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27 11:13최종 업데이트 24.03.27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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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연말, 미국 뉴욕주 맨해튼 교외의 우리 동네에서 주민 설명회가 열렸다. 개인 사정상 참석이 어려워 설명서라도 가져올 요량으로 이른 시간에 설명회장에 들렀다. 안내 데스크에서 인쇄물을 살펴보고 있는데 불평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법 입국자를 불법 입국자라고 하지 뭐라고 하란 말이냐. 내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못 알아듣는 건 아니지 않냐."


주변 사람들 사이로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이주민'(migrant)이라는 소리를 내었다. 주민 설명회는 이주민과는 아무 관련 없는 '스쿨버스의 전기차 전환'이 주제였다. 그런데 왜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까.
   
우리 동네 가까운 곳에 콜로세움(Nassau Veterans Memorial Coliseum)이라는 대형 경기장이 있다. 아이스하키를 비롯한 스포츠 경기와 각종 대형 공연이 열린다. 주변에는 미식축구 경기장, 센트럴 파크보다 더 넓다는 아이젠하워 파크, 명문 사립대와 커뮤니티 칼리지, 어린이 박물관, 항공우주 박물관, 비즈니스 센터 등이 모여 롱아일랜드 주민이 이용하는 하나의 거대한 복합 단지를 이루고 있다.

국경을 넘어 밀고 들어온 이주민들로 인해 수용시설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공화당 소속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는 그들을 버스에 태워 민주당 소속 주지사들이 있는 대도시로 보냈다. '피난처'를 자처하던 뉴욕에도 쉴 새 없이 버스가 도착하면서 포화상태가 돼버렸다. 뉴욕시장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이주민을 위한 수용시설을 세우기 위해 협조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수용시설 부지로 콜로세움이 거론된 것이다. 
 

이주민 숙소 후보로 거론된 나소 참전용사 기념 콜로세움 경기장 뉴욕시와 뉴욕주는 이주민 수용 시설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다. 맨해튼대학교 기숙사를 사들였고, 뉴욕주립대 캠퍼스 기숙사 중 하나를 이용해 보려 했으나 반대에 부딪혀 실패했다. 건물은 물론 대형 주차장이 있는 곳에 임시 막사와 같은 텐트촌을 설치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러나 인구 밀집과 유동성이 높은 맨해튼이나 인근 교외 주택 지역조차 안전과 고비용, 물가로 인해 확보가 쉽지 않다. ⓒ 장소영

 
대통령 선거가 기름 부은 이주민 문제

주민 설명회에서 불평하던 주민은 '유명 정치인들이 자신의 지역구엔 수용시설이 못 들어오도록 막으면서 우리에게 다 떠넘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민주당의 진보 여성 정치인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의원은 수용시설이 본인의 지역구에 들어오려는 것을 거부한 적이 있다. 우리 지역 자치단체장도 '콜로세움을 이주민 수용시설로 사용할 계획과 예산이 전혀 없다'고 발표하며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내가 놀랐던 것은 주민의 불평이 아니라 그가 이주민을 지칭한 용어였다. 덜 자극적이고 관용적인 단어 사용을 해오던 분위기가 깨지고 있다. 어쩌면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동양계를 공격적으로 대하던 때가 떠올라 더 놀랐는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국경을 넘어온 이들을 통상 '이주민'이라 불러왔다. 그러나 이주민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불법 입국자, 난민, 심사 대기자, 이주민, 예비 이민자, 불법 이주자, 불법 체류자 등이 언론과 주민 사이에서 혼용되고 있다.

여기에 대통령 선거가 기름을 부었다. 이주민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 대결이라기보다 과열 정쟁이 되는 모양새다. 공화당 대선주자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거침없이 '불법', '침략자'라는 단어를 사용해 왔고, 지난주에는 이주민을 가리켜 '사람이 아니라 짐승들'이라는 막말까지 내뱉었다.

