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21 13:48최종 업데이트 24.03.21 13:48
  • 본문듣기
흔한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 '오마이뉴스 기자 박정훈'과 '공공운수노조 부위원장 박정훈',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연대를 모색해 나갑니다. [편집자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상임공동선대위원장과 윤영덕 더불어민주연합 공동대표가 20일 오전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더불어민주연합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합동회의에서 손을 맞잡고 있다. 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 김부겸·이해찬 상임공동선대위원장과 이재명 상임공동선대위원장, 더불어민주연합 윤영덕·백승아 공동대표. ⓒ 남소연

 
지난 편지에서 정훈님이 제게 요즘 '정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셨는데요. 한 마디로 막막합니다.

지금 거대 양당은 '가치'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의제도 안 보입니다. 이전에는 비례대표 후보들의 면면으로 그 정당의 지향점을 읽을 수 있었지만, 비례위성정당이 만들어진 뒤에는 그조차도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정권 심판' 대 '야당(운동권) 심판'의 구도만 있습니다. '상대방이 싫으면 나를 찍어줘'입니다. 그런데 심판 이후에는 어떤 세상이 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진보정당이 위축되어서 제3의 선택지 역시 두드러지지 않는 상황에서, 공약이나 비전은 유권자들로부터도 사실상 무의미하다고 여겨지는 분위기입니다.  

선거 과정에서 기존에 정당이 추구했던 '가치'가 무너지거나 퇴색되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더불어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민주연합)이 시민사회(연합정치시민회의 국민후보추천심사위원회) 추천 비례대표 후보인 임태훈 전 군인권센터 소장을 공천에서 배제한 것입니다. 사유는 '병역기피'였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로 수형생활까지 한 이를 '병역기피'라고 지칭하며 후보 자격을 박탈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대체복무제 도입에 힘써오고, 때때로 양심적 병역거부자와 함께 목소리를 낸 민주당의 역사를 한 순간에 무너트리는 셈이니까요. 게다가 시민사회가 추천한 후보를 민주연합이 자의적 기준을 들이밀면서 배제하는 것은 '연합'의 취지를 무색하게 만듭니다.

시민사회는 다시 한번 임 전 소장을 후보로 추천했지만, 민주연합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맞서 국민후보추천심사위원회 상임위원 전원이 사퇴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었습니다. 임 전 소장의 공백은 다른 후보가 채우면서 시민사회 후보 몫 4명이 유지가 됐습니다. 주말이 지나니 뉴스에서도 임 전 소장 컷오프 이야기를 찾아보기 어렵더군요.

임태훈 컷오프, 이대로 잊힐 일인가
 

해병대 고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과 관련, 임태훈 전 군인권센터 소장이 지난 7일 오전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이종섭 전 국방부장관의 호주 대사 임명 철회를 촉구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이정민

 
정훈님, 저는 이런 일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도 되는 건지 정치인들 한 명 한 명에게 묻고 싶습니다. 쉽게 잊힐만한 일이 아닙니다. 제겐 진보정당의 세력이 약화됨과 동시에, 민주당 내에서도 소수자를 대변하거나 진보적 가치를 내세우던 사람들이 전혀 힘을 못 쓰는 현실을 상징하는 일처럼 느껴졌으니까요.

이번 일은 양심적 병역 거부를 민주당에서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에 그치지 않습니다. 일각에선 임 전 소장이 컷오프된 이유에 대해 '양심적 병역 거부'가 아니라, 그가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이기 때문이라고 추정합니다. 임 전 소장의 양심적 병역거부 선언 역시 당시 성소수자를 정신질환자로 판정하는 징병당국의 차별에 반대해서였습니다.

