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 드라마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MBN 드라마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 MBN

 
세자가 보쌈을 당하는 이야기를 다루는 MBN <세자가 사라졌다> 제1회에서 세자 이건(수호 분)이 고급 기방에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건이 이복동생 도성대군(김민규 분)과 함께 주점에 간 것은 술을 마시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들은 아무도 모르게 역모 혐의자들을 수사했다. 이건은 혐의자들과 격투를 벌이다가 얼굴에 상처를 입었다. 그 상처를 감출 목적으로 기방에 들어갔던 것이다. 거기서 화장품을 빌려 상처를 가린 이들은 궁에 복귀한다. 화장품 냄새를 의아해 하는 조정 대신들은 세자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양력으로 1653년 8월 16일 제주도에 표착한 헨드릭 하멜 일행은 조선 정부의 안내를 받으며 그곳에서부터 한성(한양은 별칭)까지 이동했다. 이때부터 하멜은 <하멜 표류기>로 불리게 될 일기를 작성했다.
 
한양으로 이동하던 중에 하멜의 시야에 포착된 것이 대로변의 영업소들이다. "서울로 가는 큰길에는 고관이든 일반 백성이든 여행자들이 묵어갈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휴게소가 있다"고 그는 일기에 썼다.
 
하멜이 목격한 것이 주막이든 기방이든, 이런 유흥업소가 조선 후기에는 많아졌다. 하멜이 온 때로부터 72년 뒤인 1725년에 전 만호 이태배(李泰陪)가 영조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에도 그것에 관한 지적이 나온다. 종4품 무관인 만호(萬戶) 벼슬을 지낸 그의 상소문은 주상 비서실의 업무일지인 <승정원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양에 도착한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
 
 MBN 드라마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MBN 드라마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 MBN

 
음력으로 영조 1년 9월 24일자(양력 1725.10.29) <승정원일기>에 수록된 이 상소문은 식량 대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에서 과도한 음주 문화를 언급했다. 이태배는 곡식이 막걸리 빚는 용도로 허비되고 있다며, 대중이 술을 많이 먹는 원인으로 주점의 번창을 지목했다. 그는 "자고 이래로 술을 지나치게 빚는 일이 지금처럼 고질적 폐단이 된 적은 없었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수십 년 전을 보면, 도성 내외에 주호(酒戶)가 고작 백여 개여서 좋은 술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른 부(部)나 방(坊)이나 리(里)나 교외로 멀리 갔지만, 역시 큰 가게는 없었습니다.
 
근년에 이르러는 도성 백성들이 술을 좋아하는 풍습과 이익을 좇는 풍속이 나날이 바뀌고 다달이 달라져 5부 40여 방의 방방곡곡에 모두 주막 깃발이 꽂혀 있습니다. 10가구 동네에서 다섯이 주호라서 도성 내에서 하루에 빚는 술의 양이 밥을 짓는 것과 거의 비슷하니, 1년간 소비되는 것이 몇 만 석인지 알 수 없습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도성 사람들이 술을 마시려면 다른 동네로 가거나 한양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랬던 것이 이제는 도성 내에도 많아져서 가까이서서도 얼마든지 술집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 이태배의 지적이다.
 
역사 기록에 나오는 '열에 한둘', '열의 서넛', '열의 대여섯', '열의 아홉' 같은 표현을 문자 그대로 10~20%, 30~40% 등으로 바꿀 수는 없다. 옛날 사람들도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는 않았다. 위 상소문에 나오는 "10가구 동네에서 다섯" 역시 마찬가지다. 열 집 중 다섯이 술집일 정도로 술집이 많아졌다는 의미로 당시 사람들은 받아들였다.
 
하멜 일행이 표착한 지 9개월 만에 조정은 그들을 도성으로 소환했다. 이 일행은 전라도 해남에 상륙한 뒤 나주-정읍-전주-공주를 거쳐 한양으로 이동했다. 효종은 이들을 경호부대에 배속시켰다. 이때는 이태배가 상소한 시점으로부터 수십 년 전이다. 이태배의 말에 따르면 도성 내외에 술집이 많지 않던 시절에 이 네덜란드인들이 한양에 도착했던 것이다.
 
