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이육사(李陸史, 1904-1944)는 일제강점기의 저항시인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다. 한손에는 펜을. 다른 한손엔 총을 들고 암울한 시대에 정면으로 맞서싸운 이육사는 평생 17차례의 옥고를 치르면서도 절대 굽히지 않았던 '시인이자 투사'였다.
 
4월 4일 방송된 SBS 실화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22회에서는 '칼날 위에서 노래하다. 이육사' 편을 통하여 우리가 미처 몰랐던 저항시인 이육사의 일대기와 숨겨진 진면목을 조명했다.
 
1941년 3월 27일, 서울 명륜동의 한 집에서 예쁜 여자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의 아버지는 사랑하는 딸에게 고심 끝에 100일 만에 '옥비(沃非)'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줬다.
 
그런데 이름을 한문으로 풀이하면 기름질 옥에 아닐 비, '기름지지 않다'는 의미로, 보통 사람의 이름에는 잘 쓰이지않는 한자였다. '윤택하고 기름지게 살지 말라'는 아버지의 작명에 숨겨진 진정한 의미는 '그만큼 욕심없이 남에게 배려할 수 있는 바른 사람이 되라'는 깊은 뜻을 담고 있었다.
 
옥비의 아버지가 바로 이육사 시인이었다. 그의 본명은 이원록(李源祿), 퇴계 이황의 14대 후손으로 손꼽히는 선비이자 명문가 출신이었다. 대표작인 '청포도' 등 이육사가 남긴 시들은 지금도 교과서에 실리고 대학수학능력시험에도 단골로 출제될만큼 대한민국 학생이라면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육사의 가족들은 선비 가문의 후손답게 그가 평소에도 엄격하고 진중한 성격이었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그런 이육사도 딸에게만큼은 한없이 자상한 딸바보 아버지였다고 한다. 이육사의 지인이었던 신석초 시인은 그를 맑은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고 회상하며 "제일류의 신사적인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이육사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된 것은 1935년 봄, 위당 정인보의 집에서 신석초를 처음 만나면서부터였다. 당시 이육사의 나이는 31세, 신석초는 26세였다. 5살의 나이차이에도 두 사람은 금세 가까워졌고 얼마 뒤에는 같은 잡지사에서 동료로 함께 일하게 된다.
 
두 사람은 자금난으로 잡지의 지면을 채우기 어렵게 되자 이육사는 신석초에게 직접 글을 써보자고 제안한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함께 시를 쓰기 시작했다. 훗날 신석초의 "이육사의 권고와 격려가 없었다면 시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밝히기도 했다.
 
함께 늘 붙어다니며 술자리도 여행도 언제나 함께 했던 이육사와 신석초였지만 서로 절대 언급하지 않는 암묵적인 '비밀'이 하나 있었다. 이육사는 친구들과의 모임중에도 갑자기 일이 있다며 종종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곤 했다. 신석초는 같은 일이 여러번 반복되었음에도 단 한 번도 이육사에서 자초지종을 묻지 않았다고 한다. "육사가 말하지 않는다면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며 친구의 비밀을 굳이 들춰내려고 하지 않았던 것.
 
하지만 언제나 함께할 것 같았던 두 친구에게도 이별의 순간이 찾아왔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이육사는 갑자기 중국 북경으로 떠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번에도 신석초는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육사가 떠나기 전 함께 눈밭을 걸었다. 이육사는 "다음에도 함께 눈을 밟으러 가세"라고 약속했다.
 
그해 여름, 이육사가 귀국했다는 소식을 접한 신석초는 반가운 마음에 친구들을 모아놓고 환영식을 준비했다. 하지만 이육사는 약속한 장소에 끝내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신석초는 이육사가 일본 형사들에게 끌려갔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그로부터 얼마 후 딸 이옥비는 아버지 이육사가 죄인에게 사용되는 용수를 쓰고 일본 경찰들에게 끌려가던 충격적인 모습을 목격한다. 대체 이육사에게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육사 시인의 비밀 '항일독립투쟁'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절친과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육사 시인의 비밀은 '항일독립투쟁'이었다. 이육사는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도쿄 유학을 떠났다가 그곳에서 관동 대지진과 조선인 대학살을 목격하게 된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테러를 저질렀다는 괴소문이 퍼지며 일본인 자경단들에게 학살된 숫자만 공식적으로 6661명(<독립신문> 추정)에 이르렀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의 처참한 현실을 목격한 이육사는, 다음 해에 귀국해 친형제들과 함께 항일 비밀 결사단에 가입하면서 독립 투쟁을 시작했다.
 