<뉴스앤조이>는 15일 보도에서 국민후보추천심사위원회 심사위원장 김상근 목사의 말을 옮겼습니다. "공개 오디션에 참여할 12명의 후보를 공개했을 때부터 민주당 내부에서는 임태훈 전 소장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병역 문제보다도 성소수자 이슈에 대한 것이었다. '성소수자 문제가 불거지면 우리가 감당 못 한다'고 하더라"라고요. <경향신문>도 14일 보도에서 민주당 관계자의 말을 빌려 "교회에서 성소수자 인권운동을 한 임 전 소장 반대 메시지가 나오니 차마 자진 사퇴해달라고 요구하지는 못하고 비겁하게 한 사람의 인생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컷오프한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민주당은 그간 차별금지법 제정을 비롯해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 줄곧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난 21대 총선에선 성소수자 비례후보가 있던 녹색당과의 비례연합이 어렵다며 "성소수자 등 소모적 논쟁 일으킬 당과 연합 어렵다(당시 윤호중 민주당 사무총장)"는 발언이 나오기까지 했죠. 이러니 임 전 소장이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실제 컷오프 이유가 아니냐는 말이 나올 수밖에요. 그리고 민주당의 임 전 소장 컷오프는 보수개신교 입장에선 '효능감'을 주는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음은 <국민일보>의 기사 제목입니다.

<"헌정사 첫 동성애자 국회의원 나오나"> (3/12 국민일보)
<"국방 정책 흔들 동성애자가 국회의원이 되는가."> (3/13 국민일보)
<교계 "임태훈 컷오프 올바른 결정... 경계 늦추지 않을 것.> (3/14 국민일보)

 

<국민일보> 3월 12일자 기사 "헌정사 첫 동성애자 국회의원 나오나”... 교계 긴장 ⓒ 국민일보 PDF

 
12일 자 기사의 리드는 이렇습니다 "국회의원 총선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대한민국 헌정사에 있어서 첫 번째 동성애자 국회의원이 나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교계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이어 반동성애 운동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서 "입법 기관에 부적절한 인물이 진입한다는 것은 심히 우려스러운 일"이라고 전하는가 하면, 마지막 문단에선 "향후 교계는 반성오염 운동에 박차를 가한다는 계획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후속 보도에서는 '국방 정책을 흔들 동성애자가 국회의원이 되는가'라는 한국교회언론회의 논평을 정리했고, 그다음 임 전 소장이 컷오프된 뒤에는 "교계는 안도하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분위기다"는 내용의 기사로 정리를 합니다.

임 전 소장은 '채상병 수사 외압 사건'으로 곤욕을 겪고 있는 박정훈 대령을 지키겠다는 포부로 총선에 출마했습니다. 성소수자 인권은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수 개신교 진영에서는 오로지 성적 지향만으로 한 사람을 '부적절한 인물'이라고 낙인을 찍습니다. 부조리의 극치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민주당은 저들의 압력에 굴복한 듯 보입니다. 아니 어쩌면 민주당 내에도 이미 보수 개신교 진영의 '반동성애'에 동조하는 이들이 꽤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사실 더 큰 문제는 민주당에서 임 전 소장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렇다 할 성명이나 내부 비판의 목소리도 없었습니다. 소위 비이재명계를 둘러싼 공천 파동과는 달리 갈등도 다툼도 없이 넘어가더군요. 임 전 소장과 양심적 병역거부의 합법화와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함께 하던 의원들, 다 어디 갔습니까.

왜 한국은 커밍아웃한 성소수자 의원 없나
 

2021년 11월 3일 당시 국회 소통관에서 차별금지법(평등법)을 대표 발의한 더불어민주당 권인숙(오른쪽부터), 이상민, 박주민,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손팻말을 들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일본은 성소수자 차별금지법(LGBT 이해증진법)을 2023년에 신설했고(당시 G7 정상회의 개막에 맞춰 인권 선진국 이미지를 갖추기 위해 졸속으로 법안을 처리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이미 이사카와 다이가(참의원), 오쓰지 가나코(전 참의원) 등의 성소수자 국회의원도 존재합니다.

미국 역시 성소수자 의원이 상원에 2명, 하원에 11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왜 안 됩니까? 리서치 기업 입소스의 인사이트 리포트 <LGBT+ Pride 2023>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성인 성소수자 비율은 6%라고 합니다. 국회의원 300명의 6%는 18명입니다. 그런데 성적 지향이나 성정체성을 공개한 성소수자는 우리 국회에 한 명도 없습니다. 성소수자 국회의원이 없다는 것은 대표성 측면에서도 문제가 많은 것이죠.

