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축구협회 국가대표 전력강화위원회가 한국 남자 축구대표팀 차기 사령탑 선임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정해성 전력강화위원장은 지난 4월 2일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열린 회의 진행 결과를 발표하며 "후보군을 총 11명으로 압축했다. 국내파 4명과 외국인 7명"이라고 설명했다.
 
전력강화위는 우선적으로 7명의 외국인 지도자와 비대면 면접을 추진할 계획이다. 하지만 정 위원장은 그렇다고 외국인 감독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또한 국내파 감독 후보군 중에서는 황선홍 올림픽대표팀 감독과 현직 K리그 감독들도 또다시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며 벌써부터 축구팬들의 우려가 나오고 있다.
 
축구협회는 지난 2023 AFC 카타르 아시안컵 이후 성적부진과 선수단관리 실패의 책임을 물어 독일 출신 위르겐 클린스만을 대표팀 감독직에서 경질했다. 이후 후임 감독을 물색해온 협회는 지난 3월 태국과의 북중미월드컵 아시아 2차예선 2연전에서는 황선홍 올림픽팀 감독을 '임시 감독'으로 선임하여 급한 고비를 넘겼다.
 
협회의 목표는 5월까지 새로운 정식 사령탑을 선임하겠다는 것이다. 다가오는 6월에는 2026 북중미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싱가포르 원정 경기(6일)와 중국과의 홈 경기(11일)가 잡혀있다. 신임 감독 체제에서 선수들을 파악하고 6월 A매치를 준비하려면 늦어도 5월 중순까지는 감독 선임을 완료해야 한다.
 
전력강화위원회는 대표팀 차기 감독 선임 기준으로 이미 8가지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전술적 역량 ▲ 취약 포지션의 선수 육성 능력 ▲ 지도자로서의 검증된 성과 ▲ 풍부한 대회 경험을 갖춘 경력 ▲ 선수 및 축구협회와의 소통 능력 ▲ 젊은 세대를 아우를 리더십 ▲ 최상의 코치진 구성 능력 ▲ 대표팀을 이끌고 성적을 낼 수 있는 능력 등이었다.
 
하지만 이는 감독으로서의 자질에 대한 원론적인 기준일뿐, 한국축구가 필요로 하는 구체적인 방향성이나 철학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6년 전 대표팀 감독 선임을 주도했던 김판곤 국가대표 감독 선임위원장의 경우, 능동적으로 '경기를 지배할 수 있는 축구스타일, 세계적 수준의 리그에서의 성과, 축구협회의 철학과 부합하는 인물' 등을 찾겠다며 지금의 전력강화위원회보다 훨씬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했고 그 결과 최종적으론 낙점된 인물이 파울루 벤투 감독이었다.
 
물론 벤투 감독도 당시 축구협회가 제시한 기준에 완벽히 부합하는 인물은 아니었고, 재임 시절에는 리더십이나 축구철학을 놓고 호불호가 갈리며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소한 4년간 대표팀에 나아가야 할 원칙과 방향성을 분명하게 설립했고 한 번도 흔들리지 않으며 결국 카타르월드컵 16강이라는 성과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 무엇보다 외부의 비판과는 별개로 선수단 내에서의 인망과 장악력은 확실했다.
 
그에 비하면 현재의 전력강화위원회는 어떤 원칙과 철학을 가지고 새 감독을 영입하겠다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처음 8대 기준을 제시하고 한 달여가 지났지만 여전히 진전된 내용은 없었다. 임시 감독 체제까지 감수하며 시간을 다소 벌었지만, 외국인 감독들을 다시 후보군에 포함시켰다는 정도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보이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외국인 감독 후보에 대한 검토는 형식적인 절차일뿐, 결국은 데려오기 쉽고 비용도 싸게 드는 국내파 감독을 최종선택할 것이라는 전망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특히 축구팬들의 불신과 반발을 사는 것은, 또다시 현재 팀을 맡고 있는 현직 국내파 감독들을 A대표팀 사령탑으로 빼내올 수 있음을 암시한 대목이다.
 
협회는 지난 2월에도 국내파 감독을 차기 대표팀 사령탑 우선순위로 고려중이라고 발표한 이후 여론의 거센 역풍을 맞았다. K리그 감독들이 시즌 개막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대표팀으로 차출될 수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K리그 팬들은 크게 반발하며 협회를 질타했고 트럭시위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협회는 정식 감독 선임논의를 뒤로 미루고 황선홍 올리픽대표팀을 임시 감독으로 낙점하는 것으로 한발 물러선 바 있다.
 