중국과 만주를 여러 차례 다녀온 이육사는 언제부터인가 일본 경찰로부터 요시찰(주요경계대상) 인물로 낙인 찍혀 집중적인 감시를 받았다. 수상한 사건이라도 터지면 일단 이육사가 불려가는 일도 다반사였다.
 
1927년에는 대구의 조선은행 폭발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됐다. 이육사가 직접 관여했다는 증거는 하나도 나오지 않았지만, 이번에도 일본 경찰은 이미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던 이육사와 그 형제들에게 거짓 혐의를 씌웠고 허위 자백을 위한 고문까지 저질렀다. 하지만 이육사는 끝까지 굽히지 않았고 무려 1년 7개월 옥고를 치른 뒤에야 증거가 없다는 것이 밝혀져 석방됐다.
 
하지만 이육사는 이후로도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더욱 매진했다. 본인의 이름을 이육사로 개명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이육사는 바로 일본이 그에게 붙인 수인번호(264)를 그대로 사용한 것. 또 다른 의미로는 한자로 죽일 육(戮)에 역사 사(史)자를 사용하며 '일제 치하의 역사를 부정하겠다'는 뜻도 담고 있었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도 고통을 잊지도 않고 더 당당하게 맞서겠다는 그만의 투쟁 방식이었다.
 
이후에도 이육사는 일본 경찰에 수차례나 체포됐고 그때마다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육사의 아내는 남편이 투옥된 형무소에 매주 새 옷을 넣어줬는데 기존에 입고 있던 옷을 돌려받을 때마다 흰 옷이 항상 피로 물들어있었다고 한다. 옥고를 치를수록 이육사의 몸은 점점 망가져갔지만 그럼에도 그는 '독립의 꿈'을 끝내 꺾지 않았다.
 
1932년 봄, 일본의 추적을 피하여 갑자기 사라진 이육사가 향한 곳은 중국의 남경이었다. 이육사는 독립군 장교가 되기 위하여 의열단이 세운 군사간부 양성 학교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했다. 주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육사는 대단한 명사수였고 다양한 변장술과 외국어에도 능했다고 한다. 현대인들에게는 그저 '시인'의 이미지로서만 알려진 '투사' 이육사의 또다른 면모다.
 
이육사는 군사 훈련을 마치고 6개월 뒤 조선으로 돌아왔다.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군사간부 학교 2기생을 모집하는 것이 이육사의 임무였다. 하지만 이육사는 활동을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또다시 일본에 체포 당하여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다
 
이육사가 출소 직후에 만나게 된 것이 신석초 시인이었다. 이육사는 절친이었던 신석초에게는 자신이 하고 있던 독립운동에 대해 전혀 알리지 않았다. 이는 자신 때문에 혹시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친구를 지키고 싶었던 마음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신석초 역시 이육사가 하는 일을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신석초는 어느날 중국에서 돌아온 이육사가 겨울에 외투도 입지 않고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보자, 아무말 없이 입고 있던 옷을 벗어서 덮어줬다고 한다. 이번에도 신석초는 이육사에게 어디서 무슨을 하다 왔는지 어떤 것도 묻지 않았다. 두 친구가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식이었다.
 
저항시 '청포도'에 담긴 메시지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이육사는 신석초를 만난 이후 본격적인 시인의 길에 접어들었다.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다 해소할 수 없었던 마음 속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그만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이육사에게는 시 역시 현실에 맞서는 또 하나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당시 이육사가 자신의 대표작인 저항시 '청포도'에 담긴 메시지를 직접 해석한 내용도 존재한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라는 대목에서 내 고장은 '조선'을, 청포도는 '우리 민족'을 상징한다. "청포도가 익어가는 것처럼 우리 민족도 익어간다. 그리고 곧 일본도 끝장난다"는 것이 이육사가 밝힌 시의 진정한 의미다.
 
또한 1940년에 발표된 '절정'에서는, 내선일체를 추구한 일본의 조선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하여 글과 말을 빼앗기고 민족문학의 거두들마저 친일로 돌아선 암울한 현실에 대한 분노를 담아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는 시에서는 매순간 칼날 위에 서 있는 위태로운 현실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한편으로 시의 제목을 '절정'으로 명명한 것은, 이 고비만 지나가면 봄이 다시 오지 않을까라는 한 줄기 희망을 담은 것이기도 했다.
 
