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03 09:13최종 업데이트 24.04.03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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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 ⓒ 권우성

 
이전 글 '대통령과 재벌 총수의 동행, 그 뒤에 숨은 거짓말'(https://omn.kr/27z81)에서 '모두가 다 잘사는 윈윈 경제란 없다'고 했다. 그렇기에 '좋은 경제'의 조건은 그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알아서 다 잘해줄 것이라 믿는 게 아니라, 경제의 주체들(정부, 기업, 노동자) 사이에 밀당을 통해 더 좋은 분배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21세기 자본>으로 찬사받은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도 책에 이렇게 썼다.
 
"부와 소득의 불평등에 관한 어떤 경제적 결정론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의 분배의 역사는 언제나 매우 정치적인 것이었으며, 순전히 경제적인 메커니즘으로 환원될 수는 없다. … 불평등의 역사는 관련되는 모든 행위자가 함께 만든 합작품이다." - <21세기 자본>, 토마 피케티, 정경덕 외 옮김, 글항아리, 2014년, 32쪽

보편적 정치나 모든 시대의 경제는 없다. 한국 정치와 프랑스 정치가 다르듯이, 공자가 살던 시대 경제와 오늘 우리가 사는 경제가 다르다. 발전하든 퇴보하든 경제는 항상 변하며, 그래서 우리와는 다르지만 '생물'이다. 이제 21세기까지 이어온 자본주의가 도대체 어떤 '생물'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현시대는 자본주의 경제가 세계 체제로 불릴 만큼 전 세계 모든 경제와 사회 전반을 장악하고 있다. 한때 자본주의의 대척점에 있다고 믿던 사회주의 체제가 여전히 소수 남아 있긴 하지만(북한, 중국, 베트남, 쿠바 등), 북한을 제외하면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포섭되어 있기에 이제는 대안성을 인정받기 힘들다.


그러므로 경제 이야기를 제대로 하려면 자본주의를 알아야 한다. 미리 전제할 것은 자본주의를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 추앙하는 것도, 모든 악의 근원이라며 당장 없애자는 이데올로기식 접근은 일단 삼가자.

그것을 설명하는 다양한 방식이 있지만 내가 볼 때 자본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상품이다. 자본주의는 세상 모든 게 상품이 될 수 있는 체제다. 자본가도 그저 부자가 아니라 상품을 만들어 팔 목적으로 생산수단을 갖고 스스로 일하거나 노동자를 고용한 사람이다.

흔히 상품이라면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건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실재하든 개념이나 상상이든, 팔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상품이 된다. 노동자도 자기 노동을 팔아 소득을 얻는 상품이다.

로마 교황청은 세계 가톨릭 신앙을 대표하는 종교 기구지만 수많은 관광상품을 만들어 막대한 수입을 벌어들이는 기업의 역할을 한다. 현대 이스라엘은 유대교가 사실상 국교이지만, 곳곳에 예수와 기독교 유적지의 상품을 만들어 판다. 미국은 세계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나라지만 사회주의, 왕정 체제나 독재 체제와 관련된 상품을 제작, 유통한다. 공정성, 정의, 애국심, 신앙심과 같은 가치나 개념도 얼마든지 상품으로 만들어 팔 수 있다.

1~2차 세계대전 이후

그러나 모든 게 상품이 될 수 있다는 혁명적 개념도 과학기술과 결합 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폭발적이고 전능하며 세계적인 체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주로 18세기부터 서구에서 시작된 눈부신 과학기술 혁명과 폭발적인 생산능력(산업혁명)이 자본주의 체제의 동력이 되었다.

자본가가 아이들까지 남김없이 공장으로 내몰 수 있었던 것은 공장만 돌리면 어마어마한 이윤을 얻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노동자는 사람이 아니라 약간의 비용만 지불하면 무한대의 이윤을 만들어 주는 살아 있는 기계였다. 국가도 이를 통해 이웃 나라와의 경쟁에서 이기고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으니 자본의 성장과 발전을 적극 지원하였다.

산업혁명의 본산지인 영국에서는 만 7세부터 노동자로 고용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어린이 사망률이 급증했다.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와 빈민을 위해 1페니로 밤샘 숙소, 2페니로 줄에 걸쳐 잠을 자는 '행오버', 4~5페니로는 구세군이 제공하는 담요 있는 관짝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마르크스 등 지식인과 종교인의 분노와 비판이 잇따랐다. 오죽하면 프랑스에서는 8세를 넘지 못하면 공장에서, 그리고 영국에서는 10세가 안 되면 광산에서 일할 수 없는 법이라도 제정해야 했다(피케티, 15쪽).