현재 국내파 감독후보 4인 중에 포함된 것으로 확인된 인물은 황선홍 감독이다. 여기에 K리그 현직 감독이 포함되었다면 울산 HD의 리그 2연패를 이끈 홍명보 감독도 포함되었을 것이 유력하다. 절친이기도 한 두 사람은 모두 2002 한일월드컵 4강멤버로 나란히 한국축구를 대표하는 전설이다. 협회가 만일 국내파 감독을 차기 사령탑으로 내정했다면 황선홍-홍명보 두 감독이 가장 강력한 후보 1순위들이 될 것으로 보인다.
 
황선홍 감독은 지난 3월 태국과의 2연전에서 1승 1무를 거두며 좋은 성적을 올렸고, 이강인의 대표팀 재발탁과 선수단 내분 사태 수습 등으로 선수단 운용과 관리에서도 모두 호평을 받았다. 정해성 위원장도 황 감독의 리더십을 극찬하기도 했다.
 
하지만 황선홍 감독은 올해 파리올림픽 본선진출이 걸린 AFC U-23 아시안컵을 앞두고 있다. 대회 3위 안에 들어야 파리행 직행 티켓을 거머쥘 수 있고, 4위가 되면 아프리카의 기니와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한다. 여기서 탈락하면 한국축구의 10회 연속 올림픽 본선진출이 좌절된다.
 
본선에 진출한다고 해도 7월 말에는 파리올림픽이 열린다. 6월 재개되는 북중미월드컵 2차예선까지 두 개의 팀을 황선홍 감독이 겸임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만일 올림픽팀이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황 감독이 모든 독박을 뒤집어쓰게 될수 있다.
 
다른 감독 후보들을 제쳐두고 황 감독에게 무거운 짐을 맡겨 올림픽팀까지 악영향을 끼친다면 협회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수 없다. 황 감독은 지난 3월 임시 감독 역할을 마친 후 "A대표팀 감독직에는 욕심이 없다. 올림픽팀에 집중할 것"이라며 선을 그었다.
 
홍명보 감독은 2014년 브라질월드컵 당시 A대표팀 감독을 맡은 바 있다. 당시 의리축구와 근무태만 등으로 각종 논란에 휘말렸고 대표팀도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하지만 10년의 시간이 흐르며 경험이 쌓였고 최근 울산에서 몇 년간 좋은 성적을 거두며 지도자로서의 평가를 회복한 상태다.
 
하지만 홍명보 감독을 대표팀으로 끌어올 경우, 협회가 또다시 일방적으로 K리그의 희생을 강요하는 전례를 되풀이했다는 오명은 피할 수 없다. 협회는 과거에도 2007년 박성화 당시 부산 감독을 올림픽팀으로, 2013년 최강희 당시 전북 감독을 A대표팀에 '소방수'로 끌어온 바 있다. 해당 감독들은 모두 처음엔 고사했지만 협회의 지속적인 압박을 이기지 못하여 독이 든 성배를 받아들여야 했다.
 
정해성 위원장은 "(K리그 감독을 빼오는 것이) 괜찮다는 표현을 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있다"며 신중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국가대표팀이라는 것은 한국 축구를 위한 것이고 굉장히 영광스러운 자리다. 축구협회와 감독, 소속팀에 대한 문제를 충분히 우선적으로 소통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K리그 감독을 시즌중 차출할 수 있다는 예고인 셈이다.
 
비록 조심스럽게 돌려서 표현하기는 했지만, 정 위원장의 입장은 결과적으로 그동안 협회의 한결같은 관행에서 달라진 것이 없다. 한국축구를 위한 대승적 결단을 내세우며 앞으로도 K리그는 감독을 빼가거나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그저 양보하고 수용해달라는 것에 불과하다.
 
협회는 지난 클린스만의 감독 선임 절차와 기준에서부터 1년여간 대표팀 운영 파행에 대하여 어떤 책임도 해명도 없었다. 그럼에도 사정이 다급해지자 다시 국내파 현직 감독들을 찾으며 폭탄돌리기하듯 무거운 짐을 떠넘기기에만 급급했다.
 
협회가 먼저 원칙이나 비전을 분명히 수립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만 국내파 감독이나 K리그에게 무조건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악순환의 반복만 초래할 뿐이다. 과연 축구대표팀의 새 감독 선임 과정은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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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대표팀 황선홍감독 홍명보감독 정해성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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