에서 무려 14.7m까지 늘어나게 된다. 이는 오늘날의 '댓글'에 해당하며 다수의 중국 문인들이 조선의 작품에 이렇게 많은 댓글을 남긴 것은 세한도가 사상 최초라고 한다.

또한 왕홍이라는 청나라 문인은 김정희의 글씨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돌에 새기고 탁본까지 떴다고 한다. 비록 김정희 본인의 몸은 유배지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의 명성은 이미 중국에까지 알려질만큼 원조 한류스타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무려 8년에 걸친 긴 유배생활을 보냈던 김정희는 조선 24대 국왕 헌종 재위기에 이르러 비로소 유배에서 풀려난다. 하지만 헌종이 그로부터 불과 6개월만에 돌연 세상을 떠났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굳어지면서 김정희의 조정 복귀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한양으로 돌아온 김정희는 방에 틀어박혀 오직 글쓰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희의 집은 한번이라도 그의 글을 받으려는 사람들도 문지방이 닳을 정도였다고 한다. 특히 청나라의 문인 정조경(程祖慶)이라는 인물은 한번도 본적이 없는 조선의 김정희를 동경하여 문복도(捫腹圖)라는 그림까지 보내어 팬심을 전했다.

여기서 김정희는 인자하고 후덕한 대학자로, 정조경은 무릎을 꿇고 배움을 구하는 제자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정조경은 "그림이 괜찮다 싶으면 수염을 쓰다듬으시며 웃고 즐겨주십시오"라는 글을 덧붙이며 김정희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김정희의 한양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안동 김씨의 거듭된 견제로 김정희는 결국 함경도 북청으로 두 번째 유배길에 오르게 된다.

김정희는 북청 유배기간동안 30여년에 걸쳐 미뤄져왔던 '침계(梣溪) '라는 두 글자를 완성하게 된다. 침계는 김정희의 친구였던 윤정호의 호였다. 과거 윤정호는 글을 잘쓰는 친구 김정희에게 호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오래된 비석과 금속의 글씨를 바탕으로 글을 써왔던 김정희는, 친구를 위하여 중국 한나라 시절의 서체로 멋지게 글을 써주고 싶었으나, 아무리 한대 시절의 비석을 찾아도 '물푸레나무 침(梣)'자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미뤄져왔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김정호는 약 30여년만에 북조 시대의 비석에서 그토록 찾아헤메던 '침'자를 발견하고 마침내 그의 대표작이 되는 침계, 두 글자를 완성한다. 답답해보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한 글자라도 타협하지 않는 김정희의 고집과 장인정신이 담긴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김정희의 서예를 향한 노력과 집념은 마침내 그만의 고유한 서체인 '추사체'를 탄생시키는 원동력으로 이어진다.
 
1852년 8월, 김정희는 두 번째 유배를 마치고 돌아와 과지초당(瓜地草堂, 현 경기도 과천)에 은거하며 말년을 보냈다. 말년의 김정희는 가세가 기울며 평범한 생활도 어려울만큼 궁핍하게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김정희는 예서대련(隷書對聯)에서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최고의 반찬은 두부와 오이,생강,나물)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리는 아내와 자식, 손자가 함께 앉는 것)'이라는 문구들을 통하여 소박한 반찬과 일상의 행복을 예찬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한때 유배지에서도 반찬투정을 하던 부잣집 도련님이었던 김정희가, 모진 세상풍파를 겪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유복한 삶에서 멀어지고 난 후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찾은 모습을 상징한다.
 
1856년 10월 10일, 김정희는 71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평생 글에 미친 광사답게 김정희는 죽기 불과 3일전까지도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김정희의 '추사체'가 과연 무엇이냐고 정의내리는 것은 오늘날 전문적인 학자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화가에게 고유의 화풍이 있는 것처럼, 문장가에게는 서체가 있다. 20세기 미술을 대표하는 최고의 거장이자 입체파를 대표하는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세계를 특정한 화풍으로 정의내리기 어려운 것처럼, 김정희의 서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추사체는 특정한 스타일보다도 이러한 김정희의 독특한 창조성을 구현한 작품세계 전반을 아우르는 정의에 가깝다.
 
'가슴속에서 오천 권의 문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다.'

김정희가 남긴 어록이다. 김정희는 수많은 연구와 학습을 거쳐 '침계(梣溪)''잔서완석루(殘書頑石樓)' '무량수각(无量壽閣)' 등의 대표작을 통하여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했다. 그리고 김정희가 마지막으로 남긴 최후의 유작은, '봉은사 판전 현판(奉恩寺 板殿 懸板)'으로 지금도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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