민주당 대선주자인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의회 연설 중에 '불법 이민자'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바이든 행정부도 서서히 이주민 문제에 강경하게 돌아서는 눈치다.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의 국경 강화와 불법 입국 강경 대응에 먼 나라 이야기 듣는 듯하더니 단기간에 엄청난 이주민이 도심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지역마다 갈등이 번지고 있다. 

텍사스 주지사가 이주민을 보내는 곳이 단순 노동인력이 절실한 지방이 아니라 집세와 생활비, 인구 밀집도가 높은 대도시이다 보니 이들을 받아낼 인력이나 예산은 물론 이주민과 주민이 함께 안전한 임시 거주지를 구하기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두 곳의 임시 숙소에 가보다 
 

맨해튼 중심의 이주민 숙소 루스벨트 호텔 텍사스에서 보내지는 이주민들은 우선 이곳에서 하차한다. 생필품을 쉽게 구할 수 있고 입맛에 맞는 동향 음식과 일자리도 있을 것 같지만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모든 것이 쉽지 않다. ⓒ 장소영


'이주민'하면 바로 떠오르는 맨해튼의 루스벨트 호텔과 롱아일랜드 퀸즈에 있는 임시 텐트촌을 찾아가 보았다.

루스벨트 호텔은 하루 이용객 7만 명이 넘는 뉴욕 그랜드 센트럴역 건너편에 있다. 걸어서 15~20분 거리에 센트럴파크, 카네기홀, 록펠러 센터, 타임 스퀘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등 관광명소가 모여있다. 한 블록만 건너면 패션 5번가라 불리며 관광객들도 붐비는 명품 쇼핑 거리도 있다. 한 마디로 맨해튼의 노른자에 위치한 셈이다.  

이주민을 위한 임시숙소가 결정될 때 늘 따라오는 문제가 주민의 안전이다. 요즘은 그나마 통제가 이뤄지고 인근 임시 숙소로 이주민들이 분산되면서 초기 최악의 상황보다는 나아졌다고 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안전 위협에 숙소 주변은 긴장 상태일 수밖에 없다.

주변 노점에서 핫도그를 사며 상인에게 물으니 '요즘은 일찍 집에 간다'고 답한다. 그나마 푸드 트럭은 이른 저녁 장사까지 가능하겠지만 수레에서 홀로 간단한 음식을 파는 이들의 사정은 또 다를 것이다. 인근 이주민 때문이냐고 했더니 '묻지 마라'고 잘라 말한다. 전에는 가능했던 짧은 대화마저도 건네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근처에 행사가 있어서인지 호텔 주변은 차량과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그러나 몇 블럭만 지나면 한눈에도 구별되는 이들이 거리를 서성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롱아일랜드 퀸스의 이주민 텐트촌 주민 반대가 극심했으나 병원 주차장을 이용해 텐트촌을 세웠다. 주민들은 주변에 어린이 청소년 시설이 많은 주택지역이라는 사정을 고려해 달라고 했으나 사실 맨해튼이나 인근 교외지역에서 그렇지 않을 곳을 찾기란 쉽지 않다. ⓒ 장소영


롱아일랜드 퀸즈에 있는 임시 텐트촌도 처음 들어설 때 주민 반대가 극심했다. 텐트촌이 들어선 병원 주차장 주변을 살펴보니, 길 건너는 놀이터, 초등학교, 야외 운동 경기장, 시니어 센터 등이 들어선 주택가였다. 텐트촌 바로 앞에 버스 정류장도 있었다. 주민 반대가 있을 만했다. 그런데 뉴욕 어디에 이렇지 않은 곳이 있을까.

경찰이 경비를 서고 있는 주변으로 이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자국어로 큰소리로 웃고 떠들다가 손을 흔들어 주기도 했지만 영어 사용자는 없어 보였다. 출근 시간이 조금 지나서인지 버스 정류장은 한산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이에게 텐트촌과 이주민들이 신경 쓰이는지 물어보았다. 어깨를 조금 으쓱하더니 "낮에는 경찰도 있고... 글쎄"라며 말끝을 흐렸다.