통계청이 지난해 12월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 2023'에 따르면 2013년 이후로 '성적 수용자 수용 인식' 지표가 꾸준히 개선되고 있다고 합니다. 성적 소수자를 '이웃이나 직장 동료로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응답하는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는 거죠. 하지만 절대적인 지표로는 2022년에도 과반수의 응답자가 성소수자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함께 조사된 '(소수자) 집단별 감정 거리'에 있어서도 응답자들이 가장 차갑게 느끼는 (수용을 꺼리는) 집단은 전과자, 그다음이 성적 소수자였습니다.  

그만큼 성소수자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차별과 배제를 경험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들의 인권을 보호하고 사회의 인식 개선을 위해서라도 차별금지법(헌법의 평등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을 금지하는 법률)이 필요한 것이겠죠. 

우연의 일치일까요, 아니면 정말 무언의 분위기가 있는 걸까요. 21대 국회에서 차별금지법(평등법) 발의에 참여한 29명의 민주당 의원 중 이번에 지역구 후보가 된 의원은 10명에 불과합니다(이상민 국민의힘 의원은 당적을 바꿨으니 제외). 이 중에서도 몇 명이 당선될지는 알 수가 없고요. 차별금지법 제정에 참여한 의원들이 국회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은, 좋지 않은 징조가 분명합니다.

민주당에서 사라지고 있는 '진보'

아마 제가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정훈님은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민주당에 뭔 기대를 그렇게 많이 했느냐, 원래 저렇지 않았냐'라고요. 2000년대 초반부터 진보 좌파 운동에 몸담아 온 정훈님으로선, 민주당의 수구적인 모습이 기본값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민주당 내에서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은 저에겐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지방선거 이후 1년 동안 정치부 기자로서 국회에서 만난 민주당 의원들은 제각각 성평등, 기후위기, 플랫폼 노동자 권리 보호, 장애인 이동권,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문제는 각개전투에 불과했고, 그러한 의견이 당의 주류가 되진 못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윤석열 대통령의 잦은 '거부권' 행사 탓에,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려는 동력도 상당 부분 상실한 듯 보입니다. 

민주당의 한 축을 지탱하던 진보적 색채는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사실은 두 개의 진보정당은 민주당과 비례연합을 구성했고, 나머지 진보정당들은 2004년 이후 가장 좋지 않은 성적이 예상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국회 내 '범진보' 세력이 약화되면, 아마 국회가 대변하는 목소리와 다루는 의제는 보다 협소해질 것입니다. 이는 정치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요.

적대의 정치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한동훈 국민의힘 중앙선대위 총괄선대위원장이 지난 1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제22대 국회의원선거 국민의힘 중앙선대위 발대식 및 공천자대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남소연

 
우연히 영국 정치학자 버나드 크릭의 <정치를 옹호함 - 정치에 실망한 사람들에게>를 읽었습니다. 저같은 사람들을 위한 책인가 싶어서 읽어봤습니다. 아무래도 62년 전, 냉전 시기에 쓰여졌기에 생경한 측면이 있었지만, 몇몇 부분은 지금 한국 정치에 대입해 봐도 동의가 되더군요. '행위'로서의 정치를 말하는 그는 다양성과 다른 이해관계를 통합할 수 있는 조정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정치란 서로 다른 진실들을 어느 정도 관용해야 한다는 것, 곧 통치란 서로 경쟁하는 이해관계들이 공개적인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가능하다는 것, 실로 그래야 통치가 가장 잘 이루어진다는 것에 대한 인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24p)

"정치란 이념에 대한 이해나 전통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행위다. 그것은 생기 넘치고, 적응력 있는, 유연하고, 누군가를 달래는 행위다. 정치란 자유로운 사회가 통치되는 방식이다."(90p)


버나드 크릭이 규정한 정치는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난 19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이번 총선을 "국민과 국민의힘의 대결"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같은 날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이번에 지면 이번 윤석열 정부는 집권하고 뜻 한 번 펼쳐보지 못하고 끝나게 된다. 종북 세력이 이 나라의 진정한 주류를 장악하게 되는 선거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적대의 정치는 관용도 없고, 유연하지도 않고, 누군가를 달래주지도 못합니다.  

그렇다고 정치를, 정치에 대한 기대를 포기할 순 없는 노릇입니다. 이건 너무 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무거운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정훈님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 무기력한 시대를 어떻게 견뎌 나가고 계시는지요, 그리고 무엇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계시는지요.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