술집이 많아졌다는 이태배의 지적은 영조 집권기 초반에 나왔다. 비슷한 언급이 52년간에 걸치는 영조 집권기의 중반에도 나왔다.
 
영조 24년 4월 30일자(1748.5.26) <승정원일기>에 성균관 종9품인 학유(學諭) 벼슬을 지내는 전의채(全義采)의 상소문이 나온다. 이 상소문에 "여럿이 술마시는 일이 날로 성행하고 주점이 날로 증가하여 시가지에서 주점이 열 집 중 여덟아홉"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시장 점포 열 곳 중에서 여덟아홉이 주점일 정도로 술집이 많아졌다는 지적이다.
 
그런 주점의 상당수는 여성이 운영했다. 이 점은 정조 때 종5품 도사(都事)를 지낸 김응두(金應斗)의 상소에 나타난다. <승정원일기>의 정조 16년 9월 1일자(1792.10.16) 기록에 따르면, 김응두는 여성이 운영하는 주점이 열의 대여섯이라고 말했다.
 
조선 후기에 여성이 운영하는 주점이 많았던 까닭
 
 MBN 드라마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MBN 드라마 <세자가 사라졌다>의 한 장면 ⓒ MBN

 
주점의 법적인 소유자가 여성이냐 남성이냐에 관심을 갖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생이 근무하는 기방이냐 아니냐가 주된 관심사였을 것으로 보인다. 김응두의 상소문은 그런 기방이 정조시대에 꽤 많았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주점이 많아진 것은 상업과 도시의 발달에 크게 기인하지만, 제도적 변화에도 적지 않게 원인을 둔다. 조선 후기에는 관노비의 일종인 관기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느슨해졌다. 궁궐이나 관청 행사 때 관기들을 동원해 공연을 여는 여악(女樂) 제도가 이 시기에는 약해졌다.
 
기예가 우수한 관기들을 장악원에 소속시키던 제도가 인조 임금 때 폐지된 것이 이런 흐름을 반영한다. 인조 1년 3월 23일자(1623.4.22) <인조실록>에는 여악 제도를 폐지하라는 사간원(충언 담당)의 건의를 인조가 재가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로 인해 여악 제도가 전면 폐지된 것은 아니다. 장악원 여악 제도를 폐지했을 뿐이다. 기녀들을 궁궐 행사에 동원되는 제도는 그 후로도 유지됐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국가의 관기 동원은 그 후로 축소됐다.
 
인조가 재가를 내린 양력 1623년 4월 22일은 광해군이 강화도로 유배를 떠난 날이다. 인조 쿠데타(인조반정)로 11일 전에 정권을 빼앗긴 광해군이 유배를 가는 날에 여악 제도가 축소됐던 것이다.
 
쿠데타 직후의 혼란기에 여악 제도를 축소한 데는 정치적 동기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인조 정권은 임진왜란으로 위축된 여악 제도를 다시 활성화시킨 인물이 광해군이라고 비판했다. 위 날짜 <인조실록>에서 나타나듯이 인조 정권은 여악 제도의 재활성화를 광해군 시대의 적폐로 규정했다. 광해군을 몰아낸 직후에 이 제도를 축소한 데는 전 정권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인조 집권기의 여악 제도 축소는 관기 예능인들이 관청이 아닌 다른 데서 활동 무대를 찾도록 하는 원동력이 됐다. 그중 상당수는 민간의 예능 무대를 찾아 나섰다. 주점이나 기방이 그런 무대가 됐다. 주점이 많아져 열의 대여섯이니 여덟아홉이니 하는 과장된 표현들이 조선 후기에 자주 나온 데는 이런 요인도 크게 작용했다.
관기 기생 기녀 기방 주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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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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