이후 이육사는 소중한 딸 옥비를 얻었지만, 독립투쟁을 위하여 가족을 두고 다시 중국으로 떠나야 했다. 이육사는 떠나기 전 옥비를 종로에서 가장 큰 화신백화점으로 데리고 가서 분홍색 모자와 벨벳 투피스, 까만 구두를 선물로 사주었다. 그리고 이는 이육사 부녀가 함께한 마지막 시간이자 마지막 선물이 되었다. 그리고 절친이었던 신석초에게도 작별 인사를 건네고 이육사는 중국으로 떠났다.
 
이육사는 이후 중국내에서 활동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의용대를 연결하는 임무를 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육사는 어머니와 큰 형의 첫 번째 제사를 지내기 위해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일시 귀국을 선택했고, 곧바로 일본 헌병대에 붙잡히고 만다.
 
이육사는 조사 후 북경으로 압송이 결정됐다. 손목에는 포승줄이 묶이고 발목에는 쇠고랑이 채워졌으며 머리에 용수를 씌워 얼굴을 가렸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이육사의 아내는 기차에 오르기 전, 이육사가 딸의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가라고 옥비를 안아서 높이 들어보였다. 이를 본 이육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딸에게 다가왔다. 사랑하는 딸을 향하여 이육사는 "아버지 다녀오마"라는 담담한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하지만 이육사는 끝내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육사의 사촌 이병희는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에 붙잡혀 북경 지하 감옥에 갇혀서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이에 이육사는 사촌 이병희는 무관하다며 풀어달라고 요구하며 본인이 보증을 자처하고 홀로 감옥에 남았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의 한 장면. ⓒ SBS

 
그리고 이병희가 풀려난 지 불과 닷새 후, 형무소에서 "이육사의 시신을 찾아가라"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가혹한 고문과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이육사가 끝내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다. 1944년 1월 16일 새벽, 향년 40세로 이육사는 그렇게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그토록 꿈에 그리던 해방을 불과 1년 반 정도밖에 남겨놓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병희 선생은 세상을 떠난 이육사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코로는 피를 흘리면서 차마 눈을 감지 못한 상태였다고 회상했다. 이병희는 "아무 걱정 말고 가시오. 조국의 독립은 후손들에게 맡기시고 편히, 편히 가시오"라며 그의 눈을 세 번이나 쓰다듬자 그제야 겨우 눈을 감았다고 한다.
 
이육사가 떠난 지 1년 후 조국은 그토록 기다렸던 해방을 맞았다. 2년 후인 1946년에는 이육사의 동생이 형이 남긴 작품들을 모아 시집을 발간했다. 당시 이육사와 절친했던 신석초와 친구들이 시집에 서문을 써주었다고 한다. 신석초 시인은 이후로도 평생 시와 함께 살다 1975년에 작고했다.
 
신석초의 조카는 유품을 정리하다가 이육사 시인과 주고받은 편지를 발견했다. 그안에는 서로를 진심으로 의지하고 가까웠던 두 사람의 친근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가득했다. 이제는 천국에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함께 행복하게 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이육사의 딸 이옥비씨는 이제 어느덧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되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부재로 그리웠던 순간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고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고 있다고 고백했다.
 
옥비씨는 "저도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이 욕심 없는 삶을 살라는 의미 아닌가. 그래서 저는 '조금 모자란 듯이 사는 게 제 삶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라며 미소를 지었다. 아마 이육사도 하늘에서 딸의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고 있지 않을까.
 
이육사가 사후에 남긴 유품은 만년필 한 자루와 마분지 한 장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 마분지에는 유언 대신 이육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시 '광야'가 적혀 있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는 아마 이육사가 세상에 전하고 싶었던 마지막 유언이자 염원이 아니었을까. '시'를 통하여 조국과 민족의 독립된 오늘을 염원했던 이육사의 간절한 바람은 결국 현실이 됐다. 만일 그가 살아있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과연 어떤 모습이기를 바랬을까. 시에 마음을 담아냈던 이육사의 시를 그동안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을까 되새겨보게 만든다.
꼬꼬무 이육사 저항시인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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