그러나 생산력과 상품이 아무리 늘어나도 국민(시민)이 가난해 재고가 쌓이고, 사회적 저항이 커지니 자본주의의 위기가 왔다. 그러자 19세기 후반 서구사회와 국가는 너도나도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값싸게 원료와 노동력을 조달하고, 만든 상품은 비싸게 떠넘기며 갈수록 부강해져 갔다.

자본주의 각국과 거대해진 기업 사이에서도 식민 쟁탈을 위해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제국주의시대가 된 것이다. 1~2차 세계대전은 식민국가들 사이에 자본증식의 피할 수 없는 결론이었다.

양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난 뒤 세계와 자본주의 질서는 다시 크게 변했다. 무엇보다 제국주의의 공멸로 이끈 자본주의 질서에 체제로 대항하는 소련, 중국, 북한 등 사회주의 체제가 처음 생겨났다. 미국은 세계를 이끄는 실질적인 리더가 되었고, 새 시대 자본주의를 이끌어야 할 책임도 지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다시 변했다. 밖으로는 소련과 함께 냉전의 장벽을 쌓아 1990년대 사회주의권이 잇따라 무너지기까지 40여 년 동안 체제대결을 선언하고 대립했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끝이 없는 자본의 탐욕과 무한 확장 욕구를 반독점 규제와 세금으로 어느 정도 제어하여 국민 일반과 소외계층의 복지제도 수립의 종잣돈으로 활용했다. 1950~70년대까지 수정자본주의, 복지국가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때 전후 자본주의는 다시 부흥했고, 소득 불평등은 줄어들었고 중산층이 늘어났다. 더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제가 필요 없을 것처럼 전망되었고, 유럽은 공산당도 반공(反共)을 받아들여 속속 자본주의로 흡수되었고, 사회민주당(사민당) 전성시대가 열렸다. 마치 자본과 노동, 기업과 시민의 윈윈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경제성장(자본)과 민주주의를 하나로 묶은 전후 자유민주주의가 국제적 전성기를 맞았다. 1960~80년대 대한민국을 비롯한 아시아 신흥국가들의 눈부신 경제부흥도 이때를 배경으로 일어난 일이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도래
 

2023년 12월 6일 윤석열 대통령이 부산 중구 깡통시장에서 재계 총수들과 함께 떡볶이 튀김 빈대떡을 맛보고 있다. 오른쪽 부터 구광모 LG그룹 회장, 윤 대통령, 박형준 부산시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 연합뉴스


그러나 전성기는 항상 갈등과 긴장, 위기와 함께 자란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자본가와 노동자, 갑부와 빈민 사이 격차만 커지는 게 아니다. 기업과 기업도 하늘과 땅만큼의 격차가 생겨 합병과 독과점 규모도 더욱 커진다.

이제 기업은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 팔거나 유용한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이윤을 얻는 정도를 훨씬 넘는다. 오히려 은행, 보험 등 금융과 부동산, TV나 라디오, 신문과 잡지 등 언론매체와 통신, 도로, 병원, 학교 등 공공영역까지 진출해 독점적 이익과 막대한 영향력을 갖게 된다.

세계적인 주요 대기업은 이미 개별국가로는 통제할 수 없는 규모와 힘을 갖게 되었다. 경제력이 정치력과 만만해지거나 오히려 능가하고 압도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대한민국도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위신을 위해 잼버리로, 떡볶이 가게로 재벌을 불러들이지만, 다른 한편 법과 제도를 바꿔 경영권 승계를 도와주고, 각종 세금을 깎아주고, 심지어 사법처리를 면제해 주거나 사면권을 행사해 쉽게 놓아준다.

5성 장군의 2차 세계대전 영웅이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1961년 고별연설에서 군이 산업계와 짝을 이뤄 안보를 상품 삼아 무한 이득을 추구하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군산복합체 현상을 경고했다.

"우리는 군산복합체에 의한 승인 받지 않은 영향력을 방어해야 한다. 잘못된 권력이 부상할 가능성은 현재에도 있고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다. 우리는 군산복합체의 압박이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과정을 위험에 처하게 놔둬서는 안 된다."

한국군도 1960~90년대까지 독재정치의 샘물 노릇을 하던 데서 성격을 바꿔, 이제는 정치 및 주요 재벌과 짝이 되어 한반도 안보와 국제정세 위기를 팔아 한국형 군수산업을 키우고 세계에 수출하는 큰손이 되어가고 있다.

자본주의는 더는 자본가 개인이나 한 기업의 이윤 욕구 정도가 아니라 자본에 유리하게 사회를 바꾸려고 시도하고, 국가 경계를 넘어 타국의 내정과 정치를 간섭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1980년대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자본 만능시대, 곧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아직 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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