또다른 이는 "너는 괜찮으냐?"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다가 취재 중임을 밝히자 같은 주민인 줄 알고 이야기 한 거라며 인터뷰를 거절했다. 다만 "이 거리는 여성과 아이들, 가족들이 자주 지나는데 저기(이주민 숙소)는 남성 전용이다. 여기도 좀 와서 보고 결정해야 하는거 아니냐. (지역 사정 고려가) 희망사항이다. 이건 써도 된다"고만 했다. 

뉴욕시는 이주민의 임시 거주지 문제를 다각도로 해결해 보려 하지만 번번이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 숙소 이용을 제한하려 해도 1981년 뉴욕주 법원에서 결정한 '쉼터 권리 보장'에 걸리고, 텍사스에서 오는 버스 규제도 실패했다.

이주민을 실어 나르는 버스 회사도 난감하다. 텍사스주와 계약은 했으나 이주민을 실어 오면 뉴욕시에서 소송을 걸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상황에 맞지 않게 발목을 잡고 있는 옛날 법과 소송전이 예산과 시간을 더 소모하게 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이미 뉴욕시 인구의 2%에 달하는 15만 명이 유입되었고 그중 70%가 자녀를 동반한 이주민 가족이라 한다. 이들에게 100억 달러 이상을 쏟아부으면서 공공도서관, 푸드뱅크, 보육 서비스 등 일상과 밀접한 예산부터 줄이겠다고 하니 주민들도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옥석을 빠르게 가려내 노동허가증과 영주권을 쥐어주기도, 그렇다고 밑빠진 독에 물을 계속 부을 수도 없는 상황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결국 민심을 잡는 것은 정책 
 

2023년 12월 5일 미국 뉴욕의 세인트 브리짓 초등학교에 있는 이주민지원센터 밖에서 이주민들이 쉼터를 찾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 연합뉴스

 
1850년대 뉴욕에서 독특한 정당이 유권자들의 표심을 흔든 적이 있다. 미국당(American Party), 미국원주민당(Native American Party), 이름만 들어서는 애국 정당 같지만 이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끈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바로 반이민 정서이다.

그들은 당시 대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아일랜드인과 독일인들을 극도로 경계했고 혐오의 대상으로 삼았다. '유럽에서 일어났던 피비린내나는 구교-신교 간 전쟁이 미국에서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 '피임과 낙태를 반대하고 자녀를 많이 낳는 가톨릭교도의 특성상 곧 절대 다수를 이뤄 수년 내 미국은 교황이 조종하는 구교의 나라가 될지도 모른다'고 선동했다.

반이민-반가톨릭 정서를 타고 그들이 지원한 후보가 뉴욕시장과 시카고시장에 당선되었고, 비밀 결사단이 조직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활동을 감추기 위해 무엇을 물어도 모른다고 답하는 이들을 '무지당'(Know Nothing)이라 불렀다. 한때 맹렬히 활동하던 이들은 미국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도 등장한다. 

그러나 무지당은 곧 역사에서 사라졌다. 정책의 뿌리는 얕고, 혐오 선동만으로 유권자의 마음을 오래 붙잡아 둘 수는 없었으며, 남북 전쟁이라는 더 큰 위기 앞에서 힘을 쓸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아일랜드-독일계 노동자들의 경제 기여와 그들이 유권자로 행사하는 한 표의 힘도 무거웠다.

수년간 펜데믹을 견뎌내고 아직도 고공행진 중인 인플레이션과 가파르게 오른 주택비로 인해 뉴욕커들의 삶도 고달프다. 대선을 앞두고 여론조사기관마다 뉴욕시와 뉴욕주 유권자 관심사 1~2위를 다투는 주제가 '이주민 대책'이다.

아직은 월담해온 이들을 '이주민'이라 부르고 음식을 기부하며 영어와 시민의식을 가르치면서 도움을 주려는 자원봉사자들이 있다. 이들마저 지치기 전에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법 적용과 정책을 찾아내 민심을 성공적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이번 미 